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을 헐라 – 장재형목사

1. ‘성전을 헐라’라는 도전과 십자가의 정신

예수께서 공생애 동안 보여 주신 많은 사역 중 하나는 예루살렘 성전 정화 사건입니다. 요한복음 2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올라가셨고, 성전 뜰 안에서 제물(소, 양, 비둘기)과 관련된 장사를 하는 이들을 쫓아내고 상을 뒤엎으셨습니다. 이것은 당시 종교 권력자들이 지닌 악습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상징적 행동이었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제사를 드리기 위해 소나 양, 혹은 비둘기를 준비해야 했고, 이를 위한 돈 바꾸는 장사치들도 성전 뜰에서 영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가난한 자들에게조차 엄청난 고가에 제물을 팔고, 성전 밖에서 구해 온 제물은 흠을 찾아 들어오지 못하게 만들던 방식은 종교 기득권이 하나님의 성전을 돈과 권력으로 오염시키고 있음을 극명하게 드러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당시 대제사장 가문, 특히 안나스 가문의 문제점이 노골적으로 폭로됩니다. 대제사장직을 세습하고, 로마 제국과 결탁하며 스스로 이익을 챙기던 안나스 가문은 ‘성전 장사’를 이용해 백성의 신앙심을 거래 대상으로 삼았고, 그 수익과 권력을 이용해 종교적·정치적 기반을 더욱 공고히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요2:16)고 선언하셨고, 이때 제자들은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시 69:9)라는 구약의 예언을 떠올리며, 메시아가 불의한 종교 시스템을 그대로 두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체험했습니다.

장재형(장다윗) 목사는 이 장면에서 두 가지 핵심을 강조합니다. 첫째, 예수님의 성전 정화는 단순히 ‘성전 안에서의 장사 행위’만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그 배후에 있는 인간의 죄성, 즉 기득권과 돈과 권력에 대한 탐욕이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간을 더럽힐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사건이라는 점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당시 유대인 신앙 체계의 중심이었고, 그 자체가 신성 불가침의 영역처럼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이뤄지던 부정과 거짓, 사람을 수탈하는 제사 시스템은 결코 하나님의 뜻과 어울릴 수 없었고, 예수님은 아버지의 이름이 욕되게 되는 현장을 결코 방치하지 않으셨습니다.

둘째,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라고 하심으로써, 곧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새로운 성전’이 세워질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말씀을 곧바로 이해하지 못했고, “이 성전은 46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요 2:20)라며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신 ‘성전’은 ‘자신의 몸’을 가리킨 것이었습니다. 즉, 더 이상 눈에 보이는 건물로서의 성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구원과 예배의 중심이자, 부활의 몸을 통해 새로워진 ‘영적 성전’의 기초가 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파격적인 메시지, 즉 예수 그리스도가 스스로를 ‘진정한 성전’으로 선포하셨다는 말은 당시 종교 권력층에게 큰 위협이 되었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예루살렘 성전은 모든 신앙생활과 율법 준수의 상징이었고, 우주의 중심이라 여겨졌습니다. 누가 그 성전을 헐어버린다 하거나, 성전보다 더 큰 권위를 가진 존재가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극단적인 신성 모독으로 간주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안나스, 가야바를 비롯한 대제사장 집단은 이 예수의 선언과 행보를 매우 위험하게 느꼈고, 실제로 예수님이 체포되며 십자가의 길을 걷게 된 데에는 이러한 성전 파괴 선언이 주요한 ‘죄목’으로 작용했습니다.

장재형 (장다윗)목사는 이 지점에서, 우리 내면에도 ‘헐어버려야 할 성전’이 있음을 통찰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중심성을 가지고 있고, 그 자기중심성을 자신만의 ‘성전’처럼 여겨 무너지지 않으려 하며, 그 성전 안에서 자신의 이익과 욕심, 고집, 체면을 지키려 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특별히 십자가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도전은 “네 안에 있는 그 거짓된 성전을 헐라”는 말씀일 수밖에 없습니다. 헐어지지 않는 자기중심성, 자신만의 절대 영역이라 우기는 것들, 이것이 곧 죄의 뿌리이며 모든 분쟁과 불화의 시작점이 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8장을 보면, 예수님이 실제로 체포되시고, 대제사장 안나스에게로 끌려가심으로써, 성전 정화 사건 때부터 시작된 종교 권력층과의 충돌이 극단으로 치닫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물으니”(요 18:19)라는 구절은, 그들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추종자들’을 어떻게든 죄로 몰아넣으려는 저의를 엿보게 합니다. 안나스가 먼저 예수님을 신문한 이유는, 예수님이야말로 성전을 헐라 하고(자신을 진정한 성전이라고 선언한 것과 동등하게 여겨진 말), 자신들의 기득권 체계를 위협하는 가장 큰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대제사장 집단에 의해 ‘공개 재판’이 아닌 밤중의 음모적인 절차를 거쳐 고발당하고 결국 십자가에 내어주신 사건은, 거짓 권력과 타락한 종교가 어떻게 참 진리를 배척하는지 여실히 드러냅니다. 그리고 그 저변에는 자신들의 권력 기반인 ‘눈에 보이는 성전’과 그를 둘러싼 모든 세속적 이권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태도가 있었습니다. 복음서 곳곳에서 예수님이 기존 종교 체제와 맞부딪히는 장면을 보면, 모든 갈등의 핵심은 예수님의 메시지와 기득권 종교 지도자들의 탐욕이 충돌한다는 점입니다.

장재형 목사가 강조하듯, 교회라는 이름, 혹은 어느 개인의 신앙의 울타리 안에서도 동일한 문제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곧 교회가 본연의 영적 역할을 상실하고 세속적 욕망이나 권력을 지향한다면, 예루살렘 성전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든 자들과 다를 바 없게 됩니다. 또, 개개인도 교회를 다니면서 마음 깊숙이 여전히 자신의 작은 성전을 지키기 위해 복음에 저항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전을 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신앙인이라면 누구에게나 강력하게 들려야 하며, 내 안에 세워진 모든 이기적 성전을 해체함으로써 비로소 ‘부활의 성전’이 일어설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바로 이 점에서 십자가의 정신이 두드러집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내가 생명을 버리는 것은 다시 그것을 얻기 위함”이라고 하셨고(요 10:17), 자기 몸을 헐어, 사흘 만에 새로운 삶을 일으키겠다는 약속을 실천해 보이셨습니다. 이는 말뿐이 아니라 실제 십자가의 길을 통해 확증되었습니다. 기독교의 핵심 교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인데, 이것이 곧 예수님의 ‘성전 파괴와 재건’이라는 상징적 행동과 깊이 연결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성전을 헐라”는 말씀이 결코 폭력적 파괴나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오래된 것의 죽음과 새로운 것의 탄생’을 가리키는 복음의 핵심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8장에 등장하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 사건도, 율법과 복음이 충돌하고, 또다시 예수님이 거짓 종교 권력 앞에서 위협받는 장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대로라면 돌로 쳐 죽여야 할 이 여인을 예수님은 결국 용서하시고, “너희 중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고 선언하심으로써, 율법보다 크신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의 법을 선포하셨습니다. 이 역시 기존 종교 체계 입장에서는 파격적인 ‘율법 파괴’처럼 비쳤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체포되신 후, 스데반도 같은 맥락에서 잡혀 돌에 맞아 죽었는데, 스데반에게 씌워진 죄목 중 하나가 곧 “이 사람이 성전을 헐겠다고 했고, 또 모세의 율법을 고치려 한다”고 한 것입니다(행 6:13-14).

결국 ‘성전을 헐라’는 예수님의 메시지는 외형적 제도나 율법에 매어 있는 신앙이 아닌, 영적 실체이신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사귐으로 나아가라는 선언이며, 그 중심에는 자기 부정과 헌신, 그리고 죄인을 향한 무한한 용서가 놓여 있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가리켜, “내 안의 이기적 성전을 무너뜨리고, 그 자리에 주님의 십자가 정신을 세움으로써 진정한 교회와 성령의 역사가 시작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복음서 전체, 특히 요한복음이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핵심 사역, 즉‘화목과 구원’을 향한 길이라고 역설합니다.

다시 요한복음 2장으로 돌아가 보면, 예수님은 이미 부활 이후를 예견하시며 “사흘 만에 이 성전을 세우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도 실제 부활 사건을 체험하고 나서야 이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깨달았습니다(요 2:22).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없이는 부활도 없고, 옛 것을 철저히 헐지 않으면 새 것이 일어날 수 없다는 복음적 진리가, 바로 성전 파괴 선언 속에 압축적으로 담긴 셈입니다. 이는 오늘날 교회와 신자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며, 자신만의 ‘우주의 중심’처럼 여기던 것을 과감히 내려놓으라는 부름이기도 합니다.

장재형 목사가 목회 활동에서 강조하는 바는, 기독교 신앙이 결코 안전지대 안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늘 우리를 도전하고 뒤흔들며 ‘거짓된 종교심’과 싸우도록 이끈다는 것입니다. “성전을 헐라”는 메시지는 그저 교리적 문구가 아니라, 각자가 지닌 고집스런 성벽, 정죄적 시선, 자기영광을 구하는 탐욕 등 모든 것을 내려놓으라는 초청입니다. 이 초청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예수님 시대의 종교 권력자들과 같이 불순한 것에 안주한 채 참된 복음을 배척할 수도 있다는 경고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이 부르심에 순복하여 자신을 낮추고 자기를 부정할 때, 비로소 십자가의 영광과 부활의 영광을 함께 체험할 수 있다고 장재형목사는 거듭 가르칩니다.

종교 권력과의 충돌이 극에 달했던 십자가 사건을 면밀히 살펴보면, 예수님의 오심은 낡은 율법주의와 타락한 구조를 깨뜨리는 혁명적 행위였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성전을 헐라”는 구절은 그 혁명의 중심 사상, 곧 십자가의 희생정신을 통찰하게 하는 열쇠로 작용합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대목에서, 신앙인이 진정 성숙해지려면 바로 이 ‘성전 파괴와 재건’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율법의 문자적 준수나 교회 안에서의 의식, 제도적 틀을 지키는 것으로는 한계가 있으며, 결국 자신의 옛 자아를 완전히 깨뜨리고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참된 ‘영적 성전’이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이러한 십자가의 정신이 없다면 교회는 결국 구약 시대 제사장들과 동일하게 권력과 돈의 매개체로 전락하기 쉽습니다. 성전 정화가 필요했던 예루살렘처럼, 현대 교회도 안팎으로 ‘정화’가 끊임없이 요구됩니다. 이것이 “성전을 헐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가 지금도 되새겨야 하는 이유입니다. 무너뜨릴 것들을 향해 눈을 감고 덮어두는 것은 결코 복음이 요청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와 개인이 신앙고백 속에서 스스로를 성찰하고, 타락하거나 변질된 요소들을 발견하면 아낌없이 내던지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성령이 임재하시는 새로운 교회의 모습, 곧 ‘주님의 몸된 성전’이 가시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결론적으로, 장재형 목사는 “성전을 헐라”라는 본문을 해설하며, 이것이 곧 ‘내가 죽고 주님이 사는 길’이자 ‘오래된 율법적 틀을 넘어서는 복음적 자유’로 가는 시작점임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이 메시지를 온전히 받아들인 사람은 자발적으로 자신을 비우고, 이웃과 교회를 섬기게 됩니다. 십자가 정신이 구체적으로 실천되는 곳에는 어떤 담도, 분쟁도, 차별도 설 자리가 없습니다. 그 거룩한 길이 바로 예수님이 여신 ‘성전 파괴와 재건’의 길이요, 우리 모두가 거쳐야 할 십자가의 길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소주제 2: 화평의 길과 성령의 시대, 그리고 참된 교회의 본질

‘성전을 헐라’는 선언이 단순히 과거 유대교 체제에 대한 물리적 파괴가 아니라,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영적 선포였다는 점은 사도행전의 전개와도 맞물려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후, 제자들은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해 복음이 얼마나 확장성과 보편성을 가지는지 체험하게 됩니다. 특히 사도행전 2장을 보면, 120명의 제자가 모인 곳에 성령이 임함으로써 모두가 하나님을 찬양하며 각 나라 말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은혜로운 사건을 통해 과거처럼 특정 계층이나 제도권 지도자들만이 하나님의 임재를 맛보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성령을 받는 시대가 열렸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같은 성령의 역사에서 ‘성전을 허무신 예수님의 의도’를 더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고 봅니다. 과거에는 예루살렘 성전이 신앙생활의 절대적 중심이었으나, 이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직접 우리의 ‘거룩한 예배의 대상’이 되시고, 그를 통해 임하는 성령이 새 시대의 예배 처소가 된 것입니다. 더 나아가, 사도들은 “너희가 성전인 것”이라고 선언함으로써(고전 3:16, 6:19 등), 이제 공동체 안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며, 그리스도인 개개인이 ‘살아 있는 성전’이자 동시에 ‘연합된 몸’임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성전’이 세워지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옛 성전’이 허물어져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당시, 성전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다는 보도(마 27:51)는 상징적으로, 더 이상 구약의 제도적 성전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매개가 아님을 보여줍니다. 이제 누구나 그리스도를 통해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더 이상 대제사장이나 특정 의식에 구속되지 않는 자유가 선포되었습니다. 이것은 구원 역사의 획기적인 변화였고, 동시에 옛 종교 권력 체제에겐 치명적인 타격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성전을 헐라”는 예수님의 발언이 단지 건물을 없애자거나, 과격한 반체제 운동을 일으키자는 의미가 아니라, ‘성령의 시대’가 도래하는 전환점을 미리 알리는 선언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셨다”(엡 2:14)라고 요약합니다. 이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이 사라지고,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하나가 된다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 뜰에서도 이방인들이 들어올 수 있는 지역을 제한적으로만 허용했는데, 그 벽을 넘으면 사형에 처할 수도 있을 정도로 엄격한 분리 정책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는 그러한 차별의 담이 무너지고, ‘새 사람’(엡2:15)으로 지음을 받아 모두가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습니다(엡 2:19).

장재형 목사는 이 에베소서의 가르침을 교회 공동체에 직접 적용하며, “참된 교회는 차별이 존재할 수 없는 곳”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단순히 조직 차원에서 평등을 표방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로 인해 ‘나의 옛 자아가 완전히 무너지고, 오직 예수 안에 새롭게 태어났음’을 실제 삶으로 증명하는 공동체라는 뜻입니다. 교회 안에 여전히 차별이나 담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아직 헐려야 할 ‘옛 성전’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성전을 헐라”는 말씀은 개인과 공동체가 자신 안에 존재하는 배타적 경계, 미움, 불의한 특권 등을 발견하고, 십자가 앞에서 철저히 회개하며 그 담을 허무는 삶으로 초대합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복음은 세리, 창녀, 이방인, 여인, 소외된 자들을 품어 주셨고, 그들을 오히려 하늘나라에서 높여 세우셨다는 점을 곳곳에서 보여 줍니다(막 2:15-17 등). 이것은 옛 율법적 사고에 물들어 있던 유대인에게 혁명적인 메시지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소와 양, 비둘기 파는 장사치들은 ‘유월절 제물 준비’라는 제도적 필요를 악용해 가난한 자들까지 착취했지만, 예수님은 세리를 비롯해 죄인 취급받는 이들을 식탁 교제에 초대하셨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이러한 예수님의 선교 방식과 정신을 이어받아, 모든 사람을 예배 공동체로 불러 모으는 ‘열린 성전’이 되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교회는 역사를 거쳐 오며 때로 성직 계급과 권력이 결탁해서, 초대교회 정신과 멀어진 모습도 보였습니다. 종교개혁 시기에도 마르틴 루터나 츠빙글리, 칼뱅 등이 소위 ‘타락한 성전을 허물고 복음의 순수성을 회복하자’고 외치며 새로운 흐름을 만든 것은, 예수님의 “성전을 헐라”는 말씀을 시대적으로 재해석한 사건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장재형 목사 역시 현대 교회가 위기에 처했을 때, 이 말씀을 다시금 소환해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고, 성령의 인도하심 아래서 옛 구조를 허무는 개혁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특히 교회가 세상의 ‘화평’과 ‘화해’를 이루는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먼저 내부적으로 하나 됨을 이뤄야 하고, 그리스도의 핏값으로 산 공동체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육체를 ‘성전’으로 칭하시며 그 성전을 헐고 사흘 만에 일으키시겠다고 하셨는데, 이는 곧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완성되는 구속 사건을 예표합니다. 이 구속 사건의 결과로 나타난 가장 특징적인 현상 중 하나가 바로 “성령 강림으로 모든 이들이 하나님 앞에 동등하게 서게 됐다”는 사실입니다. 남종이나 여종이나, 늙은이나 젊은이나,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행 2:17-18), 차별이 철폐된 성령의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교회가 이러한 성령의 시대 정신을 이어받아 ‘성전 파괴와 재건’의 메시지를 자기 자신에게도 적용하지 않는다면, 곧 스스로를 돌아보고 회개하지 않는다면, 과거 안나스와 가야바의 길을 뒤따를 위험이 있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교회가 십자가의 복음을 제일선에 두지 않고, 교권 다툼이나 재정 문제로 인해 서로를 헐뜯는다면, 이미 거짓된 성전에 잡혀 있는 것”이라 직설적으로 말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성령의 능력이 나타날 수 없고,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비난만 받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성전을 헐라”는 말씀은 단지 2,000년 전 유대교 체제에 대한 선언이 아니라, 지금 우리 교회가 현실 속에서 부딪히는 모든 불의·교만·분열을 내려놓으라는 시급한 명령이기도 합니다.

한편, 장재형 목사는 개인의 내면에 대해서도 같은 논리를 적용합니다. ‘성전을 헐라’는 것은 공동체적 차원의 교회 개혁에만 국한되지 않고, 각 신자가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욥기에 “하나님을 대면한 자는 스스로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한다”(욥 42:6)는 대목이 나오듯,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성과 한계를 온전히 인정해야만 주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간은 ‘자기만의 성전’을 지키려 하고, 그 안에서 안정감을 찾고자 하는 본성을 지닙니다. 장재형목사는 그 성전을 허무는 것이 곧 ‘온전한 회개와 성령의 내주’를 위한 필수 과정이라 하며, 이를 십자가의 삶, 곧 ‘자기 부정과 자발적 희생’이라는 키워드로 연결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갈 2:20)는 바울의 고백은 ‘성전을 허무는 것’을 아주 극단적으로 표현한 신앙 고백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바리새인으로서 율법의 의를 따라 흠 없이 살던 자였지만(빌 3:4-6),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는 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예수와 함께 죽어 새로운 피조물로 살겠다고 선언합니다(빌 3:7-8). 이것이 곧 예수님이 주신 “성전을 헐라”는 복음의 실천이며, 부활 신앙의 실제적 적용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참된 교회란 이러한 바울의 자세를 본받아, 과거에 자랑하거나 의존하던 것을 모두 주님 앞에 내려놓고, 오직 주님의 생명으로 일어서는 곳입니다.

현대 사회는 분열과 갈등, 배제와 폭력이 만연하지만, 동시에 ‘함께 잘 사는’ 길을 고민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이 이 땅에 제시하는 해답은 “원수까지 사랑하고, 서로 발을 씻어 주며, 필요하면 내 것을 내려놓아서 이웃을 살려라”라는 급진적 사랑과 희생입니다. 그 근본은 십자가 정신이며, “성전을 헐라”는 비움과 자기를 내려놓는 태도가 필수적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런 점에서 기독교 신앙의 독특성을 강조합니다. 세상의 이념, 철학도 나름의 이상을 설파하지만, ‘성전을 스스로 허무시는 하나님’이라는 복음만큼 급진적인 메시지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고, 그분이 죽으심으로 새 생명이 열렸다는 사건 자체가 믿을 수 없을 만큼 파격적이기에, 이것을 진심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삶의 방식이 근본적으로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그는 가르칩니다.

교회 안의 예배도 마찬가지로, ‘성전을 허무는 정신’이 담기지 않으면 결국 형식적이고 추상적 의식에 그치고 맙니다. 예배는 주님 앞에 자신을 내려놓고, 서로가 서로를 섬기며, 죄인까지도 환대하는 자리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성령은 공동체 안에 역사하시고, 교회의 지체들은 “너희 몸이 성령이 거하시는 전인 줄 알지 못하느냐”(고전 6:19)는 말씀을 체험하게 됩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영적 원리를 한국 교회, 더 나아가 전 세계 기독교 공동체가 다시 한번 붙들어야 한다고 촉구합니다. 왜냐하면 시대가 빠르게 변하더라도, 복음이 지닌 “낮아짐과 헐어짐의 능력”은 결코 바뀌지 않고, 오히려 점점 더 절실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문화권에서 복음이 전파될 때 나타나는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전을 허무는 행위, 즉 자기가 세워 놓은 최고의 권위나 전통을 포기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순절의 성령 강림 이후로, 복음은 언어·문화·인종·신분의 벽을 넘어 전파되었습니다. 세계 각지에서 신앙을 갖게 된 사람들은 각자의 ‘작은 성전’을 무너뜨리고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는 길을 경험해 왔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더 이상 ‘누가 유대인이고, 누가 이방인인가’를 묻지 않으며, 함께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는 표징을 간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의 “성전을 헐라”라는 선언이 결국 인류 보편적 구원의 길로 이어지는 핵심 이유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목회 현장에서, 그리고 다양한 선교적 활동을 통해 “교회가 곧 예수님의 성전”임을 가르치면서, 그 교회가 세속적 권력이나 물질적 유혹에 빠지면 안 된다는 점을 거듭 강조해 왔습니다. 예수님 당대의 예루살렘 성전이 성전세와 희생 제물을 매개로 백성을 착취하던 것처럼, 현대 교회도 교회 재정을 마치 사적 이익처럼 운용하거나, 교권을 이용해 신도들을 지배하려는 모습을 보일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그리고 그런 상황이 반복될수록 “성전을 헐라”는 예수님의 음성은 더욱 절실히 들려야 합니다. 그 음성에 순종하여 교회가 회개와 자정을 실천할 때, 비로소 세상은 교회를 향한 신뢰를 회복하고, 복음의 참된 빛이 드러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성전을 헐라”는 말씀을 단지 과거사로만 치부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이 주신 이 도전적 선언은 2,000년 교회사의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개혁과 부흥을 촉발해 온 근본 원리였습니다. 아울러 개인적으로도, 신앙이 깊어질수록 우리는 더 철저히 자신을 내려놓아야만 하며, ‘내가 지키고 싶은 욕망의 성전’을 주님의 손에 맡겨 허물어뜨리도록 내어드려야 합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참된 자유와 기쁨, 그리고 공동체의 연합이 열매 맺는 것을 볼 수 있게 됩니다.

결국, 요한복음 18장에서 예수님이 체포되시고, 그 종교재판 과정에서 “네가 어떤 죄를 지었는지 밝히라”는 식으로 압박받았던 상황은, 예수님의 메시지가 얼마나 종교 권력자들에게 위협적이었는지 단적으로 보여 주는 예입니다. 그 핵심은 단순한 교리 논쟁이 아니었습니다. “성전을 헐라”는 말씀은 곧 대제사장과 같은 기득권에게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자신들의 기반을 뒤흔드는 혁신적 가르침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굴하지 않았고, 십자가에서 실제로 몸을 찢기심으로써 그 말씀을 완수하셨습니다. 그리고 사흘 뒤에 부활하심으로,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새 성전의 시대’를 열어젖히셨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같은 복음의 결론부가 “우리 역시 성전을 허물어야만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을 누릴 수 있다”는 교훈을 절대 잊지 말라는 초대라고 해석합니다. 자기를 부정하고, 옛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을 때만이, 부활의 기쁨이 실제로 내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 내에서의 분란, 가정과 사회 안에서의 불화도 사실 근본을 들여다보면, “자신의 성전”을 포기하지 못하기에 발생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화평의 길”(엡 2:14)로 초대하시며, 당신의 몸으로 모든 담을 허물어 주셨습니다. “성전을 헐라”는 도전 뒤에는 곧 “내가 다시 세우리라”는 약속이 따라오고, 그 약속은 결코 우리를 파멸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풍성한 생명으로 이끄는 하나님의 구원 경륜입니다.

예수님께 돌로 치려 했던 이들이, 또 예루살렘 성전을 절대적이라 믿었던 이들이 결국 그 찬란한 부활의 의미를 처음에는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성령 강림 이후, 제자들은 담대히 이 소식을 전파했고, 스데반조차 같은 이유로 죽임을 당했으나, 그 피가 오히려 복음 전파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성전을 헐라”는 복음적 도전은 때로 우리를 박해받게 만들 수 있고, 세상이나 기득권 종교층으로부터 공격을 당할 수도 있지만, 그 길 끝에는 승리의 부활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교회가 이 사실을 잊지 않는다면, 어떠한 도전과 비난에도 불구하고 참 교회의 본질을 지켜 갈 수 있습니다.

정리하자면, ‘성전을 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사랑과 화평, 구원과 희생이 만나는 십자가 신앙의 정수입니다. 그분은 “내가 버리면, 내가 헐리면, 새 것이 일어난다”고 하셨고, 그것을 스스로 실천하셨습니다. 이제 그 길을 따르는 교회와 신자라면, 마땅히 “주님의 집을 위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시 69:9)는 고백을 공유해야 합니다. 다만 그 ‘주의 집’은 결코 외적 건물이나 제도만을 의미하지 않으며, “너희가 곧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영적 실체로 나타납니다. 이 내면의 성전은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 그리고 성령의 임재로만 세워지며, 이를 통해 차별과 담이 허물어진 공동체가 탄생할 수 있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런 점을 “복음의 혁명성”이라 부릅니다. 옛 틀과 죄성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복음의 새로움을 맛보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반드시 헐고 다시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죄인들에게 베푸신 ‘용서의 도식’이자, 스스로 낮아지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초대하시는 “화평의 길”입니다. 궁극적으로, 이 길이야말로 신앙인 개인과 공동체가 진정한 교회됨을 완성해 가는 과정이자, 성령이 활짝 열어 놓으신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는 좁은 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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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육신과 십자가 – 장재형목사

1. 약속으로 주어진 복음과 성육신의 신비

장재형(장다윗)목사가 강의한 로마서 1장 2~7절을 묵상하며, 우리는 먼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복음이 왜 우리 가운데 ‘약속의 성취’로 나타난 것인지를 깊이 살펴볼 수 있다. 장재형 목사는 이 말씀을 통해, 복음이 결코 인간의 이론이나 사상, 혹은 어느 개인의 사설이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의 약속에서 비롯된 것임을 강조한다. 곧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롬 1:2)라는 말씀 안에는, 하나님이 인류 역사 속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이 복음이 선포될 것을 계획하셨다는 놀라운 섭리가 담겨 있다.

우리는 복음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낯선 가르침이 아니라, 구약시대를 통틀어 계속해서 예언되어 온 “그리스도”라는 분에 대한 구체적인 약속임을 기억해야 한다. 이때 바울이 말하는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으로 오셨다’는 선언으로 정리된다. 바울은 로마서 1장 3절에서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라고 증언하며, 예수 그리스도가 정말로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셨음을 선포한다. 성경의 예언은 모두 이 사실을 향하고 있었다.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선지자들과 예언자들을 통해 당신의 섭리를 때마다 드러내셨고, 그 최종적 완성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Incarnation)’으로 나타난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여기서 ‘기독교는 죄인의 종교’라는 사실을 다시금 부각시킨다. 예수님이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찾아오셨다는 복음서의 선포가, 바로 이 성육신 사건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죄인들의 삶 한가운데 거하셨다.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다”는 구절은 그저 예수께서 다윗 왕조의 후손이라는 역사적·계보적 사실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이 진짜 인간으로 세상에 들어오셨음을 알리는 상징적 표현이다.

이 성육신 사건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가장 큰 특징이자 역설이다. 바울은 빌립보서 2장 6~8절에서 이를 ‘케노시스(Kenosis)’, 곧 자기를 비우심이라 표현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본래 하나님과 동등되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음을 강력하게 선언한다. 참 하나님이신 그분이 동시에 참 인간이 되셨다는(“참 하나님과 참 인간”, Vere Deus & Vere Homo) 이 놀라운 진리는, 그리스도인이 믿는 ‘복음’의 결정적 근거다.

바울은 로마서 1장 3~4절에서 바로 이 케노시스와 성육신, 그리고 그 결과로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짧지만 강력하게 요약해 놓았다. 예수님이 인간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셨고, 성결의 영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이것이 곧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신 예수 그리스도’이다(롬 1:4, 개역한글에는 “선포되셨으니”를 “인정되셨으니”라 표현). 사람이 보기에는 죄인의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았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죽음을 이기는 자’로 인정하셨다는 뜻이 여기에 담겨 있다.

복음은 곧 이 역사적·실존적 사건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인이 전하는 메시지는 “죄인을 살리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이지, 인간의 도덕적 교훈이나 추상적 철학이 아니다. 바울 시대의 헬라 철학자들은 ‘진리(로고스)’를 찾기 위해 평생을 투자했지만, 결국 ‘사람의 힘’만으로는 그 로고스에 이를 수 없었다. 그러나 요한복음 1장은 선언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요 1:14). 곧 모든 철학자와 현자들이 그토록 갈구했던 진리가, 실제로 사람이 되어 이 땅에 거하셨다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이를 가리켜 “다윗의 혈통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르며, 동시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다”고 말함으로써, 예수님이 역사 속에서 진정한 인간이 되셨고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임을 분명히 증거한다.

장재형 목사는 우리가 이 복음 앞에 서게 될 때, 우리의 지성과 이성을 넘어선 “은혜”가 임한다고 가르친다. 이는 곧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Unconditional Love)과 전적인 선물(Surprising Gift)이다. 복음을 모르고 살던 죄인이 이 메시지를 듣고 나를 위해 낮아지신 그리스도의 사랑에 눈물 흘릴 때, 그게 바로 은혜다. 바울이 경험한 것도 이것이다. 과거 그는 ‘교회를 박해하고, 그리스도인을 잔인하게 핍박하던 죄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찾아온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완전히 거꾸러졌다. 그가 곧장 복음의 사도가 되어, 가장 극렬하게 복음을 외치고, 교회를 세우며, 자신의 모든 생애를 이 ‘약속의 복음’을 전하는 데 바친 것이다.

결국 복음은 ‘구원의 메시지’이자 ‘역사의 완성’이다. 하나님이 보내주신 약속의 아들, 예수님이 인간으로 오셨고, 그분이 십자가와 부활로 죄와 죽음을 깨뜨려버리셨다. 이 사실이 이미 선지자들을 통해 약속되었고, 실제로 우리 눈앞에 드러났다. 이것이 복음이며, 그렇기에 복음이 우리 삶을 뒤바꾼다. 또한,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벧전 3:15)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이 복음에 관해 묻는 세상에 대답할 것을 준비해야 한다. 그 대답이 곧 ‘간증’이며, ‘내가 들은 복음, 내가 만난 그리스도’를 그대로 전하는 것이다.

바울이 “내가 십자가와 부활밖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우리의 선교와 전도는 내 생각, 내 지식을 뽐내는 장이 아니다. 오직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그 십자가의 사랑’과 ‘나를 새 생명으로 불러 일으키신 부활의 권능’을 증언하는 것이다. 복음에 대해 누군가 묻거든, 우리는 그리스도가 어떻게 내 삶에 들어오셨는지, 어떻게 나를 변화시키셨는지, 그리고 어떻게 나로 하여금 영원한 소망을 품게 하셨는지 증거하면 된다. 바울 역시 자신의 편지를 시작할 때, “나는 복음을 위해 부름받은 사람”이라는 고백으로 서문을 열고, 그 복음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복음 안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증언했다.

결국 ‘복음’은 세상과 대적하는 신비한 이론이나 우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오래전부터 예언해 왔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실제적 사건이다. 또 복음은 한없이 거룩하신 하나님이 죄인인 우리를 직접 찾아오셔서 구원하시려는 ‘사랑의 이야기’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 성육신의 사랑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우리 안에 들어오셨다”는 것이야말로 기독교의 핵심이라고 강조한다. 그분이 들어오셨기에, 우리가 죄의 사슬에서 풀려나고, 새로운 소망과 생명을 얻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이 복음이 주어졌을 때, 우리의 태도는 자연스레 “믿고 순종함”으로 이어져야 한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한다”(롬 1:5)는 구절의 의미다. 곧 과거에는 전혀 구원의 언약 밖에 있었던 자들이, 이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복음을 듣고, 그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복음 안에서 “믿어 순종”하게 된 그들은, 과거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죄의 습관에 사로잡혀 살았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죄사함을 받고, 부활로 주어진 생명의 능력에 힘입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

바울이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롬 1:7)라고 호칭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복음의 능력 때문이다. 로마 제국이라는 거대한 문명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지배 이념이나 다신교적(多神敎的) 풍조와 충돌했지만, 오히려 복음의 가치를 붙들고 담대히 복음을 전했다. 그 결과로, 인간적 눈으로 보면 보잘것없는 소수 집단에 불과했던 교회 공동체가 역사를 움직여 왔다. 바울이 로마서 전체에서 복음의 위력과 의의, 그리고 그 복음에 의해 변화된 삶을 반복하여 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성육신은 “말씀이신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엄청난 신비이며, 동시에 우리에게는 “절망을 뚫고 들어온 광명”이다. 완전한 진리이자 영원한 빛이신 하나님이, 죄와 어둠에 사로잡힌 인간 가운데 친히 들어오셨다는 것은, 그 자체로 소망의 선언이다. 자칫 머리로만 그칠 수도 있는 ‘인간의 사상과 철학’을 넘어, 실제로 내가 만나고 체험할 수 있는 ‘인격적 진리’가 되신 것이다. 이것이 성육신의 위대함이다. 여기서부터 복음은 단지 귀에 들려오는 소문이 아니라, 가슴을 파고드는 ‘생명력 있는 메시지’가 된다.

한편, 이 성육신 사건은 우리에게 “거룩한 삶으로의 초대”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예수께서 우리와 동일한 몸을 입으셨다는 것은, 그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한시적으로 인간의 옷을 빌려 입으신 게 아니라, 우리에게도 그리스도를 닮은 거룩한 인격과 삶을 살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음을 의미한다. 바울이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롬 1:7)라고 칭할 때,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가 걸어가신 길을 따르는 자들”이라는 뜻이다. 성경의 인물들을 보면, 그들은 결코 죄가 없거나 완벽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구속사 속에서 그리스도의 은혜를 덧입었고, 예수님이 보여주신 그 낮아짐과 희생, 그리고 부활의 능력을 본받아, 새 생명의 길로 걸어갔다. 이것이 ‘성도’의 본질이다.

결국 소중한 것은, ‘성육신을 통해 역사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지적으로만 알고 있는 수준에서 끝나지 않고, 그분의 자기 비하와 희생을 ‘삶’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장재형 목사가 반복해서 설교에서 강조하는 점도 바로 이것이다. 교회 안에 머무는 사람이라 해도, 예수의 성육신과 십자가, 그리고 부활의 실제적 의미를 삶으로 체화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여전히 ‘머리 지식’에서 머무는 종교적 행위일 뿐이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복음 증언은 이론이 아니라, “내가 예수님을 이렇게 만났다. 내 죄와 죽음이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 안에서 어떻게 해결되었는지 실제로 경험했다.”라는 간증이어야 한다.

우리는 세상에 살며 때로 지치고 절망할 때가 있다. 인간 사회의 불의와 고난, 질병과 죽음은 어느 시대든 존재해 왔다. 그러나‘다윗의 혈통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그분의 성육신 안에서 “하나님이 정말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구나!”라는 사랑의 확증을 얻는다. 그분이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사건 안에서, “끝까지 우리를 붙드시려는 하나님의 거룩한 열정”을 확인하게 된다. 바울이 “은혜와 평강”(롬 1:7)을 언급하며 그 은혜가 바로 이 사랑에서 흘러나온다고 말할 때, 그것은 ‘아무리 내가 연약하고 죄가 많아도, 결코 포기되지 않는 하나님의 의지’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부활을 통해 선명해졌다는 의미다.

성육신에 대한 바른 이해는 곧 “온전한 복음 이해”로 우리를 안내한다. 예수님을 전적으로 하나님으로만 생각하면, 인간의 고통과 유혹을 겪으셨다는 사실을 놓치게 되고, 전적으로 인간으로만 생각하면, 우리가 왜 그분에게 경배해야 하는지, 왜 그분이 영원한 생명의 주관자이신지를 놓치게 된다. 바울은 로마서 1장 3~4절에서 ‘참 인간’이신 예수와 ‘참 하나님’이신 예수를 동시에 보여줌으로써,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그리스도론의 구조를 명확히 잡아 준다. 예수님은 다윗의 혈통으로 오신 참 인간이시며, 죽음에서 부활하사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된 참 하나님이시다. 이 두 축이 흔들리지 않아야, 비로소 복음이 제대로 이해되고 전파될 수 있다.

그러므로 로마서 1장 2~7절에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궁극적 메시지는, 첫째 “약속에 따라 오신 그리스도”이시고, 둘째 “그리스도가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고 오심으로써 죄인인 우리에게 생명의 문을 여셨다”는 사실이다. 이 약속이 성취되는 과정에서, 구약의 예언과 선지자들의 경고와 희망, 그리고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이어져 온 하나님의 섭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위한 준비였음을 우리는 확인한다. 심지어 로마의 길이 닦이는 과정까지도 복음 전파를 위한 준비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으니, 하나님의 계획은 광범위하고 치밀하다. 이 모든 것의 결론은,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오셨다는 점이며, 이것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이제 은혜와 평강이 임한다.

2. 십자가와 부활로 완성된 복음의 능력

바울이 로마서 1장 4절에서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라고 선포할 때, 여기에는 복음의 두 번째 중요한 축이 분명히 드러난다. 곧 “십자가와 부활”이다. 장재형 목사는 설교에서 자주 강조하듯, 복음은 그저 “예수님이 오셨다”라는 사실에서 끝나지 않는다. 예수님의 생애, 특히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사건이 없다면, 복음은 온전치 못하다.

성육신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되셨다”는 선언이고, 십자가는 “그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선언이며, 부활은 “우리를 위해 죽으셨던 그 하나님이 다시 사셨다”는 결정적 증거다. 바울은 그 부활의 사실을 통해, 예수님이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임이 공적으로(능력으로) 인정되었다고 말한다. 인간의 가장 큰 문제인 죄와 사망의 권세가, 예수님의 부활로 완전히 무력화되었기에,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도 헛것이요 우리가 전파하는 도(道)도 헛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한다(고전 15:14 이하). 곧 십자가의 사랑만으로는 아직 완성된 복음이라 할 수 없으며, 반드시 부활을 통해 ‘죄의 삯인 죽음’이 극복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역사 속에서 실제로 죽으셨고, 그 몸이 무덤에 놓였지만, “죽음의 고통에 매여 있을 수 없는” 분이셨다(행2:24).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을 최종적으로 ‘확정’하는 사건이다.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그 십자가와 부활이 “나”를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사랑이 나를 살렸고, 그 부활이 나에게 영원한 소망을 주었다.”는 개인적 체험이 동반될 때, 비로소 복음은 나의 ‘생명’이 된다. 장재형 목사는 이 지점을 ‘자기 고백’이라 부르며, “선교는 자기 변증이며, 자기 증언이며, 자기 간증”이라고 자주 말한다. 즉, 내가 죄인임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 죄를 용서했으며, 예수님의 부활이 나를 새 생명으로 이끌었다는 걸 구체적으로 고백하는 것이 선교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바울 자신이야말로 이 진리를 철저히 경험했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후, 그는 복음을 전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 자신이 경험한 “주님”은, 하늘 높은 곳에서 인간을 굽어보는 신적인 존재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임당한 모습 그대로이셨다. 또한, 그가 간증하는 “주님”은, 무덤에 갇힌 시신이 아니라 죽음을 깨뜨리고 다시 사신 분이셨다. 그렇기에 바울은 로마서 1장 4절에서 예수님을 가리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라고 선언하며,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라는 가장 완전한 이름을 붙인다. 예수님은 우리의 주, 곧 인생의 주인 되시는 분이며, 동시에 구약의 메시야로 예언된 그리스도이시다.

여기서 장재형 목사는 “자신을 낮추셨기 때문에 높아지신 예수님”이 교회와 신자들에게 주는 메시지를 크게 부각한다. 세상은 높은 지위나 권력을 추구하는 것을 성공으로 여기지만, 예수님은 거꾸로 자신을 철저히 낮추시고(케노시스), 가장 비참한 형태인 십자가 처형을 당하셨다. 그러나 부활을 통해,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높이심을 통해(빌 2:9 이하), 우리는 예수님이야말로 진정한 ‘승리자’이심을 본다. 이는 그분의 승리가 곧 ‘사랑의 승리’이며, ‘희생의 승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예수님의 그 길을 따르는 것이다.

바울이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았다”고 고백(롬 1:5)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해, 바울 자신이 완전히 변화되어 복음의 사도로 파송받았기 때문이다. 그 일을 위해서라면, 감옥에 갇히든, 매를 맞든, 생명을 잃든 상관없다고 선언할 만큼, 바울은 복음의 능력을 절실히 체험했고 그 복음에 모든 것을 건 사람이 되었다.

복음에는 ‘죽음을 넘어서는 능력’이 있다. 이는 세상 권세가 줄 수 없는 해방이다. 죽음의 공포 앞에 인간은 무력하지만,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그 두려움의 감옥을 깨뜨리셨기에, 그분 안에 있는 자들은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전 15:20 이하).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선포하는 것(롬 1:16)도, 이 복음이 참으로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장재형 목사는 여기서, 신자가 복음을 확신 있게 전하지 못하는 것은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에 대한 체험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라 지적하면서, 우리는 날마다 복음의 핵심인 십자가와 부활 앞에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한, “믿어 순종하게 한다”(롬 1:5)라는 표현에서 보듯,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결국 순종으로 결실을 맺어야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다면, 나는 이제 더 이상 나를 위해 살아갈 수 없게 된다. ‘나’를 구원하시고 다시 살리신 분이 예수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까지도 그분의 통치를 받아야 하는 것이 복음적 순종의 핵심이다. 세상적으로 보면, 내 뜻대로 살고자 하는 욕심을 내려놓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십자가와 부활을 진정으로 믿는 자라면, 결국 예수님의 손에 인생을 맡기게 되고, 그 믿음은 자연스럽게 순종으로 이어진다.

바울은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롬 1:7)라고 칭하며, 그들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한다”고 축복한다. 여기서 눈여겨볼 대목은 “하나님 우리 아버지”라는 표현이다. 과거에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른다는 자체가 거의 불경스럽게 여겨지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마 6:9)라고 가르치셨듯이, 우리는 이제 그분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관계가 되었다. 예수님을 통하여 의롭다 칭함을 받고, 거룩하게 된(성도로 부름받은) 이들에게, 하나님은 아버지 되시고 우리는 자녀가 된 것이다.

이때 “은혜와 평강”은 그 자녀로 부름받은 이들에게 임하는 영적인 선물이다. 평강(샬롬)은 구약에서부터 하나님의 백성이 애타게 구하던 최고의 가치였다. 그런데 바울은 그 평강이 어떻게 가능해지는가를 명확히 말한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진 은혜’가 선행되어야 한다. 죄인이 스스로 평안을 창조할 수 없다. 세상이 주는 일시적 평안이나 돈과 권력이 보장해주는 안정감은 오래가지 못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은혜 안에 들어오면, 죄책감과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된 참된 평강이 영혼에 깃든다. 이것이 바울이 “은혜와 평강”을 함께 묶어 선포하는 이유다.

장재형 목사는 설교에서, 교회가 단순히 ‘우리를 위한 종교적 취미나 모임’이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의 공동체”가 되어야 함을 역설한다. 교회 안에서 진정한 은혜와 참된 평강이 나누어지려면, 그 구성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고 순종하는 자들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십자가에 내가 못 박혀 죽었음을 믿으며, 부활로 새 생명 가운데 거함을 믿는 공동체라면, 서로에 대한 용서와 사랑, 헌신과 섬김이 자연스럽게 피어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신앙적 토대 없이 교회라는 이름만 붙여 놓은 집단은, 서로 대립하거나 갈등이 생기면 세상과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전락하기 쉽다.

결국 ‘복음의 완성’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승리이며, 이 승리가 우리의 삶과 공동체 안에서 현현될 때, 우리는 참된 교회가 된다. 또한, 바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르며 자신의 모든 정체성을 그 이름 안에 두었던 것처럼, 신자는 “내 삶의 중심은 예수님이시다”라고 고백하며 걷는 사람들이다. 그분이 그토록 낮아지고 희생함으로써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다면, 우리 역시 이웃을 섬기고 세상을 치유하기 위해 “희생과 낮아짐의 길”을 택해야 한다. 그것이 곧 십자가의 길이자 부활의 생명을 따라 걷는 길이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십자가와 부활의 연장선 위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주를 따르는 삶’(마 16:24)을 의미한다. 이는 우리의 욕망과 교만을 버리고, 주님의 뜻에 순종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예수님이 말씀하신 “나의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마 11:30)는 고백이 실제로 체험된다. 겉보기에는 좁은 길, 험난한 길 같지만, 참된 자유와 기쁨은 바로 이 복음에 순종할 때 찾아온다.

사도 바울이 편지 서두에서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요지는 명확하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약속의 복음은, 오랜 구약의 역사 속에서 이미 예언되었고, 성육신과 십자가, 그리고 부활을 통해 완전하게 실현되었다. 이 복음 때문에 내가 사도가 되었고, 너희도 그 복음을 들었으니, 이제 함께 은혜와 평강을 누리자. 그리고 그 복음에 합당한 믿음과 순종을 드리자.” 이것이 로마서 1장 2~7절에 담긴 바울의 간절한 인사이며, 동시에 교회의 사명이다.

장재형 목사가 강조하는 바 역시 동일하다. 우리는 반드시 복음의 전부, 즉 ‘오심(성육신)’과 ‘죽으심(십자가)’, 그리고 ‘부활하심’을 하나로 묶어서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한 가지만 전하거나 믿어서도 안 되고, 셋 중 한 가지만 강조해서도 안 된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으심, 그리고 부활로 승리하신 하나님 아들이심을 분명하게 증거해야 한다. 이것이 온전한 복음이며, 우리를 살리는 기쁜 소식이다.

오늘날도 세상은 여전히 여러 목소리를 낸다. 누군가는 인간의 이성과 지식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하고, 또 다른 이는 쾌락과 물질의 풍요가 인생의 목표라고 선언한다. 그러나 결국 그 어떤 것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근원적 문제는 ‘죄’와 ‘죽음’이다. 이에 대한 해답은 오직 십자가와 부활 안에 있다. 한때 기독교를 ‘죄인을 위한 종교’라 부르며 조롱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사실 그 말이야말로 복음의 정수를 보여주는 표현이다. 예수님이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 9:13) 하셨듯이, 기독교는 죄인들을 위한 종교다. 그리고 그 죄인이 바로 ‘우리 모두’임을 깨닫는 순간, 복음은 가장 아름다운 희망의 메시지로 다가온다.

바울의 로마서는 이 희망의 메시지를 체계적으로 풀어 놓은 ‘복음의 대헌장’이라 불린다. 그 서문에서부터 바울은 “이 복음이 나를 바꾸었고, 지금은 너희도 이 복음으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힘주어 말한다. 한때 교회를 박해하던 바울이, 이제는 교회를 세우는 사도로 변한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죄인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다. 그리고 그 사랑의 능력은 십자가와 부활에서 나온다.

결론적으로, 로마서 1장 2~7절은 복음의 본질을 간결하되 강력하게 보여준다. 복음은 인간의 철학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고, 그 약속은 예수님의 성육신과 십자가, 부활로 완성되었다. 예수님은 참 인간으로 낮아지셨고, 죽음을 이기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공적으로 증명되셨다. 그분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들에게는 은혜와 평강이 임하며, 새로운 정체성(성도, 곧 거룩하게 된 자)과 사명이 주어진다. 바울이 자신을 가리켜 ‘복음을 위해 부름받은 종’이라 일컬었듯, 우리 역시 복음을 듣고 변화되어, 이제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도구가 된다.

장재형 목사는 이 모든 가르침 위에 “복음은 곧 사랑”이라는 메시지를 덧붙인다. 예수님의 낮아지심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의 의미는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없이는 설명될 수 없다. 결국 복음이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는 사실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언이며, 그 독생자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임한 구원의 기쁨이다. 이 복음을 받은 이들은, 반드시 그 기쁨과 감사로 인해 ‘순종의 열매’를 맺게 된다. 그리고 그 삶의 모습이 곧 ‘복음의 삶’이다.

결국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핵심은, 첫째, 복음은 이미 약속된 것의 성취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역사 속에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둘째, 그 복음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완성되었고, 그 능력이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해방해 참된 평강에 이르게 한다는 사실이다. 바울이 처음부터 끝까지 외치는 복음이란, 바로 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베푸신 영원한 구원 계획이며, 이 복음은 우리의 인생과 세상을 뒤바꿀 만한 능력을 지닌다.

로마서 서두에서 나타난 바울의 인사는, 단순한 편지 예절이 아니다. 그것은 곧 모든 성도에게 주어진 축복이고 동시에 요청이다. “복음을 믿어 은혜와 평강을 누려라. 그리고 복음을 위해 부름받은 자답게 살아가라.” 이것이 장재형 목사가 설교에서 누차 강조하는 요점이기도 하다. 우리는 복음을 듣고, 그 복음의 진리를 이해하는 데서 멈추어선 안 된다. 복음이 우리 안에 살아 역사하도록, 날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하고, 그 부활의 생명력을 내 삶의 모든 영역에서 실천해 나가야 한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교회는 진정한 복음 공동체가 되며, 성도 개인도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라는 명칭에 합당한 삶을 살게 된다.

결국, 우리는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늘 고백해야 한다. 이 고백 안에는 예수님의 오심(성육신), 죽으심(십자가), 다시 사심(부활)이 한데 응축되어 있다. 바울은 이 사실을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확증하며,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롬 1:6)라고 부른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름받은 사람들의 모임이기에, 이제 그 이름을 위하여(롬 1:5) 세상에 나가 복음을 전한다. 이것이 우리가 ‘성도로 살아가는 이유’이며, 복음이 우리에게 준 가장 강력한 사명이다.

바라건대, 로마서 1장 2~7절의 말씀을 묵상하는 모든 이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고 오셨다”는 성육신의 은혜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다”는 구원의 능력을 마음 깊이 새기게 되길 바란다. 그리하여 죄의 멍에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진정한 자유와 기쁨, 그리고 순종의 은혜를 누릴 수 있길 소망한다. 그리고 이 복음의 삶을 통해, 서로를 사랑하며 섬기고, 세상에 주님의 빛을 드러내는 공동체를 이루어 가길 기도한다.

이는 장재형 목사가 설교와 사역에서 줄곧 지향하는 바이기도 하다.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이 복음, 즉 성육신에서 십자가와 부활에 이르는 예수 그리스도의 전 인격과 사역을 자신의 삶에 담아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바울이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 외쳤던 그 인사를 실제로 체험하게 된다. ‘죄인’에서 ‘성도’로, ‘절망’에서 ‘소망’으로 변화되는 이 여정이야말로 복음의 진수이며, 여기에 “기독교는 죄인의 종교”라는 구절의 참뜻이 살아 숨 쉬게 된다.

결국, 복음의 여정은 우리 각자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다. 당신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혹은 머리로만 알고 있으면서, 아직 마음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가? 바울이 증언하고, 장재형 목사를 비롯해 무수한 신앙 선배들이 반복해서 증거해온 것은, “복음은 실제다”라는 사실이다. 이 실제를 삶으로 경험하고, 그 경험을 다른 이들에게 간증하며, 그들 역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도록 돕는 것이 곧 교회의 존재 이유요, 성도의 고백이다.

부디 우리가 오늘 이 말씀을 붙들고, ‘약속의 성취’로 오신 예수님의 성육신, 그리고 ‘죽음을 깨뜨린’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더욱 깊이 묵상하자. 바울이 “복음으로 부름받았다”고 외쳤듯, 우리도 “복음을 위해 부름받은 자”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이 부르심 앞에서 순종하고, 우리에게 허락된 은혜와 평강을 누리며,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거룩한 통로가 되길 간절히 소망한다.

그렇게 살아가는 이들이 모여 있는 곳, 바로 그곳이 참된 교회다. 교회의 표지는 십자가, 교회의 생명은 부활, 그리고 교회의 사명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성육신을 통해 죄인들을 찾아오신 하나님, 십자가로 그 죄인들을 구원하신 하나님, 그리고 부활로 그들을 영원한 생명 안에 살도록 인도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우리가 이 복음의 이야기와 함께 오늘도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한다.

아울러, 로마서를 계속 공부하면서, 바울이 “이 복음으로 내가 부름을 받았다”고 고백하는 깊은 이유를 더 온전히 깨닫게 되길 바란다. 이는 바울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결국 “복음 때문에 부름받았다.” 그리고 그 복음을 통해 죄인에서 의인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존재들이다. 이 부르심에 감사하며, 매일의 삶 속에서 복음이 실제적 능력으로 작용하도록 깨어 있어야 한다.

이상으로, 로마서 1장 2~7절에 대한 묵상을 바탕으로, 약속으로 주어진 복음과 성육신의 신비,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로 완성된 복음의 능력을 정리해 보았다. 장재형 목사가 여러 설교를 통해 지속적으로 강조해 온 바와 같이, 복음은 우리에게 “약속된 사랑의 사건”이자 “생명을 주는 능력”임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의 언어와 삶 전체로 이 복음을 증거하며, 이방인 중에서도, 또 가까운 이웃 가운데서도 ‘믿어 순종케 하는’ 거룩한 도구로 쓰임 받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허락하시는 은혜와 평강이, 이 복음을 붙드는 모든 이에게 충만하기를 기도한다.

고난과 부활의 서막 – 장재형(장다윗)목사

1.안나스의 배후와 종교 권력의 타락

장재형(장다윗)목사가 강해한 요한복음 18장 12절에서 21절까지의 장면을 중심으로 묵상한 글인데 본문은 예수님을 잡아 심문하는 종교권력의 어두운 민낯을 극적으로 드러낸다. 이 본문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대목은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라는 표현이다. 이는 단순히 절차적인 문제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당대에 존재했던 거짓된 종교권력의 근본적인 부패를 보여주는 결정적인 단서이다. 당시 유대사회에서는 산헤드린 공의회가 종교재판을 주관했으며, 그 의장은 현직 대제사장이 맡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을 결박해 붙잡은 자들이 가장 먼저 끌고 간 곳이 현직 대제사장 가야바가 아닌, 그의 장인(丈人)인 안나스의 집이었다는 사실은 여러모로 심각한 문제를 시사한다.

안나스는 과거 A.D. 6년부터 15년까지 약 9년 정도 대제사장직을 수행한 바 있었고, 이후 자신의 다섯 아들을 모두 대제사장 자리에 앉혔으며, 결국 사위인 가야바에게까지 그 권력을 세습시킨 악명 높은 인물이다. 본래 유대교의 전통적 제사장직은 종신직이었고, 그만큼 존경받으며 권위 있는 자리였다. 하지만 로마 제국이 유대를 지배하게 된 후, 대제사장직은 돈과 정치적 줄대기에 의해 좌우되는 세속적 권력이 되어버렸다. 로마는 자신들에게 협조적이고 재정적으로 뒷받침이 될 만한 인물을 대제사장으로 세웠고, 안나스는 그러한 구조 속에서 막대한 금전을 로마에 바치며 제사장직을 잡고, 한편 성전 안에서는 장사와 환전으로 부를 축적하며 거대한 종교적 기득권을 형성했다.

당연히 이런 인물에게 예수님의 사역과 말씀은 눈엣가시였다. 예수님은 공생애 내내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이 하나님의 전(殿)을 장사치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질타하시며, 성전을 뒤엎고 정화하셨다. 복음서들 가운데 요한복음 2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비둘기와 양, 소를 파는 자들의 상과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버리며 말씀하신 장면이 등장한다. 그 당시에 ‘성전 안에서 파는 제물만 검열을 무사 통과하도록 하고, 바깥에서 준비해온 제물을 무조건 불합격 처리하여 다시 성전에서 비싼 값에 사도록 하는 구조’가 만연했는데, 그 중심에 바로 이 대제사장 일가의 이해관계가 있었다. 안나스와 그를 추종하는 종교 권력자들은 이를 통해 막대한 재산을 축적했고, 성전세나 환전에 대한 수익 또한 마찬가지의 구조로 거둬들였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이야말로 그들의 기득권을 무너뜨릴 가장 위협적인 존재였다. 안나스는 ‘율법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자신을 포장했지만, 정작 가장 거룩해야 할 성전을 돈과 권력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전락시켰고, 온갖 정치적 뒷거래로 로마와 결탁해 대제사장직을 세습하며 부와 명예를 지켜왔다. 그리하여 예수님이 성전을 청결케 하시고,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리라”고 하신 말씀을 들으며, 안나스는 이 도전자를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고 느꼈을 것이다. 종교적 폭정과 강압, 그리고 거짓된 법 적용을 통해서라도 예수님을 잡아내는 것, 그것이 그의 최우선 과제였다.

그렇다면 왜 산헤드린이 아닌 안나스 개인의 집에서 예수님이 먼저 심문을 당했을까? 유대인의 종교재판은 율법상 밤에 열 수 없었으며, 공정한 재판이 되려면 반드시 성전 뜰이나 공적으로 마련된 장소에서 낮에 이루어져야 했다. 더불어 최소 두 명 이상의 증인이 필요했고, 재판은 공정하게 진행되어야 했다. 그러나 예수님을 잡아온 이들은 어두운 밤에 은밀하게 안나스에게로 끌고 갔다. 현직 대제사장이 아닌 과거 대제사장이 예수님을 심문한다는 것 자체가 불법이었다. 또한 예수님을 사형에 처할 권한은 오직 로마 총독에게 있었으므로(유대인들에게는 사형 집행권이 없었다), 안나스는 일단 종교적 차원의 이단(異端) 정죄를 확정 지어 빌라도에게 넘기기만 하면 되었다. 어떻게든 예수님이 “율법을 거스르고, 성전을 헐고,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하며, 로마 황제 가이사 외에 다른 왕이 되려 한다”는 식으로 프레임을 씌워 형량을 무겁게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가 배반자 유다였다. 그는 예수 공동체 안의 내부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그 비밀스러운 가르침이나 예수님의 발언들을 과장 혹은 왜곡해 안나스 측에 전달했다. 요한복음 13장 30절에서 유다는 주님께서 주신 떡을 받자마자 어둠으로 떠나갔다. 그가 “밤이더라”라는 말씀은 단순한 시간적 배경일 뿐만 아니라, 영적·도덕적 어둠 속으로 그가 들어갔음을 의미한다. 그는 이미 대제사장 측과 은 30냥에 계약하여 예수님을 넘겨줄 계획을 세운 상태였으며, 예수님께서 ‘헐라’고 말씀하신 성전, 또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주장하신 부분(실제로 예수님은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여러 차례 암시하셨다) 등을 안나스에게 제보함으로써 빌미를 만들어주었다.

이처럼 안나스에게는 불법적인 심문을 행할만한 공식 권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 배후에서 사두개파 중심의 성전 경제와 권력을 틀어쥐고 있었기에, 산헤드린 전체의 움직임을 흔들 수 있는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또 대제사장직을 세습시키면서 실제 현직 대제사장인 가야바조차 자신의 ‘얼굴마담’처럼 세워놓고 배후에서 종교정치적 결정을 좌지우지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내내 이러한 거짓되고 부패한 종교 지도자들과 충돌을 피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바리새파, 사두개파, 여러 종파들 사이에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 14:6)이라 증언하시며, 사람들의 마음을 율법의 본질로 돌이키게 하고자 하셨다. 이것이 그들에게는 위협으로 다가왔고, 마침내 악명 높은 안나스가 최후의 결단을 내린 것이다.

여기서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는 바는, 종교와 권력이 결탁하면 얼마나 무서운 형태의 폭력이 나타나는가 하는 점이다. 장재형목사는 복음서의 이 장면을 연구하며, 지도자라고 스스로 자부하는 자들이 하나님을 건성으로 붙들고 사실은 세상의 힘을 빌려 사람을 해치려 할 때, 그 배후에는 어김없이 거짓과 부패가 있음을 지적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과 사랑을 지향하는 것이지만, 안나스와 같은 거짓된 종교 지도자들은 율법을 오히려 죽이는 도구로 만들고, 백성들의 믿음을 수단화해 자신의 권력과 부를 공고히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겉으로는 거룩한 척하지만 속은 독사의 자식과 같은 이들에게 “화 있을진저”라고 거듭 말씀하신 것이다. 이들은 단순히 종교적 지식을 갖고 있었을 뿐, 참된 영적 본질에서 멀어져 있었다.

우리가 살피는 요한복음 18장 19~21절에서 대제사장이 예수님께 “그의 제자들과 교훈에 대하여” 물은 것은, 그가 과연 어떠한 가르침으로 사람들을 꾀고 있기에 이렇게 세력이 형성되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유다는 “비밀스러운 가르침”이 있다고 찔러 넣었을지 모르고, 그것을 바탕으로 대제사장들은 “네가 감히 우리 전통과 율법, 그리고 로마 권력에 도전하는 가르침을 폈느냐?”라고 공격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여 이르셨다. “내가 드러내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의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히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요 18:20). 예수님은 굳이 감출 것이 없었다. 그들은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집요한 음모를 꾸몄으나, 예수님은 진리 자체였기에 자신을 숨길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보라. 저희가 나의 하던 말을 아느니라”(요 18:21)고 하시며, 증인과 증언을 통한 공정한 재판 절차를 도리어 되짚어주신다. 그러나 이미 결론은 나 있었다. 안나스와 그 일당들은 예수님께서 어떤 답을 하든 마음이 닫혀 있었고, 예수님이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신지 여부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그들의 성전 장사와 기득권을 지켜줄 정치·종교적 합의를 유지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모습이 교회 안에서도 나타날 수 있음을 경고한다. 진정한 복음을 외치고, 교회가 먼저 회개해야 한다며 성전을 가꾸려고 하면, 이미 교권주의와 물질주의에 물든 일부 세력은 오히려 그를 이단이라 공격할 수 있다. 교권세력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생각하며, 소위 ‘교회를 지킨다’는 명분하에 정작 하나님의 임재와 말씀을 거부하는 역설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교회 역사를 예로 들며, 종교개혁의 시대 때도 중세 카톨릭 교권이 물질적·정치적 힘과 결탁하여 면죄부를 팔고, 교회 세속화가 심각해졌을 때, 루터가 “오직 성경”을 외치며 진리를 환기시키려 하자 거대한 교권의 벽에 부딪힌 사례를 상기시킨다. 예수님 시대의 안나스 세력이나, 중세 시대의 교권주의자나, 오늘날 여전히 존재하는 거짓된 지도자들이나, 본질은 동일하다.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권력과 이익을 좇고, 성전을 거룩하게 지키기보다는 매매의 장소로 만들며,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는 자들을 오히려 탄압하고 추방하려고 한다.

결국 이러한 배경 속에서 예수님은 종교재판이라는 명목의 불법 심문을 받으시고, 곧 이어 빌라도의 법정으로 이송된다. 여기서부터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지만, 실제로 이 모든 음모의 실질적 시작점은 바로 안나스의 집에서 이루어진‘배후 심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밤의 비밀 거래와 음모가 예수님을 가야바와 빌라도, 그리고 끝내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로 몰아넣었다. 빌라도는 로마 권력의 대표였고, 가야바는 유대교 권력의 대표였으나, 이 양측 권력의 ‘진정한’ 조정자는 안나스였다. 요한복음이 다른 공관복음서(마태, 마가, 누가)와 달리 안나스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지목하고, 예수님을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갔다”고 기술한 것은 이 음모의 시작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독자들에게 분명히 알려주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이 장면은 ‘정치 권력’과 ‘종교 권력’이 야합하면 얼마든지 무고한 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음을 증거한다. 예수님은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으셨으며, 결국 십자가의 길을 기꺼이 가심으로써 모든 인류를 구원하신다. 아이러니하게도 안나스는 자신이 지키려고 했던 성전을 스스로 무너뜨렸다. 그 성전은 돌과 건물, 돈과 권력으로 운영되는 종교 기관이었다. 예수님은“내가 다시 세우리라”는 말씀으로 참된 성전이 ‘주님 자신’이며, 성령으로 하나 되는 공동체임을 선언하셨다. 이 메시지가 안나스와 그 세력에겐 가장 큰 위협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지키고 누려온 기득권 체제 전부가 부정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장재형목사는 오늘날에도 이런 안나스와 같은 거짓 지도자들의 양상이 재현될 수 있음을 거듭 강조한다. 크리스천 공동체가 부흥하면서 조직화되고 제도적 권위가 커질수록, 어느 순간부터 물질적 이득이나 명예, 정치적 영향력을 탐하는 자들이 생겨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겉으로는 교회나 성전을 위한다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스스로를 위한 종교 장사를 벌이게 된다. 이것이 누적되면 예수님 시대의 성전처럼, 결국 거룩이 사라지고 장사치의 소굴이 될 위험이 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어떤 시대에도 회개를 외치고 진리를 선포하는 예언자적 음성을 세우신다. 그때마다 안나스 같은 거짓 권력이 그 목소리를 잠재우고 심지어 죽이려 할 수 있는데, 성도들은 오히려 진리의 음성을 분별해내야 하고, 담대히 복음의 본질을 지켜야 한다고 장재형목사는 역설한다.

결국 요한복음 18장 12~21절에 나타난 “먼저 안나스에게로 데리고 가니”라는 장면은 단순한 에피소드가 아니라, 부패한 종교지도자와 정치 권력이 결탁하여 예수님을 고난의 길로 몰아넣는 역사의 비참한 상징이다. 동시에 이 어두운 그림자를 통해 예수님께서 빛 되심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신다. 악의 최후 발악이 있었기에 주님의 구원사역이 오히려 빛나게 되었다. 우리가 교회를 섬기며 신앙생활할 때, 안나스와 같은 인물이 혹시 우리의 공동체를 오염시키지 않는지 늘 깨어 있어야 할 것이다. 공정한 재판과 율법 준수, 그리고 성전의 본래 목적이 완전히 뒤틀려버린 한 시대를 반면교사 삼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더욱 붙들고, 회개와 거룩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고 장재형목사는 반복해서 설파한다.

Ⅱ. 베드로의 부인과 성령의 능력

이제 시선을 베드로에게로 돌려보자. 예수님께서는 결국 안나스의 집에 먼저 끌려가 불법 심문을 받으신 뒤, 공관복음서가 주로 보여주는 가야바와 산헤드린의 종교재판 과정을 거치신다. 그 와중에 제자들의 모습은 어떠했는가? 예수님께서 체포되자 대부분의 제자들이 뿔뿔이 흩어졌고, 요한복음 18장 15~16절에 따르면,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하나(‘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으로 묘사되는데, 학자들 사이에서는 요한 혹은 유다일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가 예수님을 뒤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갔다고 기록한다. 그나마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과 달리 “주님을 버려둘 수 없다”는 마음이 있었는지, 무장을 한 군인들 앞에서도 칼을 뽑아 들고 저항하려 했으며, 예수님께서 결박당해 끌려가시는 모습을 뒤쫓아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들어간 것이다.

그러나 곧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임을 부인한다. 요한복음 18장 17절에서 문지기 여종이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고 묻자, 베드로는 “나는 아니라”고 답한다. 이후 숯불을 쬐고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도 베드로는 연이어 예수님과 자신은 무관하다고 잡아뗀다. 공관복음서는 그때 닭이 울었다고 전하며, 베드로가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심히 통곡했다고 기록한다(마 26:75, 막 14:72, 눅 22:62). 사랑하는 스승을, 그것도 가장 가까운 제자였던 베드로가 세 번씩이나 부인해버린 이 사건은 기독교 신앙에서 한없이 큰 슬픔과 자책의 이야기로 남아 있다. 그러나 동시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다시 베드로를 찾아가셔서“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 21장)라고 세 번 물으시고 다시금 사도의 사명을 주시는 장면을 통해, 주님의 놀라운 용서와 사랑의 스토리로 완성된다.

왜 베드로는 그토록 담대했던 제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결정적 순간에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하고 말았을까? 이는 거대한 종교 권력과 정치 권력이 합작한 잔혹하고도 단호한 심판의 분위기, 그 앞에서 느끼는 공포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미 안나스의 집뜰에서 군인들과 하속들이 예수님을 결박해 끌고 들어갔고, 그가 곧 무거운 형벌을 받을 것이 자명해 보이는 상황에서, 베드로가“나도 그의 제자다”라고 인정했다가는 자신 또한 체포되어 혹독한 형벌을 받을 수 있다고 직감했을 것이다. 특히 안나스라는 배후 권력이 얼마나 무서운지, 그는 로마의 군병들과도 협력하며 예수님을 잡아온 이들이다. 그런데 베드로가 무슨 힘이 있어 그 대세를 뒤집을 수 있겠는가? 결국 인간적인 두려움이, 그를 한순간에 약한 존재로 만들었다.

여기서 우리는 배반자 유다와 달리, 베드로는 적어도 그 뜰까진 따라왔다는 점에 주목할 수 있다. 그는 끝까지 주님 곁을 지키고 싶었으나, 잔인한 현실 앞에서 믿음을 지키지 못했다. 그리고 그 부인 후에, 베드로는 자복하듯 통곡했다. 거기서 끝이었으면, 베드로는 한 인간의 연약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실패자로 남았겠지만, 주님의 부활 이후 베드로는 다시 회복되어 초대 교회의 기둥으로 선다. 사도행전 2장에서 오순절 성령 강림이 임했을 때, 베드로가 사람들 앞에 서서 담대히 복음을 전하고, 3000명이나 회심하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다. 과거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회개한 베드로가, 성령의 능력을 통해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하는 담대한 사도로 변화된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장면을 통해 성령의 역사가 얼마나 실제적이며 능력 있는지 강조한다. 베드로의 부인은 분명 인간적인 나약함과 두려움의 소산이지만, 그가 한없이 추락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한계를 절감한 순간이 그가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고 진정한 믿음의 용기로 재무장하는 계기가 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목격한 후, 더 이상 물러서지 않고, 설령 종교적 권력이든 정치적 권력이든 어떤 위협이 닥쳐올지라도 복음을 외치게 된다. 그 유명한 말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행 5:29)고 외치며, 박해에 굴복하지 않는 지도자로 거듭난다.

이것은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의 배신과 극명하게 대조된다. 유다는 안나스에게 정보와 기회를 팔아버리고, 결국 “나는 죄 없는 피를 팔았다”는 죄책감에 휩싸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도 회개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유다의 회개는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고, 자기 파멸로 치닫고 말았다. 반면 베드로는 심히 통곡함으로써 어떻게든 다시 주님께 돌아갈 수 있었고, 주님이 그를 찾아와 주도적으로 회복시켜주셨다. 장재형목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사랑의 본질’과 ‘성령의 회복 사역’을 강력히 강조한다. 인간의 불신과 배신이 아무리 심각하더라도, 부활하신 주님의 용서와 성령의 회복 역사는 그를 다시 일으키고도 남는다는 것이다.

또한 베드로의 부인 사건은 교회와 성도들에게 계속해서 깨달음을 준다. 누구나 신앙의 담대함을 말하고 결단을 외칠 수 있으나, 현실의 압박 앞에서 약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베드로처럼 수제자라 불리던 자도 그렇게 될 수 있다면, 오늘을 사는 우리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종교 권력과 정치 권력이 한목소리로 “예수를 따르는 자들을 제거하자”라고 외치면, 그 분위기 속에서 수많은 성도가 위축되고, 어떤 이들은 베드로처럼 “나는 예수를 모른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그 부인 후의 태도다. 베드로처럼 통곡하며 회개한다면, 주님께서는 이를 외면하지 않으신다. “양을 먹이라”고 다시 사명을 주시고, 그를 통해 복음의 큰 역사를 이루신다.

장재형목사는 현대 교회 안에서도 이러한 ‘베드로의 회개와 회복’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교회가 여러 가지 이유로 핍박을 받을 때, 성도들은 때로 세상의 조롱과 적대 앞에서 움츠러들 수 있다. 혹은 자신이 그동안 지켜온 신앙 원칙을 순식간에 포기하고 세상과 타협할 수도 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여전히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신다. 그때 우리가“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연약함으로 넘어졌습니다”라고 고백한다면, 주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우리를 다시 일으키시고, 손에 복음의 깃발을 쥐어주신다. 베드로가 과거의 실패를 딛고 일어나 오순절의 복음 전도자가 된 것처럼, 우리도 회복되어 주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사도행전의 베드로 행적을 보면, 그는 감옥에 갇히고 매질을 당해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 부활의 주를 만난 확신, 그리고 성령의 능력 안에서 살 때, 어떠한 종교적·정치적 협박도 그를 꺾지 못했다.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의 말씀 전하는 것을 그치라고 하느냐,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라는 그의 선언은 신앙의 자유와 담대함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잘 보여준다. 이전에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이다. 이는 장재형목사가 반복해서 설명하는‘성령의 실재성’이다. 성령은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과 부활의 진리를 받아들일 때, 구체적으로 우리 심령 안에 내주하시어 근본적 변화를 일으키는 분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성령의 능력을 누리고 베드로처럼 담대한 증인이 될 수 있을까? 첫째는 진솔한 회개다. 베드로는 스승을 부인한 후 통곡했다. 자신이 얼마나 주님을 사랑했으나 동시에 얼마나 연약했는지를 인정한 것이다. 참회가 없이는 성령이 주시는 진정한 치유와 새출발이 어렵다. 둘째는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이다. 베드로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물음을 세 번 받았다. 그것은 자기 기만이나 교만을 무너뜨리고, 오직 예수의 사랑과 용서로만 살 수 있음을 깨닫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셋째는 말씀과 기도를 통해 성령 충만을 구하는 것이다.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오순절 사건은 제자들이 ‘전혀 기도에 힘썼다’는 배경 속에서 일어났다. 성령의 임재가 있으므로 제자들은 더는 숨어 지내지 않고, 공공연하게 복음을 외칠 수 있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현대 교회에 적용할 때, 우리도 끊임없이 말씀과 기도 안에서 성령을 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오늘날에도 교회나 성도가 세상의 권력 구조나 사회 분위기에 눌려 진리를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교회가 이익 집단이나 정치 세력의 이해관계에 휘말리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르는 사람, 성령에 붙들린 사람이라면, 어렵고 힘든 가운데서도 베드로처럼 일어나 복음을 변증하고 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특히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부르시는 자리로 다시 나아가는 결단”을 중요시한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타협을 요구하고, 거짓 권력은 위협으로 몰아가지만, 성령께서는 “감히 너희가 내 이름을 어떻게 해서든 담대히 전하라”고 도우신다.

결국 예수님께서 안나스의 집에서 불법 심문을 당하시고, 가야바와 빌라도로 이어지는 잔혹한 재판을 거쳐 십자가에 달리시는 극적인 전개 한가운데, 베드로의 부인은 오히려 죄와 은혜의 대조를 선명하게 그려내는 중요한 사건이 된다. 정치와 종교 권력의 결탁이라는 ‘최대 악의 시나리오’ 앞에서도, 주님의 사랑과 성령의 회복은 결코 좌절되지 않는다는 메시지가 요한복음의 전체 맥락 속에 분명히 자리잡고 있다.

장재형목사는 신앙 공동체 안에서 실패하고 낙심한 이들이 있더라도, 결코 끝이 아님을 잊지 말라고 권면한다. 베드로처럼 주님 앞에 진심으로 회개하고 성령의 은혜를 구한다면, 그 어떤 과거의 실수와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큰일을 감당할 수 있게 된다. 교회 안에 혹 “안나스 같은 세력”이 득세하여 진리를 왜곡하고 거짓으로 사람들을 압박하더라도, 베드로와 같이 예수님을 바라보고 성령의 용기를 구하는 성도는 결코 넘어지지 않는다. 교회의 참된 권위는 사람의 지위와 힘에서 오지 않고, 오직 성령의 역사를 통해 예수님의 가르침을 바로 전하는 그 말씀의 능력에서 나온다. 이는 2천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결코 바뀌지 않는 복음의 진리다.

우리는 요한복음 18장 12~21절을 통해, 안나스라는 부패한 종교 권력자가 어떻게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음모를 진행했는지, 그 배후에 있는 악의 기제를 분명히 볼 수 있다. 율법과 성전, 그리고 종교 재판이라는 거룩해 보이는 틀 안에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그리스도를 죽이는 모순이 드러난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제자들, 그중에서도 베드로는 두려움에 휩싸여 주님을 부인한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그는 다시 회복되고, 복음 전도의 핵심 인물이 된다. 이것이 요한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강력한 아이러니이자 소망의 메시지다. 가장 음습하고 어두운 곳에서 거짓 권력이 횡행할 때, 참된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더욱 선명히 드러난다. 그리고 성령은 인간의 연약함을 덮고도 남을 능력으로 우리를 새 사람으로 빚어내신다.

“장재형목사”는 이 본문을 강해하며, 교회사의 수많은 박해와 왜곡 속에서도 복음이 계속 전파되고, 무너진 자들이 다시 일어나 복음을 증거해온 것을 상기시키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 역사를 배움으로써,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역사하시는 성령을 신뢰하고, 예수님의 진리와 사랑을 붙들어야 한다. 과거 안나스와 같은 교권주의자들이, 혹은 세상의 권력자들이 교회를 제압하려 한 사례는 부지기수였지만, 그럴 때마다 주님께서 숨겨 놓으신 사람들, 회개하고 돌아선 ‘베드로들’을 통해 교회는 다시금 살아났다. 따라서 교회와 성도는 어떠한 악한 환경이나 배신, 혹은 자기 실수에도 희망을 놓지 않아야 한다. 주님은 살아 계시고, 성령은 여전히 임재하신다. 밤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까워지듯, 우리는 요한복음 18장에 담긴 검은 그림자 속에서 오히려 빛의 준비가 한창 진행되고 있음을 봐야 한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의 체포부터 심문, 그리고 베드로의 부인과 이어지는 이 일련의 사건들은, 한편으로는 부패한 종교 권력과 정치 권력이 어떻게 합심해 진리를 파괴하려 드는지를 보여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님의 사랑과 성령의 회복 능력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좌절되지 않는다는 궁극적 소식을 전한다. 공포와 배신, 음모와 죄악이 난무하는 밤이었으나, 그 모든 것을 넘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신 주님의 의와 은혜가 최종 승리를 거두었다. 교회 안에 안나스가 잠입하더라도, 제자들이 때로는 베드로처럼 넘어질지라도, 성령으로 함께하시는 하나님은 결코 교회를 포기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는 대로, 이 본문을 통하여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고 공동체를 점검해야 한다. 혹시 우리의 신앙이 기득권과 세속적 욕망에 휘둘리고 있지 않은지, 혹은 극심한 억압 앞에서 주님을 부인하고 세상을 좇고 있지는 않은지, 혹은 자신도 모르게 안나스의 편에 서서 참된 복음을 외치는 이들을 배척하고 있지는 않은지를 살펴야 한다. 동시에, 혹 나 자신의 연약함과 실패가 크더라도, 베드로처럼 회개하고 성령의 능력 안에서 주님께 나아가면, 주님은 새날을 열어주신다는 약속을 기억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요한복음 18장의 심문 장면이 전해주는 교훈이자,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모든 신앙 공동체가 가슴 깊이 새겨야 할 메시지다.

위에 것을 바라보라 – 장재형목사

  1.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 자의 정체성과 은혜

우리가 골로새서 3장 1절의 말씀,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이라는 선언을 들여다보면, 이 한 구절이 신앙의 정체성과 은혜의 깊이를 요약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이미 2장에서부터 율법주의적인 주장과 헬라 철학의 영향으로 인해 교회가 흔들리고 있는 상황을 지적한다. 그러면서도 3장에 이르면 본격적으로 “위의 것을 찾으라”라는 권면을 시작하며,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새로운 삶’을 강조한다. 바울이 제시하는 이 새로운 삶, 곧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이라는 서두는 단지 구호나 표어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존재 전체를 바꿔놓는 사건임을 보여 준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라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주제를 상기시키면서, 동시에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다”라는 구원의 진수를 말한다. 본래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해 영생을 얻고, 이로써 전혀 다른 존재가 되었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신자에게는 더 이상 그 이전의 정체성이 적용되지 않는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거듭난 존재로, 부요함을 이미 소유한 자로, 은혜를 입은 자로 살아가는 것이 핵심이다. “다 죽었다”고 말할 때, 이는 형식적 선언이 아니라 실제적 변화, 즉 십자가 사건의 능력이 우리의 본질을 송두리째 뒤바꾸었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이라는 이 문장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가난하지만 이미 부요한 자라는 역설의 진리가 바로 여기에 담겨 있다. 세상의 관점에서는 경제적 풍요와 사회적 지위, 명예 등을 통해 부유함을 측정한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의 부요함이란, 죄에서 자유케 되고 영원한 생명을 약속받은 존재가 누리는 최고의 가치다. 그러므로 세상적 부귀영화를 좇지 않고도, 이미 영적 부요함에 근거해 자신을 낮추고 가난해질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이 점에서 “가난해지자”는 말이 단지 금욕주의나 고행을 뜻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미 영적으로 풍성한 자이기 때문에, 물질적 것이나 세상적 명예에 굴복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뜻이다.

이 ‘영적 부요함’은 은혜에서 비롯된다. 인간의 어떠한 공로나 능력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의 능력으로 주어진 것이기에, 우리는 그 부요함을 온전히 누릴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상적인 사고방식, 즉 한 번 자리를 잡으면 움켜쥐고 싶어 하는 소유욕, 세상적 성공을 과도하게 추구하는 모습, 혹은 자기 공로로 무엇인가를 이루려는 율법주의적인 경향이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을 수 있다. 이것을 두고 바울은 “땅의 것”이라고 말하며,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 자라면 그러한 옛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한다.

특히, 이러한 복음의 핵심과 그리스도 중심의 신앙을 현대에 적용하여 설교하고 가르치는 목회자들 가운데, 장재형목사는 “이미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었고, 부활의 소망이 실제가 되었다면, 우리의 삶의 태도와 관점이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한다”라는 점을 자주 강조한다. 세상 가치관에 끌려다니는 것이 아니라, ‘위의 것’을 추구하고 하늘에 속한 존재답게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이것은 특별한 소수만의 삶이 아니라, 모든 크리스천이 누려야 할 정체성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라는 말씀이 바로 이 강조점의 출발이 된다.

특이한 점은, 이러한 가르침이 단순히 관념적으로 ‘땅의 것’을 배제하기 위해 수도원에 들어가거나 세상 문화를 전면 거부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위의 것’을 소유한 자의 여유와 자유로 인해 삶을 더 풍성하게 누리라는 의미로 해석된다는 점이다. 영적 부요함에 기초해 살면, 세상의 재화나 명예가 절대적 기준이 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외적으로 드러나는 물질적 풍족함을 부러워하지만, 사실상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모든 것을 소유한 신자는 그 여유로 세상을 섬길 수 있게 된다. 약자에게 기꺼이 손 내밀고, 자신을 희생하며, 자발적으로 가난해질 수도 있다. 왜냐하면 궁극적인 상속자가 이미 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난할지라도 부유한 자’이며, ‘무소유하는 것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고린도후서 6장 10절 참조)의 삶을 실제로 살아낼 수 있게 된다.

“이미 얻었기 때문에 가난해질 수 있다”는 역설적인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아주 밀접하게 연결된다. 예수님 역시 본래 하나님과 동등한 분으로서 하늘 영광을 소유하셨으나, 이 땅에 오셔서 종의 형체를 입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자신을 비우셨다. 이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과 희생은, 신자들에게 ‘그분을 닮아가라’는 초청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초청에 응하는 사람들은 고통스럽기만 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영광에 참여한 자로서, 확실한 소망을 품고 기쁨 중에 헌신의 길을 갈 수 있게 된다.

바울이 “너희가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이라고 할 때, 이것은 단지 교리적 선언에 머물지 않는다. 우리 일상 자체가 이미 바뀌었고, 존재론적으로 변화되었으니, 그에 합당하게 행동하고 살아야 한다는 촉구이다. 신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새사람”이라는 정체성을 꾸준히 의식하고 살아야 한다. 그래서 음란과 부정, 사욕과 탐심 등으로 대표되는 ‘땅의 것’을 과감히 버릴 수 있는 것이다. 고백적으로 말하자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이제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다”라는 은혜의 경험이 우리를 움직이는 동기가 된다.

장재형목사 역시 여러 설교와 강연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새로운 생명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실제 삶에 적용되는지를 강조한다. 우리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는 선언은, 더 이상 죄와 사망의 권세에 얽매여 살 필요가 없음을 의미하고, 동시에 우리가 어떤 사역과 헌신을 하든지 결국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 가운데서 기쁘게 감당할 수 있다는 확신을 제공한다.

더 나아가, 이러한 은혜에 입각한 새로운 삶의 방식은 개인의 내면적 변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또 사회 전반에서 은혜와 진리로 살아가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게 한다. 이처럼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 자의 정체성과 은혜’를 깨달으면, 필연적으로 우리의 관점은 ‘위의 것’을 향하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곧 이어지는 바울의 말, “그러므로 위엣 것을 찾으라”라는 권면은 매우 자연스럽다.

요약하자면,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이라는 말은 우리가 이미 죽었고, 동시에 다시 살아난 자로서 새로운 존재와 새로운 정체성을 얻었다는 선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은혜는 율법적 행위나 세속적 부유함과 다르며, 우리 안에 내재된 죄의 권세를 깨뜨리고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한다. 이 사실을 붙들 때, 우리는 자유로이 세상적인 욕망을 내려놓을 수 있고, 궁극적으로 하나님만이 주시는 영적 부요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게 된다. 

  • 위의 것을 찾으라 – 세속적 도전과 영적 모드 전환

바울이 골로새 교회에게 “위엣 것을 찾으라”라고 당부할 때(골로새서 3장 1절), 단순히 “하늘만 바라보라”는 식의 비현실적 태도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세상 한복판에서 살지만, 그 중심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그로 인해 우리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이 달라져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이를 일종의 ‘모드 전환’이라 부를 수 있겠다. 신앙생활에서도 여전히 세상적인 방식으로만 사고하는 ‘옛 모드’를 유지하기보다는, ‘하늘의 관점’으로 사고하는‘새 모드’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이 말하는 이 ‘새 모드’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할까? 우리는 골로새서 2장 8절 이하에서 헬라 철학과 영지주의 사상이 교회 안에 들어와 성도들을 흔들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또한 2장 16~23절에서 언급되는 율법주의적 요구(특히 절기, 월삭, 안식일, 음식 규정 등) 역시 또 다른 형태의 도전을 제공했다. 바울은 골로새 교회가 이 두 가지 도전 – 헬라 철학을 비롯한 세속적·이성주의적 도전과, 율법주의적 교리·의식주의적 신앙 형태 – 사이에서 흔들리는 것을 염려했다. 이 둘은 서로 정반대처럼 보이나, 사실상 복음의 본질을 흐린다는 점에서 동일한 위험성을 가진다.

헬라 철학에 근간을 둔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실제 사건을 그저 “하등한 육체의 영역”에 속한 것으로 폄하하면서, 오직 영적인 것만을 추구하려고 했다. 이때 영적 계시나 천사 숭배 등을 강조하면서, 교회 안에 혼란을 일으켰다. 이러한 사람들이 말하는 ‘영지(靈知, Gnosis)’란, 오직 소수의 특수한 지식을 통해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식의 주장이었다. 이것이 바로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골로새서 2장 18절)는 바울의 경고 배경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가르치는 이들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붙들지 아니하는, 잘못된 영적 우월감이나 신비주의에 빠진 것이다.

반면, 또 다른 도전인 율법주의는 구원의 근거를 그리스도의 은혜가 아니라, 특정 의식이나 규정의 준수에 둔다. 바울은 이런 주장을 펼치는 이들을 갈라디아서에서도 비판했는데, “손할례당”이라고 칭하며, 손으로 행하는 육체적 할례가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 복음의 진리를 지켜야 함을 강조했다. 골로새서에서도 마찬가지로, 절기나 월삭, 안식일 등을 지켜야만 하나님께 의로움을 인정받는다는 식의 주장을 교회가 수용하지 않도록 경고했다. 바울은 이것을 “장래 일의 그림자”라고 부르면서, 실체는 오직 “그리스도께 속한다”(골로새서 2장 17절)고 단언한다.

결국 이 두 가지 도전은 각각 ‘세속적 이성’과 ‘율법적 의식주의’라는 형태로 교회를 흔들고 있었다. 바울은 이런 상황 속에서 “위의 것을 찾으라”고 강력히 촉구한다. 왜냐하면, 진정한 신앙의 본질은 세상의 철학적 지식이나 종교적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곧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에 뿌리를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위의 것을 찾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 그리스도”를 주목한다는 뜻이다(골로새서 3장 1절).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은 이미 죽음과 죄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과 승천을 통해 완전한 승리를 이루신 분이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이 땅에서의 삶이 아무리 힘겹고 고통스러워도, 궁극적으로 승리하신 주님과 연결된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장재형목사는 이런 바울의 가르침을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이 현실적으로 적용할 수 있도록, “영적 모드 전환의 필요성”을 거듭 강조한다.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배우면서도, 우리의 사고방식이 여전히 세상적 가치관과 습관에 갇혀 있다면, 결국 “위의 것”보다는 “땅의 것”을 더 우선시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지 말라”(골로새서 3장 2절)고 명령한다. 여기서 “생각한다”라는 동사는 단순한 지적 사유가 아니라, 관심과 애착을 어디에 두느냐는 문제와도 직결된다. 즉, 우리의 일상적 관심사가 세상의 성공이나 소유, 명예에만 쏠려 있다면, 그것은 곧 “땅의 것”만을 추구하는 모드에 머물러 있는 것이 된다.

물론 이것이 “세상에서 손을 떼라”는 식의 현실 도피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도 생업이나 일상생활을 영위하되, 그 중심에는 주님을 향한 경외와 감사가 있어야 한다고 계속 가르친다. 바울 자신도 텐트메이커로서 생계를 유지하였고, 세상을 떠나서 살지 않았다. 다만 그는 어디서든지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최우선 순위를 두었다. 땅의 것을 생각지 말라는 것은, 세상 일에 무책임하라는 뜻이 아니라, 우리가 궁극적으로 소망을 둬야 할 지점이 세상적 가치가 아닌 “위의 것”임을 기억하라는 말이다.

구체적으로 “위의 것을 찾으라”는 권면은,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 나라의 가치에 근거해 움직이도록 모드 전환을 하라는 의미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천국’ 혹은 ‘하나님 나라’의 가치란, 죄 용서와 사랑, 섬김과 겸손, 기쁨과 평안, 나눔과 희생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 바울은 이를 골로새서뿐만 아니라 여러 서신에서 반복적으로 언급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면, 우리의 가치관도 예수님을 닮아가야 한다. 신앙생활은 부활절 하루나 크리스마스 시즌에만 기뻐하는 행사가 아니라, 매일매일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삶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골로새서 3장 3절에서 그 이유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라”라고 밝힌다. 우리의 옛 사람은 이미 죽었고, 이제 신자의 진정한 생명은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 ‘감추어져 있다’는 표현은 보호와 안전, 그리고 궁극적 발견을 암시한다. 지금 당장은 세상적으로 큰 부귀를 누리지 못하더라도, 진정한 생명은 하나님 품 안에 보존되며, 종말의 때 혹은 예수님의 재림의 때에 완전히 드러난다는 의미다. 따라서 “위의 것을 찾으라”는 명령은, 단지 현세의 삶을 부정하는 태도가 아니라,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하늘의 상속을 매일 바라보고 누리라는 초대인 셈이다.

이처럼 바울의 가르침은 오늘날에도 큰 도전을 준다. 현대 사회는 눈에 보이는 업적과 소유, 지위를 지극히 강조한다. SNS에 끊임없이 자신을 과시하거나, 물질적 성공으로 모든 것이 평가되는 풍토가 만연하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조차 이런 세속적 가치관이 그대로 들어오고, 심지어 율법적 잣대와 결합해 버리면, 복음의 본질은 퇴색되고 만다. “예수를 믿으면 복을 받는다”라는 말이 자칫 “세상적인 성공을 더 쉽게 얻는다”라는 의미로 변질될 위험도 있다. 하지만 바울은, 율법주의든 세속적 철학이든, 오직 그리스도 중심의 복음과 거리가 멀면 결국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일갈한다.

그러므로 “위의 것을 찾으라 – 세속적 도전과 영적 모드 전환”은, 신자가 스스로 점검해야 할 과제를 분명히 보여준다. 우리는 주일예배나 성경 공부를 통해서는 “위의 것”을 말하지만, 실제 삶에선 여전히 “땅의 것”에 휘둘릴 때가 많다. 바울은 이 모순된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분명한 선언을 던진다.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이는 단순한 조언이 아니라 명령이며, 신자라면 반드시 따르도록 초대받은 길이다. 세속적 욕망과 율법주의 모두를 넘어서는 복음의 능력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삶의 태도를 ‘영적 모드’로 전환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전환은 교회를 통해서도 구체화된다. 교회 공동체는 신자들에게 복음적 가치와 실천을 배우고 나눌 수 있는 장을 제공한다. 장재형목사를 비롯한 여러 목회자들은, 예배와 말씀 선포, 교제와 봉사를 통해 신자들이 “위의 것”을 실제 삶에서 구현하도록 돕는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각 사람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영적 모드 전환’에 자발적으로 순종해야 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이 말씀을 붙들고, 우리의 관점과 우선순위를 하늘의 시각에 맞추어야 함을 날마다 되새겨야 한다.

따라서 세속적 도전과 율법적 도전에 대응하는 바울의 권면인 “위의 것을 찾으라”에 담긴 깊은 의미를 풀어내고, 이를 ‘영적 모드 전환’이라는 표현으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우리는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지만, 그 중심과 궁극적 목표는 하늘에 두고 살아간다. 이 역설적인 태도는,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아난 자”가 누리는 삶이다.

  •  죽었고 다시 산 생명 – 영광의 소망과 삶의 실천

바울은 골로새서 3장 3절부터 4절에 걸쳐, 신자의 존재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고 선언하고,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신자가 지닌 궁극적인 소망, 곧 영광의 도래와 부활의 완성에 관한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 교리를 상세하게 설명하기도 했는데, 바로 그 맥락에서 골로새서에서도 “죽었고 다시 산 생명”에 대한 확신이 강조된다. 이 확신이야말로 신자의 일상을 지탱해 주는 동력이 된다.

신자가 “죽었다”는 것은, 단지 옛 생활을 어느 정도 개선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는 전적인 단절을 뜻한다. 구약에서 제물은 죽임을 당해야 하나님께 드려졌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옛 사람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완전히 죽었다. 더 이상 죄의 지배를 받지 않는 새로운 존재가 되었음을 말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는 것은, 과거의 죄와 죽음의 굴레에서 해방되어, 이제부터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가리킨다. 우리의 삶은 여전히 세상 한복판에서 펼쳐지지만, 그 본질은 이미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장례식에서 종종 울려 퍼지는 찬송, “그의 죽음이 나의 부활”이라는 가사가 있다. 그것은 많은 성도가 즐겨 부르는 찬송이지만, 동시에 장례식에서 부를 때마다 우리는 “죽었다가 다시 사는” 부활 신앙을 상기하게 된다. 세상의 장례는 보통 슬픔과 이별의 분위기에 휩싸이지만, 크리스천 장례에서는 부활의 소망을 노래하기에 완전히 절망적인 분위기로만 흘러가지는 않는다. 이는 영생을 소유한 자들에게 주어진 특권이다.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한복음 11장 25~26절)고 하신 말씀대로, 신자는 육체의 죽음을 통과해도 여전히 영원한 생명 안에 거한다는 믿음을 품는다.

장재형목사는 여러 차례 설교에서 이 부활 신앙의 실제적 의미를 강조해 왔다. 신자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단순한 정신 승리나 막연한 낙관론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 부활의 보증이 된다”는 믿음에 근거한다. 또한 이 부활 신앙은 단순히 미래에만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삶을 변화시키는 강력한 동인이 된다. 이 땅에서의 삶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좀 더 담대하고 자유롭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선택할 수 있다. 설령 세상의 기준에서 손해를 보는 상황이 생기더라도, 궁극적인 상급과 영광을 바라보며 버틸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죽었고 다시 산 생명”을 소유한 자의 구체적 삶은 어떠해야 할까? 바울은 이어지는 골로새서 3장 5절 이하에서 윤리적 권면을 펼친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3장 5절). 이미 “위의 것”을 선택했으니 “땅의 것”을 버리라는 논리적 결론이다. 죽었고 다시 산 생명은, 과거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간다. 예전에는 욕망과 정욕, 소유욕에 이끌렸다면, 이제는 하늘 가치와 영원한 생명을 기준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탐심이 우상 숭배라는 말은, 우리가 세상 재물을 추구하는 마음이 결국 하나님보다 물질을 더 우선시하게 만드는 심각한 죄임을 환기한다. 실제로 현대 사회에서 우상 숭배는 더 이상 돌이나 나무 앞에 절을 하는 형태만을 말하지 않는다. 자신의 욕망과 이익을 신격화하거나, 세상의 명예와 권력을 하나님보다 더 높이는 모든 행위가 우상 숭배가 될 수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아난 자라면, 이러한 세속적 우상 숭배 형태를 과감히 떨쳐 버려야 한다고 촉구한다.

이를 위해 우리에게는 지속적인 ‘영적 경계’가 필요하다. 아무리 복음을 알고, 교회를 열심히 다닌다고 해도, 세상 속에서 수많은 유혹이 밀려온다. 때론 율법주의의 형태로, 때론 세속적 철학이나 문화적 트렌드로, 우리를 복음의 본질에서 벗어나게 만든다. 이때 “내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다시 살았다”는 의식이 우리를 붙잡아 준다. 옛 생활 방식에 매이지 않고, 새 생명에 합당한 길을 택할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

또한 바울은 골로새서 3장 4절에서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고 선언함으로써, 현재의 고난이나 불완전함을 넘어서는 ‘궁극적 완성’을 바라보게 한다. 세상에서 겪는 시험과 환난을 통해 지치고 낙심하기 쉽지만, 그리스도 안에서의 생명은 이미 하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미래를 보장받고 있다. 부활 신앙은 현재의 고통을 무시하거나 축소하라는 말이 아니라, 그 고통마저도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 안에서 해석하고 극복할 수 있게 하는 소망의 근거가 된다.

실제로 교회 역사 속에서, 수많은 성도가 이 부활 신앙과 영생의 확신을 붙들고 고난의 길을 걸어갔다. 순교를 당하거나, 혹은 극심한 가난과 핍박을 받으면서도, 그들은 “위의 것을 찾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가 다시 산 생명”이라는 자각 때문에 끝까지 믿음을 지켰다. 이를 위한 능력이 인간 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 신자가 놀랍게도 세상의 폭풍우 한가운데서도 기쁨과 담대함을 간직할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죽었고 다시 산 생명”을 지닌 신자는, 궁극적으로 “영광 중에 나타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고대하면서 현세의 삶도 충실히 살아간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겸손과 섬김, 사랑으로 이웃을 대하면서, 동시에 복음 증거와 선교 사명에 매진한다. 장재형목사는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며, 삶으로 복음을 드러내는 실천이 필요함을 거듭 역설한다. 이 세상에서 우리의 삶은 영생을 보증받은 자로서 하나님께 예배하고, 사랑을 나누며, 진리를 전하는 과정이다. 그 과정 자체가 하나님의 통치와 은혜의 도구가 된다.

또한 바울이 말하는 ‘영광의 자리’, 곧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는 사실은, 그분이 모든 권세와 능력의 절정에 계신 왕이심을 의미한다. 그 예수님과 연합된 신자는, 결국 승리의 최종 장면에 동참할 것이며, 이 사실이 바로 성도의 궁극적 소망이 된다. 따라서 이 땅에서의 고난과 수고가 결코 헛되지 않으며,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모든 것을 선하게 갚아 주신다는 믿음이 우리를 이끌어 간다.

정리하자면 “죽었고 다시 산 생명 – 영광의 소망과 삶의 실천”은, 신자의 궁극적 미래가 영광으로 마무리됨을 전제하면서, 현재의 삶에서 어떻게 그 소망을 실천해 나갈 것인가에 대한 답을 제시한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다시 살았다. 그러므로 우리 삶은 단지 세속적 욕망의 노예가 아니며, 옛 사람의 죄성에 속박당하지 않는다. 이제 우리는 탐심과 우상 숭배, 음란과 악한 정욕을 끊어내고, 오히려 사랑과 자비, 겸손과 온유, 오래 참음, 용서와 화해로 대표되는 ‘그리스도의 성품’을 입어야 한다. 이것이 부활을 소유한 자들이 세상 안에서 펼쳐야 할 윤리적 실천이며, 장차 올 영광을 앞당겨 맛보는 길이기도 하다.

또한 우리가 단지 자기 수양이나 고행의 방식으로 이 길을 가는 것은 아니다. 이미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부요함과 자유를 얻었으므로, 그 은혜에 근거해 순종하는 것이다. 어느 누가 “영생을 얻고, 구원을 받았고, 길을 찾았고, 진리를 얻었으니 주는 나의 만족이다”라고 말하면서 세상의 헛된 것들에 지나치게 마음을 빼앗기겠는가? 바로 이 은혜야말로, 세상 가치관을 뛰어넘는 영적 자유를 우리에게 허락한다.

결국 삶의 마지막 순간, 즉 장례식에 이르러서도 우리는 부활 소망을 노래할 수 있게 된다. 신자를 떠나보내는 장례식에서 예배와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모습은, 세상적인 관습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것이며, 이미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영생의 실제를 반영한다.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예수님의 선언이 그 자리에 선포될 때, 장례식은 슬픔만 있는 자리가 아닌, 참된 안식과 영광을 바라보는 자리로 변모한다.

마찬가지로, 교회 공동체나 목회 현장에서 우리는 이 ‘죽었고 다시 산 생명’의 능력을 날마다 확인하게 된다. 때로는 연약한 지체를 돕고, 낙심한 이들에게 다시 일어설 힘을 주며,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이 부활 소망이 강력히 작동한다. 장재형목사를 포함한 많은 목회자들은 이러한 부활 신앙의 실제가 교회 내에서 더 깊이 체화되도록 돕는 역할을 감당한다. 이는 단지 지식적 가르침이 아니라, 삶과 죽음의 현장 속에서 확실히 경험되는 복음의 능력을 전승하는 것이다.

곧, 우리가 이 땅에서 부유함과 가난함, 웃음과 눈물, 성공과 실패를 모두 경험할지라도,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고 다시 산 생명”을 지녔기에 결코 흔들리지 않는 정체성을 가진다. 세상은 수많은 변화와 도전으로 가득 차 있지만, 이 부활 신앙이 영혼의 닻이 되어 주고, 교회 공동체 역시 이 믿음 위에 굳건히 선다. 그리고 언젠가 주님이 영광 중에 나타나실 그날, 우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는 약속을 붙들고 오늘을 살아간다.

이것이 바울이 전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다. 죽었고 다시 산 생명, 그것이 신자의 정체성이다. 더 이상 죄의 종이나 율법의 종이 아니며, 세상 철학이나 헛된 우상에 구속되지 않는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부활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자유케 된 존재로서, “위의 것을 찾는” 방향으로 인생의 항해를 계속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세상에 속하지 않은 거룩한 가치관과 윤리를 실천하며, 궁극적으로 다가올 영광을 고대한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신자가 누리는 부활 신앙의 능력이자, 골로새서 3장에 담긴 복음의 강력한 선포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복음의 역동성을, 장재형목사를 비롯하여 여러 목회자들이 계속해서 전하고 가르치면서, 교회 공동체가 “죽었고 다시 산 생명”을 살아내도록 이끌고 있다.

결국 정리해 보면, 첫 번째 소주제에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 자의 정체성과 은혜’라는 측면을 확인했다. 두 번째 소주제에서는 그 정체성을 어떻게 ‘위의 것을 찾는’ 삶으로 구체화하는지, 세속적 도전과 율법주의를 넘어서는 영적 모드 전환에 대해 살폈다. 마지막 세 번째 소주제에서는, “죽었고 다시 산 생명”을 실제로 살아내며, 그 생명이 궁극적으로 영광 중에 나타날 것이라는 신자들의 소망과 실천을 다루었다. 이는 모두가 연결된 흐름이며, 바로 골로새서 3장의 핵심 메시지라 할 수 있다.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었으며, 이는 곧 영원한 생명과 부활의 소망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우리는 그 믿음으로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명을 감당하게 된다. 이렇게 세 가지 소주제를 관통하는 공통분모는 결국 ‘복음의 능력’이며, 그 복음 안에서 모든 것이 새로워지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소망이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장재형목사

Ⅰ.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사도 바울이 로마서 1장 16절에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라고 힘주어 선언할 때, 그는 단순히 개인적 소신을 피력하는 것이 아니라, 로마 제국이라는 웅장한 세계의 한가운데 서서도 결코 위축되지 않는 믿음의 담대한 고백을 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서신을 쓸 당시, 로마제국(Roman Empire)은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대단히 찬란한 영화와 막강한 권세를 자랑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이 거대한 세속의 힘 앞에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바울 자신이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히고 매질을 당하는 등 수많은 핍박을 감내해야 했음을 생각해 보면, 그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라고 시작하는 그 선언 한 마디가 얼마나 중요한 의지의 표명이며 신앙적 고백인지를 절감하게 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4장 13절에서,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때로는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같이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이는 그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상황을 예로 들면서, 당대의 크리스천들이 얼마나 사회적 하층민, 밑바닥 인생으로 취급되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고린도는 상업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대단히 중요한 도시였고, 로마 제국 안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하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도시에 정착해 있던 크리스천들은 사회적 권력이나 재력을 거의 가지고 있지 않았고, 따라서 사람들의 조롱과 무시, 때로는 직접적인 박해까지 받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현실 속에서도 “만물의 찌꺼기”가 된 이들이 실상은 보화를 담은 질그릇과 같고(고후 4:7), 하나님의 능력과 구원을 전하는 통로가 될 것임을 역설합니다.

로마 역시 고린도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큰 권세와 화려함을 자랑하던 제국이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흔적은 오늘날에는 이천 년 전의 유적과 부서진 잔해만으로 남아 있지만, 그 잔해를 보아도 과거에 얼마나 찬란하고 위세가 대단했는지 충분히 상상이 됩니다. 군사력과 경제력, 그리고 방대한 영토를 바탕으로 수많은 민족을 지배하고 융합해 온 로마의 한가운데서, 피가 흐르는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외친다는 것은 극도로 부끄럽거나, 세속적 관점에서 보면 어처구니없어 보일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라고 선포함으로써, 아무리 화려하고 강력한 제국이라 할지라도 결국 모든 사람은 복음의 능력으로 구원받아야 함을 강조합니다.

바울이 이토록 담대할 수 있었던 근원은 어디일까요?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났고(행 9장),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이야말로 죄인된 인간을 살리는 유일한 길임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자라고 확신했고, 또한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비록 부끄러움과 치욕스러운 순간이 있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는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고전 1:18)이기 때문입니다.

장재형(목사 역시 이 로마서 1장 16-17절에 담긴 중요한 진리를 강조해 왔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세상의 가치관, 물질적 풍요와 지적 자랑, 혹은 과학기술과 문명의 빛 아래서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는 듯한 태도를 보일 때가 종종 있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이 정말 현대인들에게도 효력이 있는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정말 믿을 만한가?”라는 세상의 질문에, 어떤 이들은 주눅 들고, 심지어 자신이 교회에 다니는 사실조차 숨기고 싶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분명히 가르쳤듯, 로마의 찬란한 문명이나 그 어떤 세속적 영광도 “복음”을 대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 시대와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 시대도 소위 ‘지혜로운 헬라인’과 같이 세련된 지적 비평을 하는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그들은 복음, 특히 십자가와 부활을 “미련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유대인의 관점에서 “나무에 달린 자는 저주받은 자”라는 전통적 사고방식이 있듯, 어떤 문화나 전통에서는 여전히 십자가의 죽음을 이해하기 어려워합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함으로써(고전 1:22-23), 자기 시대의 지배적 가치관과 철학에 구애받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복음이야말로 죄인을 구원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이라고 보았고, 어떠한 조롱과 핍박 속에서도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겠다’는 신앙적 결의를 분명히 표현했습니다.

이렇듯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라는 표현에는 단순한 자존심 이상의 신앙적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바울이 서슬 퍼런 로마와 철학적 자부심이 강한 헬라인들, 그리고 전통에 얽매여 있는 유대인들을 향해 동일하게 외친 이 메시지는 오늘날에도 유효합니다. 현대인도 재물, 학문, 권력, 혹은 문화적 자랑을 앞세우지만, 그 어떤 것도 인간을 근본적으로 구원할 수 없는 한계를 지닙니다.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이 세상이 영적 익사 직전이라면, 우리가 내민 “복음”이라는 동아줄만이 그들을 살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확신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장재형목사 역시 여러 설교와 저술에서, 교회가 이 포스트모던 시대 속에서도 복음을 결코 부끄러워하지 말고 담대히 전해야 함을 누차 강조해 왔습니다.

바울은 왜 이렇게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말을 먼저 꺼냈을까요? 그것은 로마와 같은 대제국 한복판에서도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는 사실을 선포하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의 눈에는 보잘것없는 십자가 사건이지만, 거기에 담긴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인류 전체의 운명을 바꿀 만한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가 봤을 때 로마도, 헬라의 지혜도, 유대인의 전통도 이 복음을 통한 구원 없이는 심판을 면할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랑해야 할 것이요, 결코 감추어 둘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교회 역사상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담대히 외쳤던 인물들은 시대적 상황을 넘어 역사의 전환점을 만들어 내곤 했습니다. 초대교회 순교자들은 복음을 위해 순교하면서도 자랑스럽게 믿음을 지켰고, 종교개혁가들은 중세의 거대한 제도권에 맞서 복음의 진리를 외치며 새로운 시대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현대의 많은 선교사들 역시 어려운 현장 속에서 십자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전하며 수많은 영혼을 주께 돌아오게 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라는 바울의 시작은, 오늘날 우리 각 사람에게도 강력한 도전이 됩니다.

물론 우리도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세상의 학문, 문화, 예술, 기술 등에 관심을 가질 수 있으며, 그것들 가운데 선한 것은 적극적으로 수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인간 구원”에 있어서는 결코 복음을 대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바로 이 구원 문제, 영혼의 생명과 직결된 문제를 로마서 서두에서부터 강조하고 있습니다. 어떤 인간적 방법이나 자랑, 세상의 지혜와 지식으로는 결단코 이룰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 오직 복음에 달려 있다는 점을 도무지 감출 수 없었던 것입니다.

특히나 오늘날은 과학과 의학, 그리고 다양한 형식의 ‘지식’이 풍성한 시대입니다.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급속도로 발전한 현대 문명은 인간에게 전에 없이 편리하고 빠른 생활 양식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내면의 공허함, 죄의식, 그리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물질적으로 풍성해질수록, 또 정신적으로 복잡해질수록 영혼의 근본적 문제는 더욱 도드라지기도 합니다. ‘왜 살아야 하는가’, ‘죽음 이후에는 무엇이 있는가’,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같은 궁극적 물음들은 아무리 의학이 발달해도, 기술이 진보해도, 인간의 죄성과 한계를 제거하지 못하는 한 해결되기 어렵습니다.

이러한 시대의 상황을 볼 때, 바울이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라고 말한 핵심은 더욱 빛을 발합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은 복음을 미련한 것으로 여기거나, 시대착오적이고 학문적이지 못하다고 평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의 눈에는 이 복음이야말로 궁극적 지혜이며, 무너져가는 인류가 붙들고 살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던 것입니다. 장재형목사 또한 여러 차례 설교와 저서에서, 현대의 최첨단 기술이 죄인 된 인간의 구원을 이루거나 영혼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치유해 줄 수 없음을 역설해 왔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복음을 선포하는 일에 주저하거나 부끄러워한다면, 그것은 세상에 가장 절박한 해답을 등지고 숨기는 것과 다름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예로 들며 “너희가 만물의 찌꺼기”라고 했듯, 오늘날 교회가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는 연약해 보이고 별 힘이 없어 보일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현실적 영향력이 적다고 여겨지기도 하고, 각종 비난에 시달릴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현실 속에서도 교회가 결코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근본은 “복음”입니다. 복음을 지키고 살아내며 담대히 전하는 것이 성도의 가장 중요한 사명입니다. 왜냐하면 복음 외에는 구원이 없고, 복음 외에는 인간 실존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만한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를 잊지 않을 때, 교회는 비로소 교회로서의 본질을 드러낼 수 있고, 성도는 세상의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치 있는 진리를 붙들게 됩니다.

바울은 로마서 1장 16절을 “왜냐하면(For)”이라는 접속사로 시작하는데, “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가?”를 설명하는 논리적 근거가 바로 뒤이어 제시됩니다. 즉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는 진술이 그것입니다. 복음이야말로 세상을 바꾸는 힘이고, 죄 가운데 죽어가는 인류를 살리는 길이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바울은 결코 복음을 부끄러워하거나 숨기려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구분 없이, 모든 이에게 임하는 구원의 소식이기에 바울은 온 세상을 향해 이 소식을 전하고자 헌신했습니다. 그리고 이 땅의 크리스천들은 오늘날에도 바울의 이 태도를 본받아 세상이 아무리 찬란해 보여도, “결국은 복음이 아니면 안 된다”는 사실을 되새겨야 합니다.

바울의 이 선언은 이천 년 전에만 국한된 옛 문서가 아닙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우리가 오늘날 읽어도 여전히 생생한 메시지로 다가옵니다. 문화와 학문이 아무리 발전해도 죄의 문제는 인간 스스로 해결할 수 없고, 죽음의 공포는 진화론적 설명이나 의학적 기술만으로는 근본적 해소가 불가능합니다.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과의 단절에서 비롯된 허무와 죄의식으로 인해 방황하며, 그것을 해결해 줄 유일한 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바울과 같은 자세로, 이 세상 한가운데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라고 선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첫 번째 소주제에서 우리가 함께 붙들어야 할 핵심 메시지입니다.

Ⅱ.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구원의 능력

바울은 이어서 로마서 1장 16절 하반절에서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고 선언합니다. 복음이 단지 ‘좋은 이야기’나 ‘감동적인 스토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죄인을 구원하는 능력(Power)이라는 것이죠.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학문이나 철학, 혹은 제도나 정치권력도 하지 못하는 일을 이 복음이 해낸다는 확고한 믿음을 바울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강력하게 강조하는 배경에는, 당시 로마 사회가 지닌 지적·문화적 자부심과 더불어, 여전히 많은 이방 신들을 숭배하는 다신교적 환경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환경을 두려워하거나 기죽지 않았습니다. “로마를 포함해 온 세상이 죄로 인해 멸망의 길을 가고 있지만, 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진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구원(Salvation)은 단순히 “지옥에 안 가고 천국에 간다”는 차원에 그치지 않습니다. 구원은 인간의 전 존재가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새롭게 재창조되는 사건입니다. 죄와 단절, 죽음과 단절, 그리고 사탄의 종노릇으로부터의 해방이 포함되며,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서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이 구원이야말로 인류가 간절히 필요로 하던 것이며, “복음”만이 가져다줄 수 있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특히 바울은 이 구원의 은총이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라고 밝힙니다. 그는 유대인 출신으로서 메시아를 기다려온 역사를 알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대 땅에 오셨으며, 구원의 언약 역시 이스라엘을 통해 계시되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에게 먼저 복음이 전파되는 것은 당연한 순서였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지경은 거기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헬라인, 곧 이방인들에게도 동일하게 구원의 문이 열려 있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복음이 결코 특정 민족이나 문화권에 국한되지 않는 보편적 복음임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미 구약성경에서도 여러 차례 암시되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완전히 열리게 된 새 시대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장재형목사 역시 이 부분을 해석하며, 구원은 모든 인류에게 열려 있는 복음이라는 점을 자주 설파해 왔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죄인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셨고, 복음을 접하는 누구든지 믿음으로 응답하면 구원의 혜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는 문화, 인종, 사회적 지위, 지적 수준을 가리지 않고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초대교회의 성장 과정에서 우리는 실제로 각 지역과 계층을 초월하여 복음이 증거되고, 다양한 이방 지역에도 교회가 세워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런 역사는 복음이 가진 능력이 세속의 장벽들을 뛰어넘는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이 어떠한 방식으로 “능력”을 발휘할까요?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18절에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나,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구원의 능력”은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에게 나타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와 대속의 죽음, 그리고 부활이야말로 죄 아래 있던 인간을 살리는 핵심이요, 능력의 통로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였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추구하였지만, 결국 바울은 그들에게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세상의 기대와는 정반대되는 방식으로 역사에介入(개입)하신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전한 것입니다. 인간의 잣대로 보면, 권력과 기적, 혹은 철학적 지혜와 탁월한 사유가 구원을 가져다줄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자기 비하와 희생으로서의 십자가 사건이 가장 강력한 구원의 길이었습니다. 이는 우리로서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지혜”이며 동시에 “능력”입니다.

바울은 이 구원 사건을 자신의 삶으로 체험했습니다. 그는 본래 열렬한 유대교 전통 수호자였고,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데 앞장섰던 사람이었습니다(행 8-9장).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후, 그는 완전히 다른 인생관과 세계관으로 전환되었고, 심지어 자신이 그토록 박해하던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한 인간의 삶이 180도 바뀌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바울은 “복음의 능력”을 통해 그렇게 변화되었고, 더 나아가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부름받아 세상 곳곳에 교회를 세우는 일에 헌신하게 됩니다. 이렇듯 복음은 단순히 한두 사람의 인생을 바꿀 뿐 아니라, 공동체와 역사 전체를 바꿀 수 있는 원동력이 됩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복음의 능력은 유효합니다. 어느 시대나 인간의 죄성은 변하지 않고, 죽음과 심판의 문제가 우리 앞에 실재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과학기술이 발전하고, 사회문화가 다원화되었다고 해도 인간 내면의 공허와 죄책, 악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문명이 발달할수록 죄의 형태가 교묘해지고 구조적 악이 복잡해지는 면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희생과 부활 사건은, 사람들의 죄를 씻고 관계를 회복시키며, 심지어 공동체와 문화를 새롭게 창조하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표현할 때, 여기에는 영적인 면뿐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을 포괄하는 회복의 이미지가 담겨 있습니다. 인간이 근본적으로 타락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분리되어 있었기 때문에 영혼은 병들고, 그 결과로 도덕적·윤리적 혼란, 사회적 갈등, 죽음에 대한 두려움 등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사람을 새로 태어나게 하고, 자범죄뿐 아니라 원죄의 사슬도 끊어내어 새 삶을 살 수 있게 하며,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게 해 줍니다. 그런 맥락에서 “구원”이 단지 ‘내세적 보장’만을 뜻하지 않고, 이 땅에서의 삶 전체를 변화시키는 능력을 포함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바울은 “이 복음”이 모든 사람에게 자동적으로 효력이 생긴다고 주장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모든 믿는 자에게”라고 전제 조건을 달았습니다. 믿음으로 화답할 때에야 비로소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이 되어 구원을 가져옵니다. 즉, 인간 편에서 요구되는 것은 “믿음”입니다. 우리가 십자가 사건과 부활을 단지 지식으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믿고 받아들일 때, 그리스도의 공로가 나를 위한 대속임을 인정할 때, 비로소 그 구원의 능력이 우리 안에 실제로 적용됩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며, 바울이 말한 복음의 능력의 작동 원리입니다.

장재형목사 역시 여러 설교에서, 믿음이란 “선물을 받는 손과 같은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미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의 길을 준비해 두셨으나, 그것을 나의 삶에 적용하고 내 것으로 삼으려면, 내가 그 선물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행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선물을 주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받지 않거나 의심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겠지요.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열심히 복음을 전해도, 그것을 사람들이 믿음으로 영접하지 않으면 그들에게는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받는 순간, 구원이라는 선물이 내 것이 되어, 나를 새롭게 만들고 영원한 생명을 부여하게 됩니다.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라는 말은, 구원이 특정한 민족적·문화적 장벽을 초월하여 이방인들에게도 동일한 은혜로 주어진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초대교회 시대를 돌아보면, 사마리아인, 로마 군인, 에티오피아 내시, 헬라 철학자 등 다양한 계층과 민족이 복음을 믿고 구원받았습니다(행 8장, 10장, 17장 등).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차별”이 아니라 “보편성”으로 나타납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의 힘이고, 이 힘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바울이 “어리석은 것”처럼 보이는 십자가와 복음을 끝까지 붙들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 “구원의 능력”을 자기도 몸소 체험했고, 타인들에게서도 반복적으로 확인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죄인들이 회개하고 변하여 거룩한 삶을 살게 되며, 원수 같던 이들이 사랑으로 서로 용납하고 교회 공동체를 이루고, 세상적 기준으로는 도무지 화합될 수 없는 다양성이 복음 안에서 하나가 되는 모습을 그는 직접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로마가 거대해 보이고, 헬라 철학이 뛰어나 보이며, 유대 종교가 율법을 자랑한다 해도, 이보다 더 뛰어난 하나님의 능력, 곧 복음을 통해 나타나는 구원 역사를 전하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때로는 교회 현실이 세상으로부터 비난받는 모습을 접할 때 낙심하거나 복음을 부끄러워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살던 시대를 기억해야 합니다. 당시 크리스천들은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큰 박해와 조롱 속에서도 복음을 붙들었습니다. 그리고 역사상 그 어느 시대에도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복음이 퍼져나갔고, 교회가 뿌리내리고 확장되었습니다. 복음은 고난을 뚫고 역사를 바꾸는 능력입니다. 우리 역시 이 믿음을 지킬 때, 세상이 아무리 부정적으로 말해도, 또 과학기술이 발전해도, 인간을 근본적으로 구원하고 치유하는 길이 오직 복음에 있음을 선포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는 바울의 선언이 오늘날에도 힘있게 작동하게 될 것입니다.

Ⅲ. 하나님의 의와 의인의 삶: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제 바울은 로마서 1장 17절에서 더욱 핵심적인 결론을 제시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 구절은 종교개혁의 핵심적 모토가 되었고, 기독교 구원론의 정수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바울은 복음 안에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 of God)”가 나타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의가 죄인 된 인간을 의롭게 만들며, 그 과정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고 강조합니다.

우리가 “의(義)”라고 할 때, 흔히 ‘옳고 그름의 기준’ 정도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의는 훨씬 더 깊은 구원론적 의미를 함축합니다. 인간은 율법 앞에서 모두 죄인임이 드러났고, 율법이 요구하는 완전한 의를 스스로 이룰 수 없어 모두 정죄 아래 놓여 있습니다(롬 3:10 이하).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게 하심으로, 죄인인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는 길을 여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의는 인간의 행위로 도달할 수 없는 차원을 초월해서, 오직 하나님의 구속적 사랑과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전가(Imputation)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 10절에서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다”고 했습니다. 율법이 죄를 깨닫게 해 주기는 하지만, 인간 스스로 죄에서 벗어나는 길을 제시하지는 못합니다. 오히려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죄인의 실존을 더 분명히 보여 줄 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율법을 지킴으로 의로워지려는 시도가 얼마나 무력한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의만이 죄인을 살릴 수 있음을 역설합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는 말의 요지입니다.

장재형목사도 여러 차례의 설교에서, 복음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심으로써 인간에게 선물하신 의”라고 강조했습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다는 로마서 5장 8절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 편에서 전적으로 이루신 이 구속 행위가 얼마나 ‘하나님의 의’로서 완전한지를 설명하곤 합니다. 그리고 이 의가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곧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으로만 수용된다는 것이 신약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구약의 하박국 2장 4절을 인용합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박국 선지자가 바벨론 제국의 침략 위협 속에서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엄중한 묵시를 받았던 것처럼, 이제 바울은 죄와 죽음의 권세가 왕노릇하는 이 세상에서도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진리를 선포합니다. 그것은 바벨론이 망할 운명에 놓여 있던 것처럼, 로마 제국 역시 영원하지 않으며,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전제에서 출발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강성해 보이거나 죄가 관영해 보여도,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의인”은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선언은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크게 깨닫고 외쳤던 구절이기도 합니다. 루터는 중세 교회의 면죄부 판매와 같은 타락한 관행 속에서, 인간이 스스로의 선행이나 공로로 구원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 가르침에 맞서 싸웠습니다. 그는 로마서 1장 17절과 갈라디아서를 읽고 연구하면서,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라는 종교개혁의 기치를 내걸었습니다. 인간의 공로나 제도로는 결코 구원이 이뤄지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신 의를 믿음으로 받을 때 의로워지고, 그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이는 현대 교회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우리 시대에도 어떤 사람들은 “착하게 살면 구원받지 않겠느냐”고 말하고, 어떤 사람들은 “종교적 의식이나 헌금 같은 봉사로 의를 쌓아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의인은 율법이나 인간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간다고 말입니다. 여기서 “살리라”는 말은 단지 물리적 생존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샬롬을 누리며, 최종적으로는 천국의 영광에 이르는 삶을 뜻합니다. 이것이야말로 복음 안에서 “의롭게 된 자”가 누리는 특권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라는 구절도 주목할 만합니다. 이는 믿음의 기초가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달려 있으며, 인간은 그 은혜에 대해 계속해서 “믿음으로” 응답하고 순종해 나가야 함을 시사합니다. 신앙생활은 어떤 한 번의 결정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처음 믿을 때부터 죽을 때까지, 믿음 위에 또 믿음을 더해 가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죄가 우리의 삶에 여전히 도전해 올 때도 있지만, 의롭게 된 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의”를 붙들고 다시 회개하며 믿음으로 전진해 나갑니다.

또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선언은 기독교 윤리의 기초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며, 우리의 자격이나 공로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겸손과 감사, 그리고 사랑의 실천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만약 인간이 스스로 선해지고 의를 이루어 구원받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공로를 자랑하며, 다른 이들을 멸시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복음은 “너희가 아무것도 아닌데, 은혜로 구원받았다”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는 누군가를 정죄하거나 차별하기보다, 오히려 은혜에 감사하며 자기 자신처럼 죄인인 이웃을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장재형목사도 이 대목에서, 교회 안에 때로는 율법적 사고가 침투하여 성도들이 서로의 행위를 평가하고 정죄하는 문제를 지적하곤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의롭게 된 자들인데, 어찌하여 서로를 함부로 정죄하고 율법의 잣대로 남을 재단하느냐”는 반문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을 붙들면, 우리는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님이 행하신 대속’과 ‘그 대속을 믿는 믿음’으로 인해 의로워졌음을 재확인하게 됩니다. 이것이 곧 오늘날 교회와 성도가 지켜야 할 핵심 진리입니다.

결국 바울이 강조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인간의 의로움은 나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해 주어지는 전적인 선물입니다. 그 선물을 내 것으로 받는 과정이 믿음이며, 그렇게 의롭다 함을 얻은 사람들은 계속해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말은, 동시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간다”는 말과 같은 맥락입니다. 구원은 단회적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믿음으로 사는 삶 전체를 통해 지속적으로 확인되고 성장해 나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의”는 또한 하나님 편의 신실하심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로마서 전체 문맥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약속하신 메시아, 곧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 그 약속을 지키셨고, 이방인과 유대인 모두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심으로써 “하나님이 의로우시다”는 사실을 드러내신다고 주장합니다. 즉, “하나님의 의”는 인간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로움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 약속에 충실하신 하나님의 성품, 신실하심을 포괄합니다. 그 신실하신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십자가에서 죄값을 치르신 것이야말로, 우리로서는 헤아리기 어려운 은혜입니다.

우리는 이 은혜 안에서 삽니다. 그리고 오직 믿음으로만 그 은혜에 참여합니다. 바울은 이 로마서 1장 17절을 서론으로 삼아, 뒤이어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심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 그리고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교리를 본격적으로 풀어 나갑니다. 전통적으로 로마서는 기독교 교리의 정수로 불리며, 수많은 신학자와 목회자, 그리고 성도들에게 영적 · 지적 영감을 주었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이 대원칙을 이해하는 것은, 사실상 신앙의 문을 열어 젖히는 열쇠와 같습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이 말씀은 결코 머리로만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는 차원이 아닙니다. 바울이 담대히 로마 제국을 향해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라고 외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바로 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진리”에 대한 철저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가 복음을 통해 경험한 용서와 은혜, 그리고 능력은 추상적인 교리가 아니었습니다.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는 실제적 체험이었고, 그 체험이 로마 제국의 위세를 두려워하지 않도록, 세상 그 무엇도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자각하게 만든 것이었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로마서 1장 16-17절이 가지고 있는 종교개혁적 의미와, 동시에 현대 교회가 회복해야 할 신앙의 본질을 자주 강조합니다. “오직 믿음으로”라는 선언은, 우리가 받은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에 전적으로 의존한다는 데서 나오는 겸손과 감사, 그리고 그분의 사랑에 기꺼이 헌신하는 열매로 이어져야 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의 삶은 세상이 줄 수 없는 자유와 기쁨, 그리고 당당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죄인에서 의인으로 바뀐 사람은 이미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큰 은혜를 체험한 증거가 되며, 그 결과 세상 앞에서 부끄럼 없이 복음을 전하고, 믿음으로 행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게 됩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바벨론이 침략해 온다 해도, 로마 제국이 강력하게 박해한다 해도, 그리고 오늘날 온갖 혼란과 죄가 관영해도,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삽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궁극적 해답입니다. 그리고 이 답은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믿음의 근거가 우리 자신의 결단이나 능력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의”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우리를 의롭게 하고, 그 의로움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살리며, 영원한 생명을 향해 인도합니다. 이것이 바울이 로마서 전체에서 힘주어 가르치려는 복음의 핵심이며, 모든 교회와 성도가 붙들어야 할 가장 중요한 기둥입니다.

결국 로마서 1장 16-17절에 담긴 메시지는 세 가지 핵심 포인트로 요약됩니다. 첫째,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라는 바울의 고백을 통해, 우리도 어떠한 세상적 압박 속에서도 복음이야말로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믿고 담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에, 다른 어떤 것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인간의 죄와 죽음, 영원 문제를 오직 복음이 해결함을 믿고, 교회가 이를 선포하는 일에 최우선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셋째, 복음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가 믿음을 통해 우리에게 전가되므로, 우리가 의롭게 되고 영생에 참여한다는 진리입니다. 그래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하박국 선지자의 예언이 오늘날에도 그대로 실현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로마서 1장 16-17절은 복음의 본질과 능력, 그리고 믿음을 통해 의로워지는 구원론의 핵심을 간략하면서도 강력하게 압축해 놓았습니다. 종교개혁자 루터의 간증처럼, 이 말씀을 깨달은 순간 “마치 천국의 문이 활짝 열리는 것을 보았다”는 고백이 나올 정도로, 영적 깨달음의 불꽃이 반짝이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말씀을 붙들고,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교회와 성도가 될 때, 세상은 비로소 진정한 구원의 길이 어디에 있는지 목도하게 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이 말씀은 단순히 개인 구원의 문제를 넘어, 교회와 역사를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교회는 이 진리를 붙들 때마다 갱신되고 개혁되었습니다. 바울이 로마 제국 속에서, 루터가 중세 타락한 종교 제도 속에서,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세속 문화의 도전 가운데서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붙드는 한 가지, 그것이 바로 복음이며, 십자가와 부활로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장재형목사가 여러 강의와 문헌에서 거듭 상기시키듯, 이 복음 앞에 우리가 설 때 비로소 교회는 생명력을 회복하고, 세상을 향한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꺼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담대히 전하며, 믿음으로 의에 이르고, 그 의를 따라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 나라의 귀한 열매가 이 땅에서 맺히게 될 것입니다.

로마서 1장 16-17절의 풍성한 내용을 다 담아내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핵심은 분명합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 그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를 구원한다는 것, 그리고 그 구원이 믿음으로 인해 우리에게 실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의로워진 자는 결코 율법적 공로나 세상의 자랑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을 힘입어 살아가는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이것이 로마서 1장 16-17절이 주는 궁극적인 메시지이며, 교회가 대대로 붙들어온 진리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날마다 기억합시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리고 그 믿음은 십자가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신뢰하고 감사로 받는 행위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영원한 소망과 생명이 있습니다. 그 어떤 인간의 사상도, 제국의 권력도, 시대의 조류도 대체할 수 없는 이 복음 앞에서,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당히 서는 것이 바로 오늘을 사는 크리스천의 특권이자 사명입니다.

에베소서의 전신갑주 – 장재형목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진리
장재형(장다윗) 목사는 복음의 핵심이 예수 그리스도임을 늘 강조해 왔다. 예수 그리스도가 곧 진리 자체이며, 우리가 붙들어야 할 생명의 근원이기에, 진리에 대한 믿음은 그리스도인이 전신갑주를 준비하는 첫걸음이라 역설한다. 에베소서 6장 후반부에 “전신갑주”가 소개되는데, 그중 첫 번째인 “진리의 띠”를 언급하면서 그는 “진리는예수 그리스도 그분이기에, 우리가 영적 전투에서 흔들리지 않을 가장 근본적인 토대”라고 설명한다. 다른 무장을 아무리 잘해도 진리를 놓치면 중심이 무너져 버리므로, 진리 없이는 우리의 신앙이 온전히 선 자리에 있을 수없음을 시사한다.

장재형 목사는 복음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을 가리키며, 여기에 대한 흔들림 없는 확신이 신앙의 근간을 세우는 동력이라고 강조한다. 에베소서가 언급하는 “전신갑주”는 겉모습만을 장식하는 무장이 아니라, 마음과 생각을 단단히 지키기 위한 영적 무장이다. 그는 “진리의 띠”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 정의하며, “항상 진리를 몸에 지니고 있는 상태가 곧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출발”이라고 가르친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복음은 구약과 신약을 묶는 열쇠이 된다. 장재형 목사는 구약과 신약의 통일성, 곧 성경 전체가 말하는 구원의 계획을 중시한다. 이는 구약에서 예언된 하나님의 구원이 신약에 이르러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완성된 복음을 끊임없이 ‘되새김질’하며 묵상하고 소화해, 우리의 삶에 체화시키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고 그는 역설한다. “소가 위가 여러 개 있어 되새김질하듯이, 말씀도 계속반복해 묵상해야 진리가 우리 삶에 스며들고, 실제로 행동에까지 이어진다”는 비유 역시 그가 자주 들려주는 말이다.

장재형 목사는 말씀을 듣고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해 일회성으로 흘려버리는 태도를 경계한다. 진리를 끊임없이받아들이고 되새김질하여, 지식이 아니라 삶으로 구현하는 과정이 신앙의 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어느한순간에 완성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게 부지런히 말씀을 소화할 때, 우리의 사고와 언행이 서서히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반영하게 되며,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게 된다.

그는 또한 진리를 붙드는 이가 사탄의 유혹 앞에서도 견고하다고 말한다. 사탄의 공격 방식은 결국 거짓과 의심을부추겨, 우리의 믿음의 뿌리를 흔들어 놓는 것이다. “네가 정말 하나님의 자녀가 맞느냐?”라는 정체성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통해 흔들어 대는 것이 가장 치명적이라는 설명이다. 예수님조차 광야에서 3대 시험을 받으셨을 때, 마귀는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이라는 문구로 시작하지 않았던가. 여기서 예수님이 “기록되었으되”로 맞서 싸우신 것처럼, 우리 역시 ‘기록된 말씀’에 대한 확고한 신뢰가 필요하다고 장재형 목사는 힘주어 말한다.

그렇다면 실제로 진리를 붙드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는 세 가지 정도를 제시한다. 첫째, 말씀을 늘 곁에 두고 깊이묵상하며, 그 말씀이 삶을 지배하도록 해야 한다. 둘째, 교회 공동체에서 서로 말씀을 공부하고 가르치며, 구체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야 한다. 셋째, 듣고 배운 말씀대로 살고자 몸부림칠 때, 비로소 진리가 우리 안에서 작동한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진리는 머리로 아는 지식이 아니라, 삶과 행동으로 드러나는복음의 힘이기 때문이다.

장재형 목사는 초대교회의 순교자들을 자주 예화로 든다. “복음 안에 담긴 진리를 지키기 위해 많은 이들이 목숨을 걸었으며, 그 진리가 결국 교회를 살아 있게 했다”는 것이다. 이렇듯 복음이 갖는 진리의 절대성은 흐릿하게 타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진리 위에 교회가 서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이 진리의 핵심이기에, 어느 누구도 이기둥을 흔들 수 없다.

결국 에베소서 6장에 나온 전신갑주 중 첫 번째 무장인 “진리의 띠”는 영적 전투의 기초다. 군인이 벨트를 하지 않으면 무장 전체가 흐트러지듯, 진리를 놓치면 다른 모든 것도 무력해지기 마련이다. 장재형 목사는 “복음의 진리를 확고히 붙들고 있을 때,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경험하며, 하나님 나라를 향한 올바른 열정을 품게 된다”고 강조한다.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는 소망
장재형 목사는 “의의 흉배”를 하나님 나라에 대한 뜨거운 열정으로 해설한다. 흉배가 심장을 보호하듯, 우리의 내면과 마음을 굳세게 지키는 힘은 하나님 나라를 향한 간절함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이요”라고 하신 말씀처럼, 하나님의 공의와 다스림을 갈망하는 이들은사탄의 공격 앞에서도 중심을 쉽게 잃지 않는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할까? 장재형 목사는 하나님 나라가 종말적 의미와 동시에 현재적의미를 함께 지닌다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될 ‘미래적 하나님 나라’와, 지금 이 순간에도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게 이미 임해 있는 ‘현재적 하나님 나라’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예로 들며, 과거와 미래만이 아니라 현재에도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됨을 잊지 말라고 당부한다.

그러나 우리가 처한 현실은 “이미와 아직 사이”라고 그는 설명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받았으나, 완전한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온전한 실현은 아직 미래에 속해 있다는 것이다. 이 사이에 놓인 우리는 소망으로 하나님 나라를 바라고, 현재의 삶에서도 그 통치를 경험하기 위해 분투한다. 장재형 목사는 이런 소망이 사탄의 주된공격 목표가 된다고 강조한다. 즉, ‘내일이 없고, 너희가 가는 길은 허망하며, 하나님의 계획 따위는 없다’는 의심을 심어 절망하게 만드는 것이 사탄의 수법이다.

그는 바로 이 점에서 “구원의 투구”가 소망과 연결되어 있다고 말한다. 머리가 상징하는 ‘생각’이 하나님 나라에대한 소망으로 가득 차 있지 않으면, 사탄은 얼마든지 절망과 낙심의 불화살로 관통해 들어올 수 있기 때문이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을 예로 들어, 그들이 광야에서 자꾸만 애굽을 그리워하고 불신과 불평에 사로잡히자 길이 험난해졌음을 지적한다. 반대로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언약을 붙들었을 때,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기적적인 보호와 인도가 이어졌다.

장재형 목사는 소망을 붙드는 실천 방법을 세 가지로 요약한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영원한 통치에 대한 약속을 성경에서 계속 상고하고 상기해야 한다. 둘째, 우리의 일상 속에서 말씀에 순종하고 성령의 인도를 경험함으로써, ‘하나님의 다스림이 실제로 임하는 것’을 체득해야 한다. 셋째,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선배들의 간증과역사 속의 하나님의 일하심을 확인하며 서로 격려하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 우리의 소망은 공고해지며, 사탄이아무리 ‘네 미래는 없다’고 부추겨도 쉽게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

또한 그는 “평안의 신발”이 곧 복음 전파의 열정이라고 말한다. 복음은 갈등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평화를 가져다주는 힘이며, 이를 위해 평화롭게 전하는 복음의 사역은 세상의 벽을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킨다는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온유함, 겸손, 사랑을 기반으로 하는 복음 전파야말로, 사탄이 가장 꺼려하는 일이라고역설한다. 결국 복음은 진정한 평화의 메시지이며, 이 평화의 길을 열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이는 이들을 사탄은쉽사리 무너뜨리지 못한다.

나아가 로마서 14장 17절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의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는 구절을 빗대어, 장재형 목사는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소망이 있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낙담하지 않고 기쁨의 노래를 부를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는 이를 이스라엘의 가나안 입성과 비교하며, 아무리 광야가 길고 험해도, 결국 약속의 땅에 대한 소망을 포기하지 않았기에 약속의 성취를 경험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현대의 교회가 이 역사를 기억한다면, 지금 아무리 사회가 어둡게 보여도 결코 절망하지 않고 계속 전진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믿음의 방패와 시험의 문제
에베소서 6장 16절이 말하는 “믿음의 방패”에 대해, 장재형 목사는 이것이 온갖 ‘불화살’로부터 우리를 보호한다고 해석한다. 사탄이 쏘아 대는 불화살은 여러 형태를 띠는데, 의심, 유혹, 정체성 혼란, 절망, 인간관계 갈등 등 다양하지만, 그 목적은 궁극적으로 우리의 ‘믿음’을 흔들어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내려놓게 하는 것이다.

그에게 따르면 믿음의 반대말은 불신이라기보다, 의심과 거짓에 쉽게 흔들리는 상태다. 아담과 하와가 사탄의 거짓말에 속아 “정말 하나님이 선하시다면 왜 이 열매를 못 먹게 하셨을까?” 하는 의심으로 미끄러졌을 때, 결국은죄를 범하고 말았다. 마찬가지로 현대 사회에서도 사탄은 끊임없이 ‘하나님이 너를 진짜 사랑하실까?’ ‘정말 네가하나님의 자녀일까?’라는 질문으로 우리를 시험에 빠뜨리려 한다.

이런 의심에 맞서는 무기는 무엇일까? 장재형 목사는 첫째로 “기록되었으되”라는 말씀의 확실성이라고 말한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받으실 때마다 “기록되었으되”로 대적하셨듯이, 기록된 말씀에 대한 견고한 신뢰가 의심과 거짓을 물리칠 핵심 무기라는 것이다. 둘째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에 대한 확신이다. 예수님이받으셨던 시험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으로 시작되었듯이, 사탄은 우리의 정체성을 흔들려 할 때 가장강력한 공격을 가한다. 그러나 우리가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이 확실하면, 사탄은 쉽사리 그 틈을 비집고들어오지 못한다.

장재형 목사는 시험이 오히려 믿음이 자라는 과정이 될 수 있다고 덧붙인다. 삶에 찾아오는 여러 가지 유혹이나어려움은, 우리가 더 깊은 기도와 말씀이 필요함을 깨닫게 만든다. 그가 예시로 드는 것이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다. 다윗은 “전쟁은 하나님께 속했다”는 믿음을 굳게 품고 있었기에, 골리앗이라는 거대 적 앞에서도 흔들림 없이 물맷돌 하나로 승리했다. 사탄은 우리의 시선을 골리앗의 거대함에만 고정시키려 하지만,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바라보기에 두려움이 사라진다.

그러나 이 믿음은 저절로 자라지 않는다. 장재형 목사는 자신이 걸어온 신앙 여정에서, 처음에는 작은 일에도 불안했지만, 점차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며 체험이 쌓이자, 이전에는 감당하기 어려웠던 문제도 더는 크게 보이지 않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이는 믿음이 말씀과 기도,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의 나눔과 격려를 통해 자라난다는 사실을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시험의 시기일수록 공동체가 중요하다고도 말한다. 혼자 고립되어 있으면 불화살을 감당하기가 더 어렵기때문이다. 서로 믿음을 확인하고,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진리를 상호 확인하며 기도해 줄 때, 믿음의 방패가 더욱 견고해진다. 믿음이 강해질수록, 우리는 후퇴가 아니라 적극적인 전진도 가능하게 된다. 전쟁에서 방패는단지 막기만 하는 수단이 아니라, 전열을 안전하게 이동시켜 적진으로 들어가게 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믿음이 있으면 사탄의 화살을 피하는 것을 넘어서, 복음 전파와 교회 확장을 위한 주도적 행보도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성령의 검과 전신갑주에 관한 실천
마지막으로 에베소서 6장에 언급된 무장 중 하나인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장재형 목사는 특별히강조한다. 앞선 무장들이 주로 방어적 역할을 한다면, 성령의 검은 영적 전쟁에서 적을 능동적으로 무너뜨리는 공격 무기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검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성령의 조명 아래 상황에 맞게 선포되고 적용될 때에야 비로소 예리하게 작동한다.

그는 이 성령의 검을 제대로 휘두르려면 세 가지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첫째,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해야 한다. 말씀을 매일 묵상하고 읽다 보면, 성령께서 때마다 특정 구절을 떠올리게 하시거나 우리의 마음을 찌르시는데, 그때 곧바로 순종하며 말씀을 실행할 때 검이 살아 움직인다는 것이다. 둘째, ‘사랑’이 동기가 되어야 한다. 말씀을잘못 적용하면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상처 주는 칼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이 보여주신 사랑을 근거로 말씀을적용하면, 이는 상한 마음을 치유하고 회개로 이끄는 ‘생명의 칼’이 된다. 셋째, 기도와 훈련을 통해 말씀을 익혀야 한다. 군인이 아무리 좋은 검을 들고 있어도 다룰 줄 모르면 소용없듯이, 우리도 말씀을 연구하고 공동체에서나누며 기도로 준비할 때, 검의 효과가 더 커진다.

장재형 목사는 히브리서 4장 12절의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라는 구절이 성령의 검을 설명한다고 언급한다. 이 검은 우리 안을 먼저 찌르며, 회개와 정결을 이루게 한다. 자기가 다루어지지 않은 상태로 타인을 무조건 ‘말씀’이라는 명분으로 휘두르면, 그것은 영혼을 살리는 검이 아니라 ‘폭력적인 칼’이 되고 만다. 따라서 성령의 검은 먼저 자기 성찰과 회개를 거쳐야만 제대로 된 빛을 발한다.

결국 전신갑주는 이 모든 요소가 하나로 맞물려야 한다고 장재형 목사는 말한다. 진리의 띠, 의의 흉배, 평안의 신발,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성령의 검 중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균형이 깨진다. 예컨대, 믿음의 방패가 단단해도 구원의 투구가 없어 소망을 잃으면, 머리가 치명상을 입을 수 있다. 진리를 알지만 의를 향한 갈망이 식어 뜨거운 열정이 없다면, 영적 싸움에서 쉽사리 무기력해진다.

그는 이 전신갑주를 실제 삶에서 구현하기 위해 세 가지 영적 훈련을 제안한다. 첫째, 매일 정해진 시간을 기도에할애하라는 것이다. 그 시간에 찬양과 말씀 묵상을 통해 성령의 음성을 듣고, 그 인도에 순종하는 노력을 하라. 둘째, 성경을 ‘암기’ 차원을 넘어 실천 적용으로 연결지으라는 것이다. 하루 한 구절씩이라도 상황에 맞춰 상기하고실행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셋째, 공동체 안에서 간증과 피드백을 나누라는 것이다. “오늘 나는 어떤 유혹을 맞닥뜨렸고 어떻게 말씀으로 이겨냈는가?”를 서로 점검해 줌으로써 전신갑주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파악할 수있다는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고린도전서 13장 13절 “믿음, 소망, 사랑은 항상 있을 것”을 전신갑주와 연결해 해석하기도 한다. 믿음의 방패(믿음), 구원의 투구(소망), 의의 흉배와 복음 전파의 열심(사랑)이 균형 있게 돌아갈 때, 사탄의 거짓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병자를 고치고, 죄인을 영접하시며, 십자가 사랑으로 원수를 용서하셨을 때, 이는 그대로 성령의 검이 되어 사탄을 물리치셨다고 그는 말한다. 가장 강력한 무기는 진리와 사랑, 그리고 성령의 역사임을 재차 강조한다.

이와 함께 장재형 목사는 “전신갑주”가 화려한 겉치장이나 무장에 국한되지 않음을 다시 상기시킨다. 영적 전쟁은 현실 세계의 시끄러운 투쟁이 아니라, 마음과 생각에서 날마다 벌어지는 유혹과 거짓, 절망과의 싸움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마지막으로 “모든 기도와 간구로, 무시로 기도하라”고 권면하듯, 깨어있는 기도가 이전신갑주를 계속 유효하게 만든다. 기도를 통해 성령의 인도를 더 선명히 느끼고, 그때그때 말씀을 적용할 수 있으며, 새로운 시험에도 즉각적으로 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 교회에 대해 장재형 목사가 제시하는 바는, 결국 이 영적 전쟁을 공동체가 함께 치러야 한다는 점이다. 바울이 “나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요청하듯, 서로를 위한 중보 기도와 격려를 통해, 개인을 넘어 교회 전체가 영적 승리를 누릴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메시지의 결론부에서, “전신갑주를 입고 사는 길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날마다 본받는 길이다”라고 말한다. 예수님은 지상에서 온갖 시험과 대적의 공격, 그리고 십자가의 고통까지 겪으셨지만, 진리와 사랑으로 승리하시고 십자가에서 구원을 이루셨다. 우리가 그 길에 동참할 때, 세상은 알아주지 않고 비웃을지 몰라도, 결국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를 통해 확장되며 수많은 영혼이 복음으로 돌아오게 된다.

장재형 목사는 이어,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6장 마지막에서 두기고를 언급하는 대목이 의미심장하다고 덧붙인다. “두기고와 같은 동역자가 없었다면, 바울의 높은 정신과 복음의 진수가 교회에 잘 전달되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것이다. 교회는 혼자가 아니라 함께 걸어가는 공동체이기에, 복음을 서로 연결해 주는 ‘두기고’들이 곳곳에 세워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정리해 보면, 장재형 목사가 에베소서 6장을 통해 전하는 핵심 메시지는 “진리의 중심을 붙들고, 하나님 나라를소망하며, 믿음으로 시험을 이겨 내고, 성령의 능력으로 담대히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혼자서는이룰 수 없으므로, 교회 안에서 서로 세워 주며 동역해야 한다. 나아가 그는 “현실에 휘둘리지 말고 영원을 바라보며, 그 영원한 소망을 오늘의 삶에 적용하라”고 권면한다. 우리가 마주한 현실이 아무리 답답해 보여도, 영적 눈을들어 보면 이미 승리가 보장된 전쟁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위해 “더 깨어 준비하라”는 말을 자주 인용한다. 교회가 주님 다시 오심을 기다리며 성령 안에서 거룩과 사랑을 추구한다면, 세상은 교회를 통해 소망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다. 그렇게 될 때, 영적전쟁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승리란, 세상 사람들에게 생명을 전해 주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풍성한 열매로 나타난다.

이어서 그는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성경으로”라는 종교개혁의 슬로건이 자신의 사역의 뿌리가 되고있음을 다시금 언급한다. 어떤 인간적인 공로나 자격이 아닌, 전적인 은혜로 우리가 구원받고, 그 은혜를 붙드는통로가 믿음이며, 그 믿음의 기준은 오직 성경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흔들리지 않을 때, 영적 싸움에서도 승리가보장된다는 견해다.

마지막으로, 장재형 목사는 에베소서 6장에 내포된 비전과 현재 시대의 교회를 잇는다. 전신갑주를 입는다는 것은 단순히 개인 경건 생활에 그치지 않고, 교회 공동체가 연합해 서로 격려하며 전진한다는 뜻이다. “서로 기도하고, 사랑으로 섬기며, 말씀을 붙들고 세상 속으로 나아갈 때, 비록 가시밭길 같아도 그 끝에서 우리가 만나게 될 분은 주님이시며, 그분의 칭찬을 듣게 될 것”이라고 격려한다.

결국 에베소서 6장의 요지는, 우리를 두렵게 하는 어떤 거짓과 절망도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아 꺾였고, 전신갑주를 두른 하나님의 백성은 이 영적 전투에서 결코 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확신이 있으면,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체험하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다고 그는 강조한다.

장재형 목사는 마지막으로 당부한다. “세상이 아무리 악하다고 해도, 전신갑주를 입고 싸우는 교회가 있다면 소망은 살아 있다.” 우리가 전신갑주의 각 요소를 제대로 갖추고, 서로 사랑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통해 큰 일을 이루시고, 많은 영혼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바울이 제시한‘구원의 드라마’를 우리의 시대에 재현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한편, 그는 이 모든 과정이 결코 손쉬운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진리를 지키고 복음을 전하며, 세상의 유혹을 이겨내는 동안 헌신과 희생이 따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신앙의 선배들이 남긴 교회사와 성경의 역사에서 보듯, 그 희생이 결국은 영광으로 이어졌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싸우되, 사랑의 방식으로싸우고, 진리 안에서 겸손하게 나아가라”는 것이 장재형 목사의 변함없는 가르침이다.

이렇듯 에베소서 6장을 관통하는 전신갑주의 정신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변함없는 복음의 본질을 되새기게 만든다. 진리에 굳게 서고,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믿음으로 시험을 이겨 내고, 성령의 검을 들고 나아가는 교회는어떤 어둠도 결국 이겨 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열매는 우리의 일상과 교회 역사, 그리고 세상에서의 변화로 나타날 것이라고 그는 거듭 확신한다.

장재형 목사는 끝으로 이 모든 것이 “오직 은혜”로만 가능하다고 재차 이야기한다. 교만하기 시작하거나 스스로대단하다고 착각하면, 전신갑주는 어느새 풀어져 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매일 십자가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성령의 능력을 구하고, 말씀을 붙드는 사람은 그 어떤 시험에도 휘둘리지 않을 담대함을 얻게 된다. 그렇게 함께 성장하는 교회야말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신앙 공동체라는 게 그의 결론이다.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이 영적 전쟁터임은 분명하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이미 승리는 확정된 전쟁이다. 전신갑주를 온전히 갖춘 우리는 그 길을 두려움 없이 걸어갈 수 있다. 장재형 목사는 “사랑과 소망, 그리고 믿음으로 무장한 이들이 있는 한, 교회는 생명력 있게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확장해 나갈 것”이라는 말로 설교를 마무리하곤 한다. 지금도 우리는 이 영적 전투 한복판을 살아가지만, 함께 전진하는 교회와 더불어 주님 앞에 설 날을 기대하며, 우리의 걸음을 계속 옮겨야 한다는 메시지가 그의 중심 사상이다.

장재형목사가 세운 올리벳대학교의 Ralph D. Winter Library에 수백 권의 고품질 미술 도서 추가

장재형목사
올리벳대학교

장재형목사가 세운 올리벳대학교 리버사이드에 있는 Ralph D. Winter 도서관에 500권의 고품질 미술 도서가 추가되었습니다.

이 책들은 은퇴한 미술대학 교수가 소장하고 있던 것으로, 컬렉션 주제에는 회화, 드로잉, 일러스트레이션, 디자인, 건축, 역사 및 예술 전반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대부분의 책은 양장본으로 상태가 양호합니다.

이러한 미술 도서는 Olivet University의 미술 학생 및 교수진에게 제공될 예정입니다. Olivet School of Art & Design의 부학장이자 미술 교수인 Zimou Tan은 이러한 책이 OSAD의 미술 프로그램에 매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언급하며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OSAD를 위한 완벽한 시기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새로운 도서들은 학생들에게 다양한 시각적 자료와 전문적인 지식을 제공하여 미술 교육 및 연구의 품질을 높이는 데 기여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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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형목사
올리벳대학교


장재형목사가 세운 올리벳대학교의 Olivet Theological College & Seminary(OTCS)는 겨울 학기에 다양한 강좌를 개설하여 학생들이 학업 목표에 맞는 수업 일정을 조정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기대되는 강좌 중 하나는 로마서 1부입니다.

매주 토요일 오후, 크리스티 트란 박사의 로마서 강의를 듣기 위해 강의실은 학생들로 가득 찼습니다. 지난 주 강의에서는 트란 박사가 로마서의 저자인 사도 바울과 예수님의 개인적인 만남을 묵상하기 위해 학생들을 데리고 여행을 떴습니다. 학생들은 선택된 백성만이 아니라 박해자들과 적들에게도 나타나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MDiv 학생인 Liting Miao는 자신의 감정을 공유했습니다. “오늘의 강의를 듣고 마음이 사랑과 평안으로 가득 찼습니다. 예수님은 바울에게 자신을 계시하고 진정한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바울이 예수님의 사랑하는 제자들을 박해할 때에도 예수님은 그를 지켜보셨지만 여전히 그를 사랑하기로 선택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고 그 사랑은 영원히 깊고 완벽하다고 느껴집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랑으로 변화했습니다. 이와 같은 변화는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죄를 용서하고 새로운 삶으로 이끌어 줍니다.” 라고 그녀는 말을 이었습니다.

로마서 1부는 학생들에게 성서의 중요한 교리에 대한 심층적인 이해를 제공하기 위해 고안되었습니다. 이 강좌는 로마서 1장부터 8장까지를 다루며, 2부에서는 9장부터 16장까지를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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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형목사가 세운 올리벳대학교의 MBA 학생들은 기업가 정신에 대해 토론합니다: 위기 속에서 기회에 집중

장재형목사
올리벳대학교

장재형목사가 세운 올리벳대학교 Olivet Business School의 MBA 학생들은 전례 없는 학술 세션에서 계속해서 온라인 원격 학습에 참여하며 기업가 정신의 세계를 탐구하고 있습니다.

리버사이드, 샌프란시스코, 그리고 뉴욕 맨해튼 캠퍼스의 학생들이 Sebastian Keita 교수가 이끄는 기업가 정신 과정에 참여했습니다. 이 과정에서는 새로운 사업을 디자인하고 시작하며 운영하는 방법에 중점을 두며, 이론보다는 아이디어와 비전에 주목합니다. 학생들은 기업가 정신의 성공과 실패 사례를 조사하고 분석하여 계산된 위험 감수의 중요성을 깨닫게 됩니다. 또한, 그룹 토론과 교수와의 개별 상담을 통해 서로의 아이디어를 도전하고 배움에 대한 참여를 지속적으로 촉진합니다.

한 MBA 학생은 이러한 경험을 통해 많은 유명 창업가들의 이야기를 연구하고, 창업에 대한 욕망과 비전만으로는 성공을 보장할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비전과 꿈은 중요하지만, 성공을 이루기 위해서는 인내와 기회를 찾는 끈기가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창업가는 기회를 발견하고 개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며, 투자하기 전에 위험을 신중하게 평가할 수 있게 됩니다.

Olivet Business School의 MBA 프로그램은 기업가 정신을 키우고 싶은 학생들에게 혁신적이고 실용적인 교육을 제공하며, 온라인 강의를 통해 학생들의 참여와 배움을 지속적으로 촉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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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형목사가 세운 올리벳대학교의 OTCS 교수진은 복음주의 신학 학회 가상 컨퍼런스에 참여합니다.

장재형목사
올리벳대학교


장재형목사가 세운 올리벳대학교 신학대학 및 신학교(OTCS) 교수진은 복음주의 신학 협회(ETS)를 포함하여 지속적인 전문성 개발의 일환으로 일련의 주요 회의에 사실상 참여했습니다.

Evangelical Theological Society(ETS)의 주제 중에는 교회사: 종교의 자유, 무슬림 변증론이 있었습니다.

“교회사에 관한 이 라이브 세션에 참여할 수 있어서 기쁩니다. 주제는 무슬림과 기독교인의 관계에 관한 것이었고, 무슬림과 세계에 복음을 더 잘 전파하기 위해 역사에서 배울 수 있는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더 많은 녹화 세션에 참여할 계획입니다. “라고 Dover 캠퍼스의 강사인 Jasper Rebrova가 말했습니다.

OTCS 교수진은 SBL(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 AAR(American Academy of Religion), 중국 교육 자원 및 추천(ERRChina)에서 주최하는 회의와 같은 다른 가상 회의에 참여했습니다.

거의 8,000명의 회원을 보유한 미국종교학회(AAR)는 종교 분야의 교사, 학자 및 기타 전문가에게 봉사하는 데 전념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조직입니다. OTCS 샌프란시스코 캠퍼스 교수진이 가상회의에 참여해 ’20세기 스코틀랜드 개혁신학’, ‘미국 개혁신학사에서 ‘ecclesia 개혁신학, semper 개혁신학’의 오용’, ‘칼빈 신학의 왕국 개념에 대한 칼 바르트의 재해석.’

목회상담학과 에스더 정 박사는 “온라인을 통해 다양한 신학적 견해와 공동체에 대해 더 많이 알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고 말했다.

교육 자원 및 소개 – 중국(ERRChina) 가상 컨퍼런스에서 교수진은 중국 퍼즐에서 유교 및 기독교 대화의 역할과 같은 세션에 참여했습니다.

“발표자는 공자사상에 대한 분별력과 중국 기독교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발표를 통해 선교사들이 순수한 복음을 깊이 가르치면 중국 사람들도 복음을 잘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 제게 울려 퍼졌습니다. 중국은 세계를 위한 비옥한 모판이 될 수 있는 큰 잠재력이 있습니다.” 임무”라고 Dr. Linda Lee는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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