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 것을 바라보라 – 장재형목사

  1.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 자의 정체성과 은혜

우리가 골로새서 3장 1절의 말씀,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이라는 선언을 들여다보면, 이 한 구절이 신앙의 정체성과 은혜의 깊이를 요약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이미 2장에서부터 율법주의적인 주장과 헬라 철학의 영향으로 인해 교회가 흔들리고 있는 상황을 지적한다. 그러면서도 3장에 이르면 본격적으로 “위의 것을 찾으라”라는 권면을 시작하며,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새로운 삶’을 강조한다. 바울이 제시하는 이 새로운 삶, 곧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이라는 서두는 단지 구호나 표어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존재 전체를 바꿔놓는 사건임을 보여 준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라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주제를 상기시키면서, 동시에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다”라는 구원의 진수를 말한다. 본래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해 영생을 얻고, 이로써 전혀 다른 존재가 되었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신자에게는 더 이상 그 이전의 정체성이 적용되지 않는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거듭난 존재로, 부요함을 이미 소유한 자로, 은혜를 입은 자로 살아가는 것이 핵심이다. “다 죽었다”고 말할 때, 이는 형식적 선언이 아니라 실제적 변화, 즉 십자가 사건의 능력이 우리의 본질을 송두리째 뒤바꾸었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이라는 이 문장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가난하지만 이미 부요한 자라는 역설의 진리가 바로 여기에 담겨 있다. 세상의 관점에서는 경제적 풍요와 사회적 지위, 명예 등을 통해 부유함을 측정한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의 부요함이란, 죄에서 자유케 되고 영원한 생명을 약속받은 존재가 누리는 최고의 가치다. 그러므로 세상적 부귀영화를 좇지 않고도, 이미 영적 부요함에 근거해 자신을 낮추고 가난해질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이 점에서 “가난해지자”는 말이 단지 금욕주의나 고행을 뜻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미 영적으로 풍성한 자이기 때문에, 물질적 것이나 세상적 명예에 굴복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뜻이다.

이 ‘영적 부요함’은 은혜에서 비롯된다. 인간의 어떠한 공로나 능력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의 능력으로 주어진 것이기에, 우리는 그 부요함을 온전히 누릴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상적인 사고방식, 즉 한 번 자리를 잡으면 움켜쥐고 싶어 하는 소유욕, 세상적 성공을 과도하게 추구하는 모습, 혹은 자기 공로로 무엇인가를 이루려는 율법주의적인 경향이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을 수 있다. 이것을 두고 바울은 “땅의 것”이라고 말하며,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 자라면 그러한 옛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한다.

특히, 이러한 복음의 핵심과 그리스도 중심의 신앙을 현대에 적용하여 설교하고 가르치는 목회자들 가운데, 장재형목사는 “이미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었고, 부활의 소망이 실제가 되었다면, 우리의 삶의 태도와 관점이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한다”라는 점을 자주 강조한다. 세상 가치관에 끌려다니는 것이 아니라, ‘위의 것’을 추구하고 하늘에 속한 존재답게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이것은 특별한 소수만의 삶이 아니라, 모든 크리스천이 누려야 할 정체성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라는 말씀이 바로 이 강조점의 출발이 된다.

특이한 점은, 이러한 가르침이 단순히 관념적으로 ‘땅의 것’을 배제하기 위해 수도원에 들어가거나 세상 문화를 전면 거부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위의 것’을 소유한 자의 여유와 자유로 인해 삶을 더 풍성하게 누리라는 의미로 해석된다는 점이다. 영적 부요함에 기초해 살면, 세상의 재화나 명예가 절대적 기준이 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외적으로 드러나는 물질적 풍족함을 부러워하지만, 사실상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모든 것을 소유한 신자는 그 여유로 세상을 섬길 수 있게 된다. 약자에게 기꺼이 손 내밀고, 자신을 희생하며, 자발적으로 가난해질 수도 있다. 왜냐하면 궁극적인 상속자가 이미 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난할지라도 부유한 자’이며, ‘무소유하는 것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고린도후서 6장 10절 참조)의 삶을 실제로 살아낼 수 있게 된다.

“이미 얻었기 때문에 가난해질 수 있다”는 역설적인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아주 밀접하게 연결된다. 예수님 역시 본래 하나님과 동등한 분으로서 하늘 영광을 소유하셨으나, 이 땅에 오셔서 종의 형체를 입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자신을 비우셨다. 이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과 희생은, 신자들에게 ‘그분을 닮아가라’는 초청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초청에 응하는 사람들은 고통스럽기만 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영광에 참여한 자로서, 확실한 소망을 품고 기쁨 중에 헌신의 길을 갈 수 있게 된다.

바울이 “너희가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이라고 할 때, 이것은 단지 교리적 선언에 머물지 않는다. 우리 일상 자체가 이미 바뀌었고, 존재론적으로 변화되었으니, 그에 합당하게 행동하고 살아야 한다는 촉구이다. 신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새사람”이라는 정체성을 꾸준히 의식하고 살아야 한다. 그래서 음란과 부정, 사욕과 탐심 등으로 대표되는 ‘땅의 것’을 과감히 버릴 수 있는 것이다. 고백적으로 말하자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이제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다”라는 은혜의 경험이 우리를 움직이는 동기가 된다.

장재형목사 역시 여러 설교와 강연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새로운 생명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실제 삶에 적용되는지를 강조한다. 우리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는 선언은, 더 이상 죄와 사망의 권세에 얽매여 살 필요가 없음을 의미하고, 동시에 우리가 어떤 사역과 헌신을 하든지 결국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 가운데서 기쁘게 감당할 수 있다는 확신을 제공한다.

더 나아가, 이러한 은혜에 입각한 새로운 삶의 방식은 개인의 내면적 변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또 사회 전반에서 은혜와 진리로 살아가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게 한다. 이처럼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 자의 정체성과 은혜’를 깨달으면, 필연적으로 우리의 관점은 ‘위의 것’을 향하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곧 이어지는 바울의 말, “그러므로 위엣 것을 찾으라”라는 권면은 매우 자연스럽다.

요약하자면,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이라는 말은 우리가 이미 죽었고, 동시에 다시 살아난 자로서 새로운 존재와 새로운 정체성을 얻었다는 선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은혜는 율법적 행위나 세속적 부유함과 다르며, 우리 안에 내재된 죄의 권세를 깨뜨리고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한다. 이 사실을 붙들 때, 우리는 자유로이 세상적인 욕망을 내려놓을 수 있고, 궁극적으로 하나님만이 주시는 영적 부요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게 된다. 

  • 위의 것을 찾으라 – 세속적 도전과 영적 모드 전환

바울이 골로새 교회에게 “위엣 것을 찾으라”라고 당부할 때(골로새서 3장 1절), 단순히 “하늘만 바라보라”는 식의 비현실적 태도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세상 한복판에서 살지만, 그 중심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그로 인해 우리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이 달라져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이를 일종의 ‘모드 전환’이라 부를 수 있겠다. 신앙생활에서도 여전히 세상적인 방식으로만 사고하는 ‘옛 모드’를 유지하기보다는, ‘하늘의 관점’으로 사고하는‘새 모드’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이 말하는 이 ‘새 모드’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할까? 우리는 골로새서 2장 8절 이하에서 헬라 철학과 영지주의 사상이 교회 안에 들어와 성도들을 흔들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또한 2장 16~23절에서 언급되는 율법주의적 요구(특히 절기, 월삭, 안식일, 음식 규정 등) 역시 또 다른 형태의 도전을 제공했다. 바울은 골로새 교회가 이 두 가지 도전 – 헬라 철학을 비롯한 세속적·이성주의적 도전과, 율법주의적 교리·의식주의적 신앙 형태 – 사이에서 흔들리는 것을 염려했다. 이 둘은 서로 정반대처럼 보이나, 사실상 복음의 본질을 흐린다는 점에서 동일한 위험성을 가진다.

헬라 철학에 근간을 둔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실제 사건을 그저 “하등한 육체의 영역”에 속한 것으로 폄하하면서, 오직 영적인 것만을 추구하려고 했다. 이때 영적 계시나 천사 숭배 등을 강조하면서, 교회 안에 혼란을 일으켰다. 이러한 사람들이 말하는 ‘영지(靈知, Gnosis)’란, 오직 소수의 특수한 지식을 통해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식의 주장이었다. 이것이 바로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골로새서 2장 18절)는 바울의 경고 배경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가르치는 이들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붙들지 아니하는, 잘못된 영적 우월감이나 신비주의에 빠진 것이다.

반면, 또 다른 도전인 율법주의는 구원의 근거를 그리스도의 은혜가 아니라, 특정 의식이나 규정의 준수에 둔다. 바울은 이런 주장을 펼치는 이들을 갈라디아서에서도 비판했는데, “손할례당”이라고 칭하며, 손으로 행하는 육체적 할례가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 복음의 진리를 지켜야 함을 강조했다. 골로새서에서도 마찬가지로, 절기나 월삭, 안식일 등을 지켜야만 하나님께 의로움을 인정받는다는 식의 주장을 교회가 수용하지 않도록 경고했다. 바울은 이것을 “장래 일의 그림자”라고 부르면서, 실체는 오직 “그리스도께 속한다”(골로새서 2장 17절)고 단언한다.

결국 이 두 가지 도전은 각각 ‘세속적 이성’과 ‘율법적 의식주의’라는 형태로 교회를 흔들고 있었다. 바울은 이런 상황 속에서 “위의 것을 찾으라”고 강력히 촉구한다. 왜냐하면, 진정한 신앙의 본질은 세상의 철학적 지식이나 종교적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곧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에 뿌리를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위의 것을 찾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 그리스도”를 주목한다는 뜻이다(골로새서 3장 1절).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은 이미 죽음과 죄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과 승천을 통해 완전한 승리를 이루신 분이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이 땅에서의 삶이 아무리 힘겹고 고통스러워도, 궁극적으로 승리하신 주님과 연결된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장재형목사는 이런 바울의 가르침을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이 현실적으로 적용할 수 있도록, “영적 모드 전환의 필요성”을 거듭 강조한다.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배우면서도, 우리의 사고방식이 여전히 세상적 가치관과 습관에 갇혀 있다면, 결국 “위의 것”보다는 “땅의 것”을 더 우선시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지 말라”(골로새서 3장 2절)고 명령한다. 여기서 “생각한다”라는 동사는 단순한 지적 사유가 아니라, 관심과 애착을 어디에 두느냐는 문제와도 직결된다. 즉, 우리의 일상적 관심사가 세상의 성공이나 소유, 명예에만 쏠려 있다면, 그것은 곧 “땅의 것”만을 추구하는 모드에 머물러 있는 것이 된다.

물론 이것이 “세상에서 손을 떼라”는 식의 현실 도피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도 생업이나 일상생활을 영위하되, 그 중심에는 주님을 향한 경외와 감사가 있어야 한다고 계속 가르친다. 바울 자신도 텐트메이커로서 생계를 유지하였고, 세상을 떠나서 살지 않았다. 다만 그는 어디서든지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최우선 순위를 두었다. 땅의 것을 생각지 말라는 것은, 세상 일에 무책임하라는 뜻이 아니라, 우리가 궁극적으로 소망을 둬야 할 지점이 세상적 가치가 아닌 “위의 것”임을 기억하라는 말이다.

구체적으로 “위의 것을 찾으라”는 권면은,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 나라의 가치에 근거해 움직이도록 모드 전환을 하라는 의미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천국’ 혹은 ‘하나님 나라’의 가치란, 죄 용서와 사랑, 섬김과 겸손, 기쁨과 평안, 나눔과 희생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 바울은 이를 골로새서뿐만 아니라 여러 서신에서 반복적으로 언급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면, 우리의 가치관도 예수님을 닮아가야 한다. 신앙생활은 부활절 하루나 크리스마스 시즌에만 기뻐하는 행사가 아니라, 매일매일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삶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골로새서 3장 3절에서 그 이유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라”라고 밝힌다. 우리의 옛 사람은 이미 죽었고, 이제 신자의 진정한 생명은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 ‘감추어져 있다’는 표현은 보호와 안전, 그리고 궁극적 발견을 암시한다. 지금 당장은 세상적으로 큰 부귀를 누리지 못하더라도, 진정한 생명은 하나님 품 안에 보존되며, 종말의 때 혹은 예수님의 재림의 때에 완전히 드러난다는 의미다. 따라서 “위의 것을 찾으라”는 명령은, 단지 현세의 삶을 부정하는 태도가 아니라,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하늘의 상속을 매일 바라보고 누리라는 초대인 셈이다.

이처럼 바울의 가르침은 오늘날에도 큰 도전을 준다. 현대 사회는 눈에 보이는 업적과 소유, 지위를 지극히 강조한다. SNS에 끊임없이 자신을 과시하거나, 물질적 성공으로 모든 것이 평가되는 풍토가 만연하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조차 이런 세속적 가치관이 그대로 들어오고, 심지어 율법적 잣대와 결합해 버리면, 복음의 본질은 퇴색되고 만다. “예수를 믿으면 복을 받는다”라는 말이 자칫 “세상적인 성공을 더 쉽게 얻는다”라는 의미로 변질될 위험도 있다. 하지만 바울은, 율법주의든 세속적 철학이든, 오직 그리스도 중심의 복음과 거리가 멀면 결국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일갈한다.

그러므로 “위의 것을 찾으라 – 세속적 도전과 영적 모드 전환”은, 신자가 스스로 점검해야 할 과제를 분명히 보여준다. 우리는 주일예배나 성경 공부를 통해서는 “위의 것”을 말하지만, 실제 삶에선 여전히 “땅의 것”에 휘둘릴 때가 많다. 바울은 이 모순된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분명한 선언을 던진다.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이는 단순한 조언이 아니라 명령이며, 신자라면 반드시 따르도록 초대받은 길이다. 세속적 욕망과 율법주의 모두를 넘어서는 복음의 능력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삶의 태도를 ‘영적 모드’로 전환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전환은 교회를 통해서도 구체화된다. 교회 공동체는 신자들에게 복음적 가치와 실천을 배우고 나눌 수 있는 장을 제공한다. 장재형목사를 비롯한 여러 목회자들은, 예배와 말씀 선포, 교제와 봉사를 통해 신자들이 “위의 것”을 실제 삶에서 구현하도록 돕는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각 사람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영적 모드 전환’에 자발적으로 순종해야 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이 말씀을 붙들고, 우리의 관점과 우선순위를 하늘의 시각에 맞추어야 함을 날마다 되새겨야 한다.

따라서 세속적 도전과 율법적 도전에 대응하는 바울의 권면인 “위의 것을 찾으라”에 담긴 깊은 의미를 풀어내고, 이를 ‘영적 모드 전환’이라는 표현으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우리는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지만, 그 중심과 궁극적 목표는 하늘에 두고 살아간다. 이 역설적인 태도는,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아난 자”가 누리는 삶이다.

  •  죽었고 다시 산 생명 – 영광의 소망과 삶의 실천

바울은 골로새서 3장 3절부터 4절에 걸쳐, 신자의 존재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고 선언하고,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신자가 지닌 궁극적인 소망, 곧 영광의 도래와 부활의 완성에 관한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 교리를 상세하게 설명하기도 했는데, 바로 그 맥락에서 골로새서에서도 “죽었고 다시 산 생명”에 대한 확신이 강조된다. 이 확신이야말로 신자의 일상을 지탱해 주는 동력이 된다.

신자가 “죽었다”는 것은, 단지 옛 생활을 어느 정도 개선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는 전적인 단절을 뜻한다. 구약에서 제물은 죽임을 당해야 하나님께 드려졌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옛 사람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완전히 죽었다. 더 이상 죄의 지배를 받지 않는 새로운 존재가 되었음을 말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는 것은, 과거의 죄와 죽음의 굴레에서 해방되어, 이제부터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가리킨다. 우리의 삶은 여전히 세상 한복판에서 펼쳐지지만, 그 본질은 이미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장례식에서 종종 울려 퍼지는 찬송, “그의 죽음이 나의 부활”이라는 가사가 있다. 그것은 많은 성도가 즐겨 부르는 찬송이지만, 동시에 장례식에서 부를 때마다 우리는 “죽었다가 다시 사는” 부활 신앙을 상기하게 된다. 세상의 장례는 보통 슬픔과 이별의 분위기에 휩싸이지만, 크리스천 장례에서는 부활의 소망을 노래하기에 완전히 절망적인 분위기로만 흘러가지는 않는다. 이는 영생을 소유한 자들에게 주어진 특권이다.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한복음 11장 25~26절)고 하신 말씀대로, 신자는 육체의 죽음을 통과해도 여전히 영원한 생명 안에 거한다는 믿음을 품는다.

장재형목사는 여러 차례 설교에서 이 부활 신앙의 실제적 의미를 강조해 왔다. 신자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단순한 정신 승리나 막연한 낙관론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 부활의 보증이 된다”는 믿음에 근거한다. 또한 이 부활 신앙은 단순히 미래에만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삶을 변화시키는 강력한 동인이 된다. 이 땅에서의 삶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좀 더 담대하고 자유롭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선택할 수 있다. 설령 세상의 기준에서 손해를 보는 상황이 생기더라도, 궁극적인 상급과 영광을 바라보며 버틸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죽었고 다시 산 생명”을 소유한 자의 구체적 삶은 어떠해야 할까? 바울은 이어지는 골로새서 3장 5절 이하에서 윤리적 권면을 펼친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3장 5절). 이미 “위의 것”을 선택했으니 “땅의 것”을 버리라는 논리적 결론이다. 죽었고 다시 산 생명은, 과거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간다. 예전에는 욕망과 정욕, 소유욕에 이끌렸다면, 이제는 하늘 가치와 영원한 생명을 기준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탐심이 우상 숭배라는 말은, 우리가 세상 재물을 추구하는 마음이 결국 하나님보다 물질을 더 우선시하게 만드는 심각한 죄임을 환기한다. 실제로 현대 사회에서 우상 숭배는 더 이상 돌이나 나무 앞에 절을 하는 형태만을 말하지 않는다. 자신의 욕망과 이익을 신격화하거나, 세상의 명예와 권력을 하나님보다 더 높이는 모든 행위가 우상 숭배가 될 수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아난 자라면, 이러한 세속적 우상 숭배 형태를 과감히 떨쳐 버려야 한다고 촉구한다.

이를 위해 우리에게는 지속적인 ‘영적 경계’가 필요하다. 아무리 복음을 알고, 교회를 열심히 다닌다고 해도, 세상 속에서 수많은 유혹이 밀려온다. 때론 율법주의의 형태로, 때론 세속적 철학이나 문화적 트렌드로, 우리를 복음의 본질에서 벗어나게 만든다. 이때 “내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다시 살았다”는 의식이 우리를 붙잡아 준다. 옛 생활 방식에 매이지 않고, 새 생명에 합당한 길을 택할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

또한 바울은 골로새서 3장 4절에서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고 선언함으로써, 현재의 고난이나 불완전함을 넘어서는 ‘궁극적 완성’을 바라보게 한다. 세상에서 겪는 시험과 환난을 통해 지치고 낙심하기 쉽지만, 그리스도 안에서의 생명은 이미 하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미래를 보장받고 있다. 부활 신앙은 현재의 고통을 무시하거나 축소하라는 말이 아니라, 그 고통마저도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 안에서 해석하고 극복할 수 있게 하는 소망의 근거가 된다.

실제로 교회 역사 속에서, 수많은 성도가 이 부활 신앙과 영생의 확신을 붙들고 고난의 길을 걸어갔다. 순교를 당하거나, 혹은 극심한 가난과 핍박을 받으면서도, 그들은 “위의 것을 찾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가 다시 산 생명”이라는 자각 때문에 끝까지 믿음을 지켰다. 이를 위한 능력이 인간 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 신자가 놀랍게도 세상의 폭풍우 한가운데서도 기쁨과 담대함을 간직할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죽었고 다시 산 생명”을 지닌 신자는, 궁극적으로 “영광 중에 나타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고대하면서 현세의 삶도 충실히 살아간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겸손과 섬김, 사랑으로 이웃을 대하면서, 동시에 복음 증거와 선교 사명에 매진한다. 장재형목사는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며, 삶으로 복음을 드러내는 실천이 필요함을 거듭 역설한다. 이 세상에서 우리의 삶은 영생을 보증받은 자로서 하나님께 예배하고, 사랑을 나누며, 진리를 전하는 과정이다. 그 과정 자체가 하나님의 통치와 은혜의 도구가 된다.

또한 바울이 말하는 ‘영광의 자리’, 곧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는 사실은, 그분이 모든 권세와 능력의 절정에 계신 왕이심을 의미한다. 그 예수님과 연합된 신자는, 결국 승리의 최종 장면에 동참할 것이며, 이 사실이 바로 성도의 궁극적 소망이 된다. 따라서 이 땅에서의 고난과 수고가 결코 헛되지 않으며,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모든 것을 선하게 갚아 주신다는 믿음이 우리를 이끌어 간다.

정리하자면 “죽었고 다시 산 생명 – 영광의 소망과 삶의 실천”은, 신자의 궁극적 미래가 영광으로 마무리됨을 전제하면서, 현재의 삶에서 어떻게 그 소망을 실천해 나갈 것인가에 대한 답을 제시한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다시 살았다. 그러므로 우리 삶은 단지 세속적 욕망의 노예가 아니며, 옛 사람의 죄성에 속박당하지 않는다. 이제 우리는 탐심과 우상 숭배, 음란과 악한 정욕을 끊어내고, 오히려 사랑과 자비, 겸손과 온유, 오래 참음, 용서와 화해로 대표되는 ‘그리스도의 성품’을 입어야 한다. 이것이 부활을 소유한 자들이 세상 안에서 펼쳐야 할 윤리적 실천이며, 장차 올 영광을 앞당겨 맛보는 길이기도 하다.

또한 우리가 단지 자기 수양이나 고행의 방식으로 이 길을 가는 것은 아니다. 이미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부요함과 자유를 얻었으므로, 그 은혜에 근거해 순종하는 것이다. 어느 누가 “영생을 얻고, 구원을 받았고, 길을 찾았고, 진리를 얻었으니 주는 나의 만족이다”라고 말하면서 세상의 헛된 것들에 지나치게 마음을 빼앗기겠는가? 바로 이 은혜야말로, 세상 가치관을 뛰어넘는 영적 자유를 우리에게 허락한다.

결국 삶의 마지막 순간, 즉 장례식에 이르러서도 우리는 부활 소망을 노래할 수 있게 된다. 신자를 떠나보내는 장례식에서 예배와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모습은, 세상적인 관습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것이며, 이미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영생의 실제를 반영한다.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예수님의 선언이 그 자리에 선포될 때, 장례식은 슬픔만 있는 자리가 아닌, 참된 안식과 영광을 바라보는 자리로 변모한다.

마찬가지로, 교회 공동체나 목회 현장에서 우리는 이 ‘죽었고 다시 산 생명’의 능력을 날마다 확인하게 된다. 때로는 연약한 지체를 돕고, 낙심한 이들에게 다시 일어설 힘을 주며,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이 부활 소망이 강력히 작동한다. 장재형목사를 포함한 많은 목회자들은 이러한 부활 신앙의 실제가 교회 내에서 더 깊이 체화되도록 돕는 역할을 감당한다. 이는 단지 지식적 가르침이 아니라, 삶과 죽음의 현장 속에서 확실히 경험되는 복음의 능력을 전승하는 것이다.

곧, 우리가 이 땅에서 부유함과 가난함, 웃음과 눈물, 성공과 실패를 모두 경험할지라도,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고 다시 산 생명”을 지녔기에 결코 흔들리지 않는 정체성을 가진다. 세상은 수많은 변화와 도전으로 가득 차 있지만, 이 부활 신앙이 영혼의 닻이 되어 주고, 교회 공동체 역시 이 믿음 위에 굳건히 선다. 그리고 언젠가 주님이 영광 중에 나타나실 그날, 우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는 약속을 붙들고 오늘을 살아간다.

이것이 바울이 전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다. 죽었고 다시 산 생명, 그것이 신자의 정체성이다. 더 이상 죄의 종이나 율법의 종이 아니며, 세상 철학이나 헛된 우상에 구속되지 않는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부활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자유케 된 존재로서, “위의 것을 찾는” 방향으로 인생의 항해를 계속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세상에 속하지 않은 거룩한 가치관과 윤리를 실천하며, 궁극적으로 다가올 영광을 고대한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신자가 누리는 부활 신앙의 능력이자, 골로새서 3장에 담긴 복음의 강력한 선포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복음의 역동성을, 장재형목사를 비롯하여 여러 목회자들이 계속해서 전하고 가르치면서, 교회 공동체가 “죽었고 다시 산 생명”을 살아내도록 이끌고 있다.

결국 정리해 보면, 첫 번째 소주제에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 자의 정체성과 은혜’라는 측면을 확인했다. 두 번째 소주제에서는 그 정체성을 어떻게 ‘위의 것을 찾는’ 삶으로 구체화하는지, 세속적 도전과 율법주의를 넘어서는 영적 모드 전환에 대해 살폈다. 마지막 세 번째 소주제에서는, “죽었고 다시 산 생명”을 실제로 살아내며, 그 생명이 궁극적으로 영광 중에 나타날 것이라는 신자들의 소망과 실천을 다루었다. 이는 모두가 연결된 흐름이며, 바로 골로새서 3장의 핵심 메시지라 할 수 있다.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었으며, 이는 곧 영원한 생명과 부활의 소망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우리는 그 믿음으로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명을 감당하게 된다. 이렇게 세 가지 소주제를 관통하는 공통분모는 결국 ‘복음의 능력’이며, 그 복음 안에서 모든 것이 새로워지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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