
1521년, 보름스 제국회의의 거대한 위압감 앞에 섰던 마르틴 루터의 형상은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신앙인들의 가슴 속에 강렬한 잔상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의 앞에는 당대 최고의 권력인 황제의 서슬 퍼런 위엄이 버티고 있었고, 그의 뒤에는 죽음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대가가 입을 벌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절체절명의 순간, 루터의 영혼을 붙들었던 것은 눈에 보이는 권력의 서슬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단독자로 마주한 깨어 있는 양심이었습니다.
**장재형 목사(올리벳대학교 설립자)**의 히브리서 11장 강해는 바로 이 ‘두려움의 전이’에서부터 그 깊은 논의를 시작합니다. 믿음이란 결코 막연한 긍정이나 자기 암시가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 ‘누구를 더 두려워할 것인가’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영혼의 근본적인 방향 전환입니다. 이 설교는 모세라는 거대한 인물을 통해, 참된 믿음이 어떻게 세상의 서슬 퍼런 명령을 넘어서 오직 하나님만을 경외하는 자리로 우리를 이끌어가는지를 장엄하게 증언합니다.
🛡️ 1. 사선(死線)을 넘는 경외: 제국의 칙령보다 깊은 신앙의 뿌리
히브리서 기자가 모세라는 위대한 인물을 소환하며 가장 먼저 비추는 조명은 그의 화려한 업적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를 잉태하고, 숨기고, 끝내 품어 안았던 부모의 이름 없는 믿음입니다. 파라오의 잔인한 영아 학살령이 온 땅을 공포로 몰아넣던 시절, 모세의 부모는 아이를 숨겨 기르다 갈대 상자에 담아 나일강의 물결 위에 띄웠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 그것은 무모한 도박이자 절망적인 몸부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처절한 선택을 주저 없이 ‘믿음’이라 명명합니다. 그들의 중심에는 단순한 혈육의 정을 넘어선, 임금의 명령보다 하나님의 생명 주권을 더 크게 여긴 거룩한 경외심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 히브리 산파들의 용기: 이 설교는 모세의 부모를 당시 제국의 명령을 거부했던 산파 십브라와 부아의 믿음과 나란히 놓습니다. 제국은 죽음을 명했으나, 이름 없는 이 여인들은 생명의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왕의 명을 거슬렀습니다.
- 지혜로서의 믿음: 여기서 믿음은 하나의 또렷한 신학적 통찰로 정립됩니다. 참된 믿음은 세상을 무모하게 무시하는 광기가 아니라, 하나님을 세상보다 더 높이 아는 지상 최고의 지혜입니다. 그 지혜가 한 아이를 살렸고, 한 민족의 구원 역사를 열었으며, 마침내 모세라는 거인을 역사의 무대 위에 세워 놓았습니다.
👑 2. 왕궁의 보화와 바꾼 능욕: 정체성이 결정하는 가치의 무게
장성한 모세의 앞에는 극명하게 대비되는 두 갈래의 길과 두 개의 이름이 놓여 있었습니다. 하나는 ‘이집트 공주의 아들’이라는 이름 뒤에 보장된 화려한 권세와 안락이었고, 다른 하나는 ‘고난받는 히브리 노예’라는 이름 뒤에 기다리는 수치와 불확실성이었습니다. 세상의 저울질로는 결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선택지 앞에서, 모세는 과감히 왕궁의 이름을 내려놓고 자기 백성과 운명을 함께하는 길을 택합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대목에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라는 본질적인 문제를 제기합니다. 믿음은 단순히 관념적인 동의를 넘어, 내가 최종적으로 누구에게 속한 사람인가를 끝내 잊지 않는 철저한 자기 자각이라는 것입니다.
- 가치의 재발견: 모세는 잠시 누리는 죄악의 낙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겪는 고난을 ‘더 좋아했습니다.’ 그는 이집트의 모든 보화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더 큰 재물로 여겼습니다.
- 상 주심을 바라보는 시선: 히브리서는 그 비결을 ‘상 주심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우리는 흔히 은혜를 말할 때 보상을 언급하는 것을 세속적이라 치부하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을 찾는 자에게 상 주시는 분이심을 분명히 가르칩니다. 이 상급은 탐욕의 대상이 아니라, 보이는 찰나의 영광을 버리고 영원한 약속을 선택하게 만드는 믿음의 동력입니다.
🏜️ 3. 광야라는 연단장: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인내의 시간
모세의 믿음은 단 한 번의 결단으로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동족을 돕겠다는 혈기로 살인을 저지르고 광야로 도망쳐야 했던 40년의 세월은, 그에게 있어 실패의 공백이 아니라 가장 깊은 영적 성숙의 시간이었습니다. 이 설교는 광야의 시간을 하나님께서 사람 안에 남아 있는 이집트의 습성—세상의 힘과 논리—을 낱낱이 벗겨 내시는 **’거룩한 세탁’**의 과정으로 정의합니다.
- 인내로 빚어지는 믿음: 참된 믿음은 즉각적인 승리의 환호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묵묵히 견뎌내는 인내 속에서 비로소 단단해집니다.
- 한계 지점에서의 기적: 유월절 밤의 문설주 피나 홍해 앞에서의 순간은 인간의 계산이 끝나는 지점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됨을 보여줍니다. 뒤에는 파라오의 전차가, 앞에는 넘실거리는 바다가 가로막은 절망의 자리에서 모세는 현실의 공포를 압도하는 하나님의 구원을 먼저 보았습니다. 믿음은 길이 보일 때 걷는 것이 아니라, 길이 보이지 않는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여실 길을 확신하며 발을 내딛는 용기입니다.
🧱 4. 무너지는 성벽을 넘어: 더 좋은 것을 예비하신 하나님의 약속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행진은 모세 한 사람에게서 멈추지 않습니다. 여리고를 무너뜨린 여호수아의 순종, 소문 속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발견한 라합의 결단, 그리고 사자의 입을 막고 나라를 이긴 수많은 선진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그러나 장재형 목사가 전하는 믿음의 세계는 승전가로만 가득 찬 곳이 아닙니다. 채찍과 결박, 궁핍과 환난, 심지어 토굴에 거하며 목숨을 잃었던 ‘이름 없는 순교자들의 눈물’ 또한 믿음의 소중한 한 축임을 잊지 않습니다.
- 더 좋은 것(Better Thing): 믿음의 선진들은 위대한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의 실체(그리스도)를 완전히 소유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늘 우리를 위해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죄 사함과 영생, 그리고 결코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약속입니다.
- 역사의 온전함: 구약의 성도들이 멀리서 바라보며 갈망했던 그 성취가 이제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성도는 과거를 부러워하는 자가 아니라, 그들의 기다림이 무엇을 향해 있었는지를 깨닫고 그 믿음의 역사를 우리 안에서 완성해 나가는 이들입니다.
🌅 마치는 글: 지금 당신을 움직이는 동력은 무엇입니까?
결국 이 설교가 우리 영혼의 깊은 곳에 남기는 질문은 매우 차갑고도 날카롭습니다. “오늘, 지금 이 순간 당신의 삶을 추동하는 엔진은 무엇입니까?”
세상의 평판입니까? 손에 잡히는 통장의 잔고입니까? 아니면 눈에 보이지 않으나 끝내 모든 것을 성취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입니까? 믿음은 성경 속 먼지 쌓인 인물들에게만 허락된 초자연적인 신비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늘도 자신의 정체성을 잊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고, 세상이 주는 공포보다 하나님을 더 크게 여기며, 편안한 타협의 길보다는 좁고 진실한 순종의 길을 선택하는 평범한 성도들 안에서 매일같이 재현되는 기적입니다.
그 작은 순종의 자리가 바로 복음의 은혜가 한 개인의 삶을 넘어, 이 시대 전체의 소망으로 번져 나가는 발원지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