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형목사 강론: 율법의 돌비를 넘어, 마음판에 기록되는 그리스도의 편지와 복음의 자유

장재형목사

프랑스의 위대한 작가 빅토르 위고의 명작 소설 《레 미제라블》의 거대한 서사 속에서, 한 인간의 비참한 인생을 완전히 돌려세운 결정적인 계기는 차갑고 무자비한 법의 판결문이나 정죄의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온유한 용서와 긍휼의 손길이었습니다.

세상의 법은 인간의 숨겨진 죄악을 낱낱이 들춰내어 고발할 뿐이지만, 참된 용서는 그 상처 입은 영혼을 이전과 전혀 다른 생명과 사랑의 삶으로 새롭게 불러내었습니다.

미국 올리벳대학교(Olivet University)의 설립자인 장재형 목사는 신약성경 고린도후서 2장과 3장의 깊은 본문을 섬세하게 따라가며, 과거 모세에게 주어졌던 율법이 인간의 죄를 깨닫게 하는 차가운 돌비에 불과하다면, 십자가의 보혈과 성령으로 우리의 마음판에 친히 새겨지는 복음은 사람을 참된 생명과 해방으로 이끄는 영원한 새 언약임을 명확하게 밝혀줍니다.

이 거룩한 성경 묵상의 중심에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를 향한 묵직하고도 피할 수 없는 하나의 날카로운 질문이 놓여 있습니다.

과거의 율법 조항이나 종교적 지식처럼 우리의 믿음이 단순히 낡은 문자로만 머물러 있는가, 아니면 세상의 상한 영혼들이 삶의 현장에서 읽어낼 수 있는 살아 숨 쉬는 ‘그리스도의 편지’로 온전히 완성되어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종이 추천서가 멈춰 선 그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편지가 당당히 일어나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목양하는 과정에서 정면으로 맞닥뜨려야 했던 위기와 문제는 단순히 개인적인 오해나 감정의 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시에 교회 안에 침투했던 거짓 교사들과 이기적인 율법주의자들은 바울에게 사도직을 증명할 만한 공식적인 ‘추천서’가 없다는 약점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며 그의 사도적 권위를 사사로이 의심했고, 그가 전하는 복음의 자유가 지나치다며 악랄하게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그 거센 비난 속에서도 끝까지 타협하지 않고 지키려 했던 것은 자신의 얄팍한 명예나 사도적 권력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 지닌 순수성 그 자체였습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사역의 거룩한 권위가 인간이 만들어낸 종이 문서나 사람의 승인에서 나오는 것인지, 아니면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부르심과 성령의 열매에서 비롯되는 것인지를 분명하게 가려내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당시의 문화 속에서 추천서 자체라는 것이 완전히 무의미하거나 쓸모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초대 교회 공동체의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추천서는 낯선 사역자의 영적 신뢰성을 진정으로 확인하고, 이단적인 거짓 가르침을 지혜롭게 경계하는 유용한 외적 표지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 어떤 인간의 문서도 복음이 맺는 생명의 열매를 결코 대신할 수 없으며, 사람의 칭찬과 승인이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보다 결코 앞설 수 없음을 꿰뚫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화려한 외적 증명서가 손에 들려 있다 할지라도 성령의 능력으로 완전히 변화된 실제적인 사람이 없다면, 그 추천서는 복음의 생명력을 조금도 말해 주지 못하는 빈 메탈에 불과했습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자신을 세상 앞에 증명해 보일 그 어떤 종이 문서를 주머니에서 꺼내는 대신,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눈물겹게 변화된 실제 삶의 현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습니다.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 사람이 읽고 아는 바라”라는 감격스러운 선언은, 먹물로 빽빽하게 작성된 세상의 그 어떤 추천서보다 성령의 불길로 성도들의 마음판에 직접 쓰인 내면의 변화가 훨씬 더 확실하고 분명한 증거라는 뜻이었습니다.

돌비에 무겁게 새겨진 과거의 외적 명령과 달리, 복음은 우리의 부드러운 육의 마음에 깊이 새겨져 우리의 생각과 선택,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그리고 인생 전체의 방향성을 완전히 새롭게 빚어냅니다.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재 자체야말로 그가 전파한 복음이 진실하다는 것을 세상에 증언하는 가장 강력하고 살아 있는 문서였습니다.

이 심오한 비유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의 신앙생활도 조용히 심문하고 진단을 내립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의 신앙이 얼마나 깊은지 화려한 경력과 방대한 성경 지식, 그리고 세상의 외적인 인정을 통해 증명하려 안달하지만, 복음이 과연 내 마음에 참으로 새겨졌는지는 결국 일상의 삶 속에서 맺어지는 열매를 통해 백배나 드러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 우리의 이기적인 사랑을 더 깊게 만들고, 따뜻한 은혜가 메마른 인간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꾸며, 흔들리는 믿음이 세상의 이기적인 기준보다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을 온전히 따르게 할 때, 비로소 인간은 세상이 읽을 수 있는 한 통의 편지가 됩니다.

그리스도의 편지는 그저 정교한 종교적 언어나 신학적 수사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께서 완전히 변화시키신 한 사람의 진실한 삶을 통해 비로소 온전한 완성에 이르게 됩니다.

돌비가 매섭게 비춘 죄의 실체, 그리고 복음의 은혜가 새롭게 연 영원한 생명

구약의 율법은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거룩한 기준을 온 세상에 환하게 비추어 주며,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무엇을 처절하게 잃어버렸는지 뼈저리게 깨닫게 만듭니다.

그것은 우리의 은밀한 죄를 결코 덮어두지 않고 낱낱이 드러내며, 연약한 인간이 오직 자신의 의지와 공로만으로는 결코 하나님의 완전한 의로움에 이를 수 없다는 비참한 진실을 폭로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악을 냉정하게 고발하는 것과, 죽어가는 죄인을 은혜로 구원하는 것은 결코 같은 차원의 일이 아닙니다.

율법은 우리의 영혼이 입은 깊고 곪은 상처를 거울처럼 정직하게 비추어 줄 수는 있을지언정, 그 치명적인 상처에 스스로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어 치유할 수는 없습니다.

장재형 목사의 깊은 성경 강해는 율법과 복음을 서로 대적하는 적대적인 관계로 설명하지 않고 구속사적 연속성 속에서 조화롭게 풀어냅니다.

율법은 인간이 복음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가장 확실하고 철저한 준비 기간이며, 복음은 과거 율법이 오랜 세월 동안 간절히 가리키고 예표하던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 계획을 십자가 위에서 마침내 완벽하게 성취합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비유했던 초등교사의 역할처럼, 율법은 인간을 자신의 의를 붙들던 막다른 골목까지 끌고 가서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만을 간절히 찾도록 무릎 꿇게 만듭니다.

율법이 인간의 절대적인 무력함과 부패성을 낱낱이 폭로한다면, 복음은 바로 그 소망 없는 무력함의 깊은 나락으로 친히 걸어 들어와 우리를 죄와 사망의 무서운 권세로부터 완전히 해방시켜 주십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우리를 정죄하지만, 복음은 우리를 영원히 해방한다”라는 선언은 결코 우리가 지은 죄의 무게를 가볍게 여겨도 된다는 값싼 방종의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의 죄악이 얼마나 심각하고 끔찍한지를 가장 깊이 깨달은 바로 그 벼랑 끝에서, 인간의 더러운 공로가 아닌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은혜를 힘입어 영원한 새 생명을 얻는다는 복음의 대반전입니다.

복음은 율법이 우리를 향해 제기했던 두려운 질문들을 외면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림을 통해 완전한 죄 사함과 생명의 생수를 마실 수 있는 새로운 길을 활짝 열어놓았습니다.

로마서가 장엄하게 선포하는 생명의 성령의 법은, 과거에 죄와 사망의 차가운 법 아래 매여 신음하던 인간을 전혀 새로운 영적 관계와 거룩한 삶의 궤도로 이끌어 갑니다.

여기서 우리가 결코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복음이 약속하는 진정한 자유란 아무런 도덕적 기준도 없이 나의 육신이 원하는 대로 방탕하게 살아가는 무법천지의 자유가 결코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것은 다가올 심판의 정죄에 대한 두려움과, 내 힘으로 거룩해져야 한다는 자기 의를 증명하려는 피 말리는 강박관념에서 완전히 벗어나, 이제는 성령의 따뜻하고 세미한 인도하심 안에서 하나님을 향해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된 자녀의 거룩한 자유입니다.

과거에는 외적인 율법의 명령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억지로 움직이던 메마른 마음이, 이제는 나를 먼저 사랑하신 주님의 은혜에 눈물로 응답하며, 의무의 멍에로만 남아 있던 순종이 내 영혼의 가장 달콤한 생명의 열매로 맺히게 됩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더욱 무겁고 짓누르는 돌판의 율법을 등 뒤에 얹어주는 대신, 딱딱하게 굳어버린 우리의 심장을 부드럽게 새롭게 빚어주어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기쁨과 감격으로 순종하게 만듭니다.

성령의 거룩한 자유가 우리의 마음판에 영원히 새기는 위대한 새 언약

사도 바울은 자신과 함께 복음을 위해 달리는 동역자들을 가리켜 당당하게 “새 언약의 일꾼”이라 칭하며, “의문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요 오직 영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라”고 엄숙하게 선포합니다.

여기서 성경이 말하는 새 언약이란 단순히 옛날의 문자 몇 줄을 살짝 교체하여 만든 새로운 행정적 규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살아 계신 만군의 하나님의 영이 연약한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 친히 찾아와 역사하심으로, 알면서도 행하지 못하고 죄의 줄에 묶여 허덕이던 인간을 실제로 거룩하게 변화시키는 생명의 전능한 능력입니다.

복음이 우리의 마음판에 새겨진다는 것은 단순히 성경 지식이 머릿속에 차곡차곡 늘어난다는 지적 차원을 넘어,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중심이 위로부터 임하는 은혜로 완전히 새롭게 태어난다는 뜻입니다.

성령의 신비로운 역사는 우리에게 또 다른 외적인 무거운 책임을 덧씌우는 대신,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소원과 순종할 수 있는 하늘의 능력을 불일듯 일으킵니다.

이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순종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눈치를 보며 거래하는 비열한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주님께 먼저 듬뿍 받은 사랑에 감격하여 드리는 자원하는 응답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새 언약의 삶은 결코 하나님의 율법이나 도덕적 규율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살아가는 무질서한 삶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을 훨씬 더 깊고 넓게 사랑하게 된 성숙한 삶입니다.

기록된 문자 밖으로 교묘하게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문자가 그토록 간절히 가리키고 품고자 했던 거룩함과 사랑의 진수를 오직 성령 안에서 매일의 삶으로 온전히 살아 내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 모세의 얼굴에 잠시 스쳐 지나갔던 율법의 영광은 비록 실제적이고 두려운 것이었으나 안타깝게도 언젠가 사라져 버릴 일시적인 광채에 불과했습니다.

반면에 오직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의 영광은 찰나에 사라지고 말 허망한 광채가 아니라, 죄인인 우리를 마침내 주님의 거룩한 형상으로 영원히 변화시키는 지속적이고 폭발적인 구속의 역사입니다.

바울이 감격 속에 언급한 “영광에서 영광으로”의 찬란한 변화는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일시적인 감정적 흥분이나 완벽하게 도달한 신앙의 정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영혼의 수건을 완전히 벗어던진 얼굴로 주님의 눈부신 영광을 지속적으로 바라보며, 우리의 매일의 사소한 생각과 거친 습관, 그리고 모든 인간관계가 성령의 뜨거운 불길 앞에서 새롭게 빚어져 가는 거룩한 순례의 여정입니다.

이 놀라운 영적 변화의 유일하고도 확실한 근원은 인간의 탁월한 자격이나 썩어질 의지력에 결코 있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감당할 충분함과 능력이 오직 자기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뼛속 깊이 확신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에서 믿음의 성숙이란 세상 사람들 앞에서 나를 더 크고 대단해 보이게 만들 종교적 증거들을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가 나의 못난 자아를 계속해서 깎아내리고 부수어 더 깊은 은혜의 바다로 이끌어 가도록 내 마음판을 기꺼이 그분 앞에 벌리고 내어 드리는 거룩한 항복입니다.

참된 영적 자유란 이 세상에서 그 어떤 것에도 매이지 않고 제멋대로 살아가는 방종한 상태가 아니라, 오직 성령의 거룩한 감동 안에서 하나님을 향해 기꺼이 내 영혼을 움직일 수 있게 된 가장 충만한 생명의 상태입니다.

영광에서 영광으로, 세상의 바다 속에서 읽히는 한 통의 살아 있는 복음

우리 마음판에 새겨진 새 언약의 은혜는 결코 마음의 방안에 갇혀 묵혀두는 비밀스러운 지식이 될 수 없습니다.

복음의 능력으로 완전히 새로워진 거룩한 정체성은 필연적으로 교회 공동체의 아름다운 연합과 성숙으로 이어지며, 척박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과 절대적인 진리를 온 세상에 드러내는 막중한 사명으로 확장됩니다.

성도는 단지 입술로만 복음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소극적인 사람을 넘어, 자신의 온 삶으로 복음을 생생하게 살아 내야 하는 영적 대사로 부름받았습니다.

우리가 가정을 돌보고,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교제하며, 치열한 일터와 평범한 일상의 수많은 관계 속에서 마주하는 우리의 모든 선택과 말 한마디는, 세상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서 읽을 수 있는 살아 있는 언어로 번역됩니다.

한 사람이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편지’가 된다는 것은 내가 세상 앞에서 흠 하나 없는 완전한 도덕적 완벽주의를 과시한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나의 모든 충분함과 의로움이 오직 주님께 있음을 겸손히 인정하고, 매 순간 하나님의 은혜가 내 삐뚤어진 삶을 계속해서 고쳐나가도록 온전히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 거룩한 변화는 혼자만의 방 안에서 누리는 내면적 위안이나 이기적인 평안으로 끝나지 않고, 서로의 약점을 덮어주며 세워주는 따뜻한 공동체와 어두운 세상 속에서 책임을 다하는 실천적 사랑으로 찬란하게 열매를 맺습니다.

복음의 진실성은 결국 그 복음을 품은 사람이 세상 속에서 어떻게 인격이 달라지고, 그들이 모인 공동체가 어떤 생명의 열매를 맺는가를 통해 세상 사람들에 의해 정직하게 읽히게 됩니다.

장재형 목사의 깊은 설교는 그리스도의 편지로 이 땅을 살아간다는 것이 단순히 개인적이고 밀실적인 경건의 차원에만 머무르지 않고, 온 세상을 향해 뻗어 나가는 복음의 거대한 사명임을 우리에게 강력하게 일깨워 줍니다.

한 사람의 진실한 내적 변화는 반드시 이웃을 품고 세워주는 희생적인 사랑으로 나타나야 하며, 교회가 연합하여 함께 맺는 열매는 이 세상에 새 언약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강력하게 증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거저 받은 은혜는 오직 나 혼자만의 영적 위로와 안식을 위해 멈춰 서지 않고, 잃어버린 영혼들을 향해 복음의 자유와 생명의 소식을 힘차게 전하며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치열한 삶의 현장으로 우리를 이끌어 갑니다.

이 축복의 자리에서 비로소 성도의 삶은 자기의 이름을 드높이기 위해 발버둥 치는 헛된 추천서가 아니라, 상한 영혼들을 살리기 위해 하늘 아버지가 보내신 가장 뜨겁고 다정한 그리스도의 사랑의 편지로 온전히 탈바꿈하게 됩니다.

결국 고린도후서 3장이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근본적이고 날카로운 질문은, 우리가 머릿속에 얼마나 많은 기독교적 문장과 신학적 지식을 담고 있는가 하는 지적 능력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의 거룩한 손길이 우리의 마음판에 직접 쓰신 십자가의 복음이, 오늘 우리의 일상의 말버릇과 사소한 판단, 차가운 사랑과 억지스런 순종 속에서 과연 얼마나 선명하게 읽히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과거의 낡은 돌비에 새겨진 무거운 글자들만을 바라보는 메마른 신앙에 머물지 않고, 날마다 부어지는 복음의 은혜의 바다에 나 자신을 온전히 내어 맡길 때, 우리의 평범하고 지루한 하루하루는 하나님이 이 세상의 황폐한 곳으로 보내시는 눈부신 한 통의 편지가 됩니다.

지금 이 순간 나의 삶을 정직하게 읽어 내려가는 세상 사람들은 과연 그 안에서 숨 막히는 정죄와 율법의 무거운 무게를 발견하게 될까요, 아니면 죄인된 우리를 영원히 살리고 참된 자유를 주시는 눈물겨운 그리스도의 복음을 만나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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