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디옥교회 모델로 본 교회 본질의 회복: 장재형 목사의 사역 철학

장재형목사는 안디옥교회가 기독교 역사에서 단순한 지역 공동체를 넘어, 복음이 유대라는 민족적 울타리를 허물고 보편적 생명력으로 뻗어 나간 결정적 분기점으로 평가받는다고 합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복음의 뿌리를 내린 곳이라면, 안디옥은 그 생명이 세계의 토양으로 이식되어 ‘그리스도인’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이 탄생한 현장입니다. 장재형(올리벳대학교 설립) 목사는 이 역사적 사건을 오늘날 교회가 회복해야 할 원형적 이정표로 제시합니다. 그가 강조하는 안디옥교회의 정신은 성령의 주권적 인도, 견고한 교리적 토대, 공교회적 연합, 그리고 파송의 역동성이 하나로 어우러진 신학적 표준입니다.


성령의 주권과 사역의 우선순위

장재형 목사가 안디옥교회에서 가장 먼저 주목하는 것은 사역의 주체가 ‘사람의 기획’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교회는 효율적인 조직을 만드는 집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응하는 유기적 공동체입니다. 안디옥 지도자들이 금식과 기도 중에 성령의 음성을 듣고 바나바와 바울을 파송한 장면은 교회의 결정 방식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장재형 목사는 현대 교회가 재정 규모나 마케팅적 전략에 매몰되어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보다 인간의 속도에 매혹되는 현상을 경고합니다. 그에게 있어 교회의 성공은 외적 성과가 아니라 “어떤 영으로 움직이는가”라는 본질적 질서의 회복에 있습니다.


진리 안에서의 성숙한 공교회적 연합

안디옥교회의 영성은 단지 뜨거움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안디옥이 복음의 본질을 지키기 위해 ‘정확함’을 추구했음에 주목합니다. 사도행전 15장의 예루살렘 회의는 복음이 은혜의 사건임을 확증한 치열한 교리적 분투였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여기서 ‘공교회성’의 원리를 이끌어냅니다. 교회는 개별적 자율성에 갇힌 사적 모임이 아니라,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 하나의 신앙을 공유하는 보편적 몸의 일부여야 합니다. 그가 꿈꾸는 안디옥적 모델은 연합을 위해 진리를 희석하는 타협이 아니라, 진리를 중심으로 한 성숙한 일치와 상호 교통을 의미합니다.


파송의 베이스캠프: 교회의 존재 방식

장재형 목사가 현대 교회를 향해 던지는 가장 강력한 메시지 중 하나는 “교회는 파송을 위한 베이스캠프”라는 선언입니다. 교회는 내부적 만족을 위해 닫힌 공간이 아니라, 세상을 향해 흐르는 복음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안디옥은 바울의 선교를 뒷받침하는 단순한 후원 창구가 아니라 기도와 훈련, 분별이 집약된 네트워크였습니다. 그는 교회가 사람을 붙잡아 두는 데 급급하면 복음이 정체되지만, 역설적으로 사람을 내보낼 때 공동체는 더 깊고 넓어진다고 통찰합니다. 파송은 소모가 아니라 교회가 교회다워지는 생명의 순환입니다.


골로새서의 기독론: 우주적 통치자 그리스도

이러한 안디옥 정신을 신학적으로 뒷받침하는 축은 장재형 목사의 골로새서 강해에서 두드러집니다. 감옥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가장 광대한 그리스도의 주권을 선포한 바울처럼, 교회는 환경이 어려울수록 본질적인 중심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는 골로새서 1장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단순한 윤리적 스승으로 축소하려는 시도를 경계하고, “만물의 창조자이자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위엄을 강조합니다. 그리스도의 자리가 낮아질 때 교회는 세속적 유행과 혼합주의 앞에 방향을 잃기 때문입니다.


교리와 삶의 접속: 열매 맺는 신앙

장재형 목사는 교리의 견고함을 지적 체계로만 보지 않고 삶을 지탱하는 뿌리로 해석합니다. “그 안에서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으라”는 권면처럼, 교리는 습관과 방향이 되어야 합니다. 그는 ‘듣고, 깨닫고, 열매 맺는’ 복음의 순환을 강조하며, 예배의 감동이 일상의 윤리적 선택으로 이어지는지를 묻습니다. 선교가 단발성 이벤트로 끝나지 않으려면 깊은 교리적 양육이 선행되어야 하며, 뿌리가 깊은 교회만이 파송을 통해 소진되지 않고 더 성숙해질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지론입니다.


디지털 시대와 문화선교의 유연성

장재형 목사는 온라인 플랫폼과 미디어를 “현대판 로마 도로”로 규정하며, 시대적 기술을 선교적 지혜로 전환할 것을 독려합니다. 안디옥이 다문화 도시라는 환경을 복음 확장의 발판으로 삼았듯, 오늘날의 교회도 디지털 환경을 선교의 공간으로 재해석해야 합니다. 다만 기술은 연결을 만들 뿐 진정한 연합은 영적 관계에서 오기에, 여전히 본질은 기도와 감사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복음의 핵심은 고수하되 그 형식은 현지 문화와 언어 속에 겸손하게 입히는 ‘본질적 견고함과 문화적 유연성’의 조화가 필요합니다.


성령으로 시작해 세계로 향하는 공동체

카라바조의 명화 ‘성 바울의 회심’에서 바울을 덮친 압도적인 빛처럼, 교회는 인간의 결단이 아닌 하나님의 사로잡힘에서 시작됩니다. 장재형 목사가 강조하는 안디옥교회의 정신은 결국 성령으로 시작하여 그리스도의 진리 위에 서고, 공교회적 연합으로 지탱하며, 세계를 향해 파송되는 공동체로 요약됩니다.

이 네 가지 요소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기도와 감사가 약해지면 교회는 금세 피로한 인간 조직으로 전락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을 중심에 모실 때, 교회는 내적 양육과 외적 파송, 지역적 고유성과 보편적 연합을 동시에 이룰 수 있습니다. 장재형 목사가 붙드는 이 비전은 “모여서 예배하고 흩어져 복음을 사는” 역동적인 교회의 원형을 오늘날 우리에게 다시금 일깨워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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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와 유다, 중생의 갈림길: 장재형 목사

예수님의 공생애가 마지막을 향해 가던 저녁, 요한복음 13장은 가장 숨이 막힐 듯한 긴장 속에서 제자들의 모습을 비춥니다. 한 자리에 둘러앉아 있던 제자들 가운데, 눈에 띄게 대조되는 두 인물이 있었습니다. 누구보다 열정적이고 충성스러웠던 베드로와, 돈궤를 맡아 살림을 챙기던 동시에 은 삼십에 스승을 넘긴 유다입니다. 장재형(장다윗) 목사는 이 장면을 단순한 성격 비교가 아니라, 두 사람을 통해 드러나는 “참된 중생(重生)의 본질”을 보여주는 거울로 읽어냅니다. 그리고 오늘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고백하는 우리가 이 거울 앞에서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직면하도록 초대합니다.

많은 이들이 잊고 지나가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을 배반한 사람이 유다 한 명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죽기까지 따르겠다”고 호언장담하던 베드로 역시 위기의 순간에 세 번이나 스승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둘 다 무너졌고, 둘 다 주님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극명한 갈림길에 서게 되죠. 한 사람은 주님께 돌아왔고, 다른 한 사람은 스스로 돌아올 길을 끊어 버렸습니다. 장재형(올리벳대학교 설립) 목사는 그 차이를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상징, 곧 “목욕한 자”와 “발을 씻는 자”의 비유에서 찾아갑니다.

발을 씻기시는 자리에서 베드로는 난감함과 당황함에 거부부터 합니다. 그는 결코 발을 씻기지 못하게 하겠다고 말하지만, 예수님은 “내가 너를 씻기지 않으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다”는 단호한 말씀으로 그를 멈춰 세우십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극단적으로 반응하며 발뿐 아니라 온몸을 씻어달라고 부탁합니다. 예수님은 그때 중요한 원리를 드러내십니다. “이미 목욕한 자는 발만 씻으면 된다”고 말이죠. 장재형 목사는 이 대목을 ‘중생의 확증’이라는 관점으로 설명합니다. 베드로는 이미 주님의 사랑과 말씀, 은혜로 인해 근본적으로 새 사람이 된 사람, 즉 완전히 “목욕을 마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넘어지고 죄를 범했어도, 다시 주님께로 돌아올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었습니다.

중생은 단순한 감정의 격변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이 온 존재를 관통하는 “철저한 목욕”입니다. 과거의 죄가 씻기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새롭게 세워지는 사건입니다. 로마서 8장이 선언하듯, 그 이후에는 어떤 것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중생을 “내 모습은 그대로인데 천국 입장권만 손에 든 상태”로 오해하지 말라고 강조합니다. 중생은 옛 사람이 십자가에서 죽고, 주님의 생명이 실제로 살아나는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구절을 중생의 중요한 열쇠로 풀이합니다. 물은 죄 씻음과 심판을 동시에 상징하며, 세례는 “죄에 대해 죽고, 의를 향해 살겠다”는 공개적이고도 단호한 선언입니다. 그러나 물이 몸을 씻을 수 있을지라도, 마음 깊은 곳까지 변화시키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역사가 필요합니다. 성령은 진리를 비추시고, 그 진리를 사랑하게 하며,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이 실제로 새 생명으로 우리 안에서 작동하도록 만드시는 분입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거듭나는 일”입니다.

이 대목에서 카라바조의 「그리스도의 체포」가 주는 상징은 의미심장합니다. 어둠 속에서 유다가 입맞춤으로 예수님을 배반하는 한편, 제자들은 혼란 속에서 도망치려 합니다. 빛은 오직 예수님의 얼굴 위에만 머물고, 주변의 인물들은 어둠 속에서 흔들립니다. 이는 베드로와 유다의 마음을 비유적으로 보여줍니다. 두 사람 모두 흔들렸지만, 차이는 “빛 앞에 다시 설 용기”에 있었습니다. 유다는 자신이 세운 기준 안에서 스스로를 정죄했고, 결국 빛을 향해 다시 걸어가지 못했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아니라 자기 판단을 의지한 비극적인 결말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단은 죄를 짓게 유혹한 뒤, 곧바로 정죄의 목소리로 바뀌어 “너는 끝났다”며 절망을 심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하지 못한 사람일수록 이 속삭임에 무너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우리가 지은 죄가 아무리 크라도, 하나님께 돌아오는 길을 막을 수 있는 죄는 없습니다. 때로는 공동체의 도움이나 전문적인 상담이 필요할 수도 있지만, 결론은 하나입니다. 절망이 아닌 회개가 하나님의 길입니다.

반면 베드로는 부족함이 많았지만 주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한 사람이었습니다. 풍랑 속에서 붙들어 주신 손,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던 부활하신 주님의 시선… 그 기억이 있었기에 그는 절망 속에서도 끝내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사랑이 자신을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고, 그 믿음이 그를 다시 주님께로 이끌었습니다. 이것이 “한 번 목욕한 자”의 힘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중생의 본질을 몸소 증언한 사람입니다. 그는 한때 자신의 의로 가득 찬 사람이었지만,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옛 자아가 무너지고,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 안에서 새롭게 뛰기 시작한 것입니다.

중생은 한 번의 목욕과 같습니다. 그 이후의 삶은 발을 씻는 과정입니다. 세상 속을 걸으며 다시 죄의 먼지를 묻히지만, 이미 목욕한 자는 언제든 주님께 나아와 발을 씻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의 “정죄함 없음”의 약속은 바로 그런 사람에게 주어진 선언입니다.

결국 질문은 우리에게 돌아옵니다. 나는 지금 어떤 모습으로 주님을 따르고 있는가? 유다처럼 자기 계산과 자기 의에 사로잡힌 채 스스로를 정죄하는 길을 걷고 있는가? 아니면 베드로처럼 넘어지더라도 다시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는 길을 선택하고 있는가? 장재형 목사는 이 물음 앞에 정직하게 서라고 권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깊은 사랑으로 죄인에게 다가오셨는지 보여줍니다. 죄가 깊을수록 더 깊이 주님께 달려가야 합니다. 스스로 버티지 말고, 공동체와 도움을 요청해야 할 때는 겸손히 요청해야 합니다. 신앙은 혼자 싸우는 일이 아니라 서로의 발을 씻겨 주며 동행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베드로와 유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따라야 할 길과 피해야 할 길을 동시에 보여 줍니다. 우리 안에 있는 유다적 요소가 십자가 앞에서 죽어야 하며, 베드로처럼 회개하며 다시 일어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절망의 역사를 뒤로하고, 회복과 소망의 길을 걷게 됩니다.

이 글은 요한복음 13장을 중심으로, 중생과 회개, 성령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복음의 심장을 다시 돌아보는 묵상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단순한 습관을 넘어서, 실제로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살아나는 변화로 이어지기를 소망합니다. 단번에 목욕한 자로서, 날마다 발을 씻는 자로서, 십자가와 부활 사이의 길을 오늘도 걸어가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레이스앤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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