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
장재형(장다윗)목사는 오랜 기간 동안 복음서 연구에 매진하며, 특히 마태복음 2장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이야기와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아들이 오시는 방식’에 큰 주목을 해왔다. 그가 강조하는 핵심 중 하나는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의 충돌”이라는 주제다. 마태복음 2장을 살펴보면, 동방박사라는 이방인들은 “이미” 메시아가 탄생하셨음을 별의 징조를 통해 알아보고 기뻐하고 경배하는 모습이 나오지만, 정작 유대인 종교 지도층—대제사장과 서기관 등—은 “아직” 메시아가 오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괴리를 드러낸다. 장재형목사는 이 장면에서 오늘날 교회가 빠질 수 있는 함정과 동시에 붙들어야 할 희망을 함께 설파한다.
그는 먼저 왜 유대의 대제사장과 서기관이 메시아의 ‘이미 오심’을 받아들이지 못했는지를 탐구한다. 그들에겐 다니엘 7장13절(“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과 같은 장면이 강력하게 심겨 있었고, 또 이사야 66장 15-16절의 “불수레”와 “맹렬한 화염”으로 임할 하나님의 날에 대한 예언이 더 두드러지게 인식되어 있었다. 거기에 더해, 장재형목사가 자주 언급하듯 “구름 타고 오는” 영광의 왕으로서의 메시아, 천사장의 나팔소리가 울려 퍼지며 이 땅에 오시는 왕권적 현현의 측면이 강조되어 있었기에, 정작 말구유의 낮은 자리에서 탄생하신 메시아를 그들은 놓치고 말았다는 것이다.
종교 지도자들은 스스로의 선민의식과 기존에 강렬하게 붙들었던 “장엄한 메시아” 예상을 내려놓지 못했기 때문에,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이미 오신 메시아”를 말해 주어도 좀처럼 믿지 못했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이 “인간의 제한된 기대, 높은 곳만 바라보는 시선이 빚어낸 비극”이라 해석한다. 실제로 마태복음 2장 4-6절에서 헤롯 왕이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라고 묻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미가서 5장 2절(“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을 비로소 찾아 내놓았다. 그제서야 그들은 메시아가 ‘베들레헴’이라는 작은 동네에서, ‘가장 낮은 자리’에서 오신다는 소선지서의 예언이 있음을 확인했다. 장재형목사는 이 과정을 두고 “겸손과 비움으로 오시는 메시아에 대한 예언(미가 5:2)을 그들이 미처 주목하지 않았던 것”이라 강조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지점에서 현대 교회가 주목해야 할 몇 가지 포인트를 정리한다. 첫째, 교회가 너무 ‘화려함과 성공’만을 추구하면 정작 낮은 자리에 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놓치게 된다는 경고다. 이미 구약 대선지서에 기록된 ‘영광의 왕’만 보며, 실제로 메시아가 낮은 곳에 임하신다는 소선지서의 말씀을 제대로 보지 않으면 구원의 역사에 참여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둘째,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은 ‘겸손함’과 ‘자기 비움’이라는 점이다. 말구유에서 태어나신 아기 예수를 경배하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은 이방인이었다. 선민이라 자부하던 자들은 “아직(not yet)”이라는 입장에서, 메시아를 살해하려는 권력자 헤롯 편에 서게 되었다는 아이러니가 벌어졌다.
장재형목사는 이어 동방박사들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는 장면(마 2:11)에서, 이 세 가지가 갖는 상징성을 통해 그리스도의 삼중적 직분을 엿볼 수 있다고 가르친다. 황금(gold)은 왕의 권위와 영원히 변치 않는 왕권을 상징하며, 유향(frankincense)은 제사장 직분을 가리킨다. 구약의 제사에서 향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상징하며, 대제사장이 드리는 향과 연결된다. 몰약(myrrh)은 당시 시신에 바르던 향료로,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사는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암시한다. 이렇게 장재형목사는 그리스도가 왕이시며, 대제사장이시며, 궁극적으로 죽음을 이기시는 분이라는 복음의 심오한 상징이 동방박사들의 예물 안에 담겨 있음을 강조한다.
그러나 마태복음 2장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헤롯은 동방박사들에게 속았음을 알고 베들레헴 일대의 두 살 이하 남자아이를 모조리 죽이는 무참한 학살을 자행한다(마 2:16). 장재형목사는 이 장면을 통해 “악은 결코 가만히 있지 않으며, 진정한 왕이 오면 가짜 왕은 두려워한다”라고 말한다. 그가 즐겨 인용하는 예화 중 하나는 “좌석표 없이 기차 자리를 차지한 이가, 진짜 좌석 주인이 나타나면 두려워하며 어떻게든 그를 내쫓으려 한다”는 코미디적 비유다. 이 세상의 권세자나 악한 세력은 실상 무임승차한 존재들이기에, 진짜 주인이신 그리스도가 오시면 필사적으로 배척한다는 것이다.
이는 출애굽기에서 모세가 태어날 때 애굽 왕이 히브리인 남자아이를 다 죽이려 했던 사건과도 평행을 이룬다. 장재형목사는“사탄은 처음부터 하나님 백성을 두려워했고, 늘 죽이려 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출애굽기의 히브리 산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기민함으로 아이들을 살려 내었고(출 1:20-21), 결국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끊기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예수의 탄생에도 동일한 그림이 그려진다. 하나님의 지시를 받은 요셉이 아기 예수를 애굽으로 피신시킴으로써(마 2:13-15), 메시아의 생명은 보호받는다.
장재형목사가 이러한 본문을 설교할 때 자주 언급하는 말은 “역사를 이어가려는 치열한 몸부림”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시자마자 환영받기는커녕, 세상 권력에 쫓기며 살육 위협에 직면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실패하지 않았다. 이 땅에 오신 구원자는 살아남아야 했고, 이를 위해 요셉과 마리아는 기민하게 순종하며 ‘피난길’을 감당했다. 결국 헤롯이 죽은 후에야 예수님은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마 2:19-21). 여기에도 위험이 남아 있었지만, 꿈에 또다시 지시를 받아(마 2:22), 갈릴리 지방의 나사렛에서 자라게 되었다.
장재형목사는 이 “나사렛”이라는 동네의 의미를 강조한다. 그가 말하기를, 히브리어로 ‘가지’를 의미하는 ‘네체르(Netzer, NZR)’가 이사야서 11장 1절(“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에 등장하는데, 예수님이 결국 갈릴리의 나사렛(NaZaReth)으로 가셨다는 사실은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으로서 이새의 뿌리에서 나오는‘가지’다”라는 예언을 상징적으로 이루는 장면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마태복음 2장 23절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는 말씀이 이루어졌다.
장재형목사는 마태복음 2장 전체를 통해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한다. 첫째, 메시아는 예상치 못한 낮은 곳에서 오셨다. 둘째, 가짜 권세자들은 언제나 참 왕을 두려워하고 배척한다. 셋째, 그러나 하나님은 구원의 역사를 결코 끊기지 않게 하신다. 동방박사를 통해, 요셉과 마리아의 믿음과 순종을 통해, 그리고 이사야·미가·예레미야의 예언들을 통해 궁극적으로 메시아의 ‘낮아지심’을 성취하신다. 넷째, 그러므로 우리도 “말씀에 순종하는 지혜”와 “겸손한 신앙”을 지녀야 한다. 특히장재형목사는, 교회 공동체가 힘없고 낮은 자들을 돌보는 사역을 소홀히 할 때, 역사 속의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처럼 주님의‘낮은 임재’를 놓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이처럼 장재형목사는 마태복음 2장을 단순히 “예수의 탄생 스토리”로만 읽지 않고, 영적인 전쟁과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실현되는 장엄한 장으로 본다. 동시에, 우리의 시선이 허영과 세속적 권세에만 쏠려 있다면 ‘작은 고을 베들레헴’과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않으신 예수님’을 발견하지 못할 수 있다고 호소한다. 그에게 있어서 복음이란, 오직 십자가와 부활만이 아니라, ‘성육신(탄생)부터 승천까지’를 다 포함하는 포괄적 진리이며, 그 시작점인 탄생 이야기를 제대로 알아야 온전한 복음을 누릴 수 있다고 가르친다.
이러한 가르침은 교회 현장에서 큰 울림을 주었다. 왜냐하면 현대 사회 역시 “성공”, “번영”, “힘”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많은 신자들이 “크고 화려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기 쉬우나, 정작 구원자께서는 가장 작은 고을과 말구유라는 빈약한 곳을 택하셨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이 “하나님의 거꾸로 된 가치관”이라고 말한다. 세상은 위를 향해 올라가려 하지만, 그리스도는 낮은 자리로 내려오셨다. 세상은 더 많은 부와 명성을 추구하지만, 그리스도는 영광을 비우고 종의 형체를 취하셨다. 그리고 그 길을 통해 오히려 온 인류에게 구원과 영생의 길을 열어 주신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마태복음 2장에서 동방박사들이 별을 따라 아기 예수를 찾아올 수 있었던 것은 ‘순수한 열망과 하나님의 인도’ 때문이라 설명한다. 이들은 유대교 전통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었지만, 진리를 향한 갈망이 있었고, 우주적 표적인 별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 그리고 왕의 명령보다는 하나님의 지시에 순종하여 다른 길로 돌아갔는데(마 2:12), 이는“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순종이 무엇인지 보여 준 장면”이라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종교적 배경이나 신분을 막론하고, 하나님의 뜻에 열려 있는 자들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다”고 해석한다.
요컨대 장재형목사가 마태복음 2장을 통해 가르치고자 하는 핵심은, 하나님께서 죄 많은 현실 속에 “가장 낮은 방식”으로 오셨다는 성육신의 의미와, 그 낮아지심 앞에 각 인간의 마음이 어떻게 반응하는지가 구원의 갈림길을 만든다는 점이다. 그는 이 장의 핵심 테마를 “지극히 높으신 분이 지극히 낮은 자리로 오심”이라 요약한다. 이는 종종 우리가 기대하는 ‘화려한 구원’과는 정반대지만, 바로 그 점이 복음의 영광이며, 인류 구원의 신비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신비를 놓친 자들은 종교 지도자일지라도, 혹은 강력한 권력자일지라도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했고, 오히려 적대 세력이 되었다는 사실을 숙고하라고 권면한다.
이상과 같은 통찰은 장재형목사가 현대 교회와 신자들에게 회개와 새로운 시작을 촉구하는 밑거름이 된다. 그는 거듭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진정으로 기뻐하고 있는가, 아니면 세상적 성공과 힘을 사랑하며 ‘영광의 왕’의 한 측면만 그리워하고 있는가?”라고 묻는다. 그리고 독자들에게, 진정으로 복음을 따르고자 한다면, 마태복음 2장에 나타난 낮아지심의 메시지를 깊이 묵상하라고 요청한다.
2. 성육신이 신비
장재형목사는 복음을 “십자가와 부활”로 요약할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역설한다. 그에게는 복음이‘성육신(탄생)과 고난,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 마지막으로 승천’까지 하나의 완전한 흐름을 이룬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 1:14)라는 선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단순한 출생 이야기가 아니라, 영원하신 말씀이 세상의 죄 많은 현실 속으로 ‘침투’한 엄청난 사건임을 보여 준다. 장재형목사가 “성탄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묵상하는 가장 기본이자 핵심적인 절기”라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요한복음 1장 1절의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라는 구절부터 시작해, “우리가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본” 말씀이 됨(요일1:1), 그리고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빌 2:7)는 사도 바울의 고백 등을 하나로 묶으며,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신 ‘성육신(incarnation)’의 의미를 오롯이 설명한다고 말한다. 특히 빌립보서 2장에서 바울이 언급한 예수 그리스도의 케노시스(자기 비움)에 대해, 장재형목사는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않으신 그 낮아지심이 곧 복음의 출발점”이라 강조한다. 만약 예수님이 이 땅에 가장 영광스럽고 두려운 방식, 곧 군림하는 황제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면, 사랑의 메시지보다는 두려움과 복종만을 강요하는 존재로 받아들여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구간에서 태어나셨고, 평범한 갈릴리 사람으로 성장하셨으며, 그 과정에서 인류의 고통과 한계를 몸소 체득하셨다.
장재형목사는 바로 이러한 점이 “기독교가 단순한 형이상학적 개념을 가르치는 종교가 아니라, 실제로 인간의 삶과 고난에 깊이 동참하는 사랑의 종교임을 입증한다”고 역설한다. 그는 매년 성탄절을 맞을 때면 “우리의 신앙이 정말 겸손히 낮은 곳에서 섬기는지” 자문해야 한다고 말한다. 교회가 커지고 재정이 넉넉해질수록, 혹은 많은 신도수를 자랑하게 될수록, 말구유에 누이신 아기 예수를 보지 못하게 되는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장재형목사는 성육신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을 설교할 때, 종종 요한일서 4장 9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것은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를 인용한다. 인간의 죄와 고통이 가득한 이 세상에 하나님이 직접 들어오셨다는 사실 자체가 구원의 열쇠라는 것이다. 십자가는 이 사랑이 최종적으로 드러난 지점이며, 동시에 부활은 그 사랑이 죽음조차 이겼음을 증거한다. 하지만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승천”의 중요성도 함께 가르쳐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죽음과 부활을 지나 완전히 영광 받으신 채로 하늘에 오르셨다는 사실을 잊으면, 기독교 신앙은 현실 세계에만 갇혀 버리고, 성령의 시대와 교회의 사명에 대한 비전을 왜곡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8장에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라고 지상명령을 하시고(마 28:19-20), 사도행전1장에서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승천하신다(행 1:9).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지상에서 시작된 구원의 역사, 즉 성육신으로 열려진 길은 결국 성령의 임재와 함께 보편적으로 확장되어 간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교회는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게 된다. “나사렛”이라는 지역적 배경이 주는 낮아짐, 무명함, 비천함이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더욱 빛나게 한다는 것이 장재형목사의 핵심 통찰이다.
장재형목사는 현대 신자들이 흔히 “십자가와 부활은 알겠는데, 탄생과 승천은 그저 성탄절 행사나 부활절 이후 짧게 언급하고 지나치는 장식 정도”로 여기는 경향을 우려한다. 그러나 복음이 온전하려면 “탄생(성육신)과 승천을 통해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가 더 분명해진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실제 인간의 삶을 사셨기에, 십자가의 고난은 단지 ‘신적인 퍼포먼스’가 아니라, 인간의 모든 고통에 동참하고 그것을 대속하시는 구원의 사건이 된다. 또한 승천으로 인해 예수님은 단지 ‘훌륭한 선생’이나 ‘도덕적 지도자’가 아니라, 참으로 왕이요 주님이 되심을 확증하셨다. 그리고 그 왕권은 다시 성령을 통해 교회에 전달되어, 세상 구원의 사명이 전개된다.
장재형목사가 “탄생과 부활”이라는 말 사이에 “고난과 십자가, 그리고 승천”을 더해 “예수 그리스도의 전 생애와 사역을 입체적으로 이해하라”고 주문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을 토막내서 부분적으로만 이해하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다시 말해, 성육신이 없이 십자가를 논하면, 예수님의 고난이 우리 인간의 고통에 대한 ‘진정성’을 상실할 위험이 있고, 부활만 이야기하며 승천을 생략하면, 그리스도의 최종적 영광과 하나님의 왕권을 제대로 선포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같은 가르침은 장재형목사의 설교에서 구체적 실천으로 이어지곤 한다. 첫째, 그는 신자들이 성탄절에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찾아가 섬기는 활동을 장려한다. 성육신이 “높은 자리가 아닌 낮은 자리”에서 시작되었기에, 교회도 낮은 곳에서부터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논리다. 둘째, 부활절뿐 아니라 그 이후까지 계속해서 “주님이 살아 계심”을 증거하는 삶을 살 것을 강조한다. 부활절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며, 부활하신 주님이 여전히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승천의 의미를 잊지 말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완전히 승리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기에, 교회는 낙심하지 않고“주님의 재림”을 소망하며, 성령을 통해 세상으로 파송받는 공동체가 되라는 메시지다.
장재형목사는 또한 성육신과 십자가, 부활, 승천의 흐름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이미와 아직”을 다시 해석해 준다. 그는“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임했다. 하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따라서 교회는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맛보며, 동시에 주님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완성을 바라보는 긴장 속에서 살아야 한다. 이 긴장감이 사라지면, 신앙은 현실과 동떨어진 ‘낭만적 위로’만 추구하거나, 혹은 세상적 성취만 좇는 또 다른 방식의 타락에 빠지기 쉽다.
결국 장재형목사가 말하는 바는, 모든 성도는 “육신이 된 진리이자 사랑”이신 예수님을 닮아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가 만약 세상의 부와 권세를 좇아가며, 이미 왕으로 오신 메시아를 잘못 이해하면, 헤롯과 다를 바가 없어질 수 있다. 예수님 탄생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나 세속 왕들이 ‘이미 오신 메시아’를 살해하려 했던 역사는, 오늘날에도 반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올바로 알고, 성육신과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승천에 담긴 놀라운 진리를 균형 있게 전수받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장재형목사가 자주 강조하듯, “복음은 사랑이요 생명이다.” 그 사랑은 아기 예수로 시작되는 자기 비움이요, 생명은 십자가를 넘어 부활과 승천으로 드러나는 영원한 능력이다. 교회가 이 사랑과 생명의 길을 걷기 위해서는 “낮은 곳에 임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바라보아야 하고, 그 길이 결코 쉽지 않음을 직시해야 한다. 왜냐하면 세상의 악이 절대로 순순히 물러서지 않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2장에서처럼 사탄적 권세는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성도를 위협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서로 연대하며 하나님의 지혜—곧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악을 분별하는 능력—를 간구해야 한다고 장재형목사는 재차 가르친다.
이 모든 점에서 장재형목사가 전하는 메시지는 단순히 “예수님 잘 믿읍시다” 정도가 아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제대로 아십니까? 그 탄생과 삶, 죽음과 부활, 승천에 담긴 하나님의 경륜을 올바로 보고, 그 길을 따를 준비가 되었습니까?” 하는 심오한 물음이다. 그리고 그 물음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마태복음 2장에 나타난 겸손의 역설, 성육신에 담긴 사랑의 신비,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확인된 구원의 능력, 승천으로 선포된 예수 그리스도의 왕되심과 재림의 소망을 통전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장재형목사는 성탄의 의미를 곧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인생의 밑바닥까지 내려오신 사건”이라고 정의한다. 성육신 없는 십자가는 불완전하며, 십자가 없는 부활은 표면적인 기적일 뿐이고, 승천 없는 부활 또한 결국 이 세상에 매여 있는 사건으로 축소될 위험이 있다. 그래서 그는 탄생부터 승천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전 생애를 ‘복음의 한 몸통’으로 제시한다. 이 전체적인 틀 안에서 성도들은 겸손과 순종을 배우고, 낮은 자리에까지 스며든 하나님의 사랑을 보고, 동시에 죽음과 악을 이기는 부활의 능력과 예수 그리스도의 우주적 주권을 함께 선포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장재형목사가 계속해서 역설하는 바는 “우리가 진정으로 복음을 전하고 싶다면, 교회 안팎의 모든 사람에게 성육신과 십자가, 부활과 승천이라는 전체 맥락을 통전적으로 보여줘야 한다”는 점이다. 그가 마태복음 2장을 시작점 삼아 설명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처음부터 ‘왕의 자녀’로 곱게 대접받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악한 왕에게 쫓기며 이방 땅 애굽으로 피신하셨다는 사실이야말로, 기독교의 구원 사건이 지닌 역설적 진리를 잘 드러내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종 “평화의 왕 예수님” 하면, 크고 화려한 성전에서의 성대한 예배나 영광만을 떠올리지만, 실제 복음이 보여 준 예수님의 모습은 한없이 낮아지신 종의 형체였다. 그분은 말구유에 탄생하셨고, 생애 내내 가난한 자들의 벗이셨으며, 결국 세상 권세의 박해로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셨지만, 부활과 승천으로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셨다. 이것이야말로 우주적 복음, 곧 죄로 얼룩진 인간 역사에 개입하신 하나님의 대역전 드라마라고 장재형목사는 거듭 가르친다.
이와 같은 메시지는 현대의 복음 전도와 교회 공동체에 커다란 울림을 준다. 소외된 이웃을 돌보는 사회봉사나, 사람들의 억울함과 아픔을 함께 어루만지는 사역 없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정신을 제대로 전수하지 못한다. 동시에, 십자가가 보여 주는 하나님 사랑의 절정을 전하지 않고, 그저 윤리적 가르침만 늘어놓는다면 그것은 복음이 될 수 없다는 경계도 잊지 말아야 한다. 나아가 부활과 승천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주권자 되심을 선언하지 않으면, 기독교는 ‘이 땅의 운동’ 수준에 그쳐 버리고 말 것이다.
장재형목사가 우리에게 전하는 교훈은 하나다. “우리는 복음을 부분적으로만 알지 말고, 온전한 모습으로 예수를 바라보라.” 그리고 그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부터 시작된 성육신의 경이로움이, 우리의 삶 속에서도 계속 이어지도록 살아가라는 것이다. 나사렛이라는 낮은 자리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이야기는, 어느덧 전 세계의 교회와 성도들의 이야기로 확장되었다. 그렇기에 장재형목사는 오늘도 마태복음 2장을 펼치며, “메시아가 이미 오셨고, 여전히 우리 한가운데서 역사하신다. 우리는 그분의 낮은 길을 기억하며, 예배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세상에서 진리를 선포하는 존재로 부름받았다”고 강조한다. 그 모든 것이 바로 장재형목사가 일관되게 붙들고 전해 온, 성육신에서 승천까지 이어지는 기독교 복음의 전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