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육신과 십자가 – 장재형목사

1. 약속으로 주어진 복음과 성육신의 신비

장재형(장다윗)목사가 강의한 로마서 1장 2~7절을 묵상하며, 우리는 먼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복음이 왜 우리 가운데 ‘약속의 성취’로 나타난 것인지를 깊이 살펴볼 수 있다. 장재형 목사는 이 말씀을 통해, 복음이 결코 인간의 이론이나 사상, 혹은 어느 개인의 사설이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의 약속에서 비롯된 것임을 강조한다. 곧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롬 1:2)라는 말씀 안에는, 하나님이 인류 역사 속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이 복음이 선포될 것을 계획하셨다는 놀라운 섭리가 담겨 있다.

우리는 복음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낯선 가르침이 아니라, 구약시대를 통틀어 계속해서 예언되어 온 “그리스도”라는 분에 대한 구체적인 약속임을 기억해야 한다. 이때 바울이 말하는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으로 오셨다’는 선언으로 정리된다. 바울은 로마서 1장 3절에서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라고 증언하며, 예수 그리스도가 정말로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셨음을 선포한다. 성경의 예언은 모두 이 사실을 향하고 있었다.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선지자들과 예언자들을 통해 당신의 섭리를 때마다 드러내셨고, 그 최종적 완성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Incarnation)’으로 나타난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여기서 ‘기독교는 죄인의 종교’라는 사실을 다시금 부각시킨다. 예수님이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찾아오셨다는 복음서의 선포가, 바로 이 성육신 사건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죄인들의 삶 한가운데 거하셨다.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다”는 구절은 그저 예수께서 다윗 왕조의 후손이라는 역사적·계보적 사실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이 진짜 인간으로 세상에 들어오셨음을 알리는 상징적 표현이다.

이 성육신 사건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가장 큰 특징이자 역설이다. 바울은 빌립보서 2장 6~8절에서 이를 ‘케노시스(Kenosis)’, 곧 자기를 비우심이라 표현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본래 하나님과 동등되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음을 강력하게 선언한다. 참 하나님이신 그분이 동시에 참 인간이 되셨다는(“참 하나님과 참 인간”, Vere Deus & Vere Homo) 이 놀라운 진리는, 그리스도인이 믿는 ‘복음’의 결정적 근거다.

바울은 로마서 1장 3~4절에서 바로 이 케노시스와 성육신, 그리고 그 결과로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짧지만 강력하게 요약해 놓았다. 예수님이 인간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셨고, 성결의 영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이것이 곧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신 예수 그리스도’이다(롬 1:4, 개역한글에는 “선포되셨으니”를 “인정되셨으니”라 표현). 사람이 보기에는 죄인의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았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죽음을 이기는 자’로 인정하셨다는 뜻이 여기에 담겨 있다.

복음은 곧 이 역사적·실존적 사건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인이 전하는 메시지는 “죄인을 살리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이지, 인간의 도덕적 교훈이나 추상적 철학이 아니다. 바울 시대의 헬라 철학자들은 ‘진리(로고스)’를 찾기 위해 평생을 투자했지만, 결국 ‘사람의 힘’만으로는 그 로고스에 이를 수 없었다. 그러나 요한복음 1장은 선언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요 1:14). 곧 모든 철학자와 현자들이 그토록 갈구했던 진리가, 실제로 사람이 되어 이 땅에 거하셨다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이를 가리켜 “다윗의 혈통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르며, 동시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다”고 말함으로써, 예수님이 역사 속에서 진정한 인간이 되셨고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임을 분명히 증거한다.

장재형 목사는 우리가 이 복음 앞에 서게 될 때, 우리의 지성과 이성을 넘어선 “은혜”가 임한다고 가르친다. 이는 곧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Unconditional Love)과 전적인 선물(Surprising Gift)이다. 복음을 모르고 살던 죄인이 이 메시지를 듣고 나를 위해 낮아지신 그리스도의 사랑에 눈물 흘릴 때, 그게 바로 은혜다. 바울이 경험한 것도 이것이다. 과거 그는 ‘교회를 박해하고, 그리스도인을 잔인하게 핍박하던 죄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찾아온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완전히 거꾸러졌다. 그가 곧장 복음의 사도가 되어, 가장 극렬하게 복음을 외치고, 교회를 세우며, 자신의 모든 생애를 이 ‘약속의 복음’을 전하는 데 바친 것이다.

결국 복음은 ‘구원의 메시지’이자 ‘역사의 완성’이다. 하나님이 보내주신 약속의 아들, 예수님이 인간으로 오셨고, 그분이 십자가와 부활로 죄와 죽음을 깨뜨려버리셨다. 이 사실이 이미 선지자들을 통해 약속되었고, 실제로 우리 눈앞에 드러났다. 이것이 복음이며, 그렇기에 복음이 우리 삶을 뒤바꾼다. 또한,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벧전 3:15)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이 복음에 관해 묻는 세상에 대답할 것을 준비해야 한다. 그 대답이 곧 ‘간증’이며, ‘내가 들은 복음, 내가 만난 그리스도’를 그대로 전하는 것이다.

바울이 “내가 십자가와 부활밖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우리의 선교와 전도는 내 생각, 내 지식을 뽐내는 장이 아니다. 오직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그 십자가의 사랑’과 ‘나를 새 생명으로 불러 일으키신 부활의 권능’을 증언하는 것이다. 복음에 대해 누군가 묻거든, 우리는 그리스도가 어떻게 내 삶에 들어오셨는지, 어떻게 나를 변화시키셨는지, 그리고 어떻게 나로 하여금 영원한 소망을 품게 하셨는지 증거하면 된다. 바울 역시 자신의 편지를 시작할 때, “나는 복음을 위해 부름받은 사람”이라는 고백으로 서문을 열고, 그 복음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복음 안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증언했다.

결국 ‘복음’은 세상과 대적하는 신비한 이론이나 우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오래전부터 예언해 왔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실제적 사건이다. 또 복음은 한없이 거룩하신 하나님이 죄인인 우리를 직접 찾아오셔서 구원하시려는 ‘사랑의 이야기’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 성육신의 사랑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우리 안에 들어오셨다”는 것이야말로 기독교의 핵심이라고 강조한다. 그분이 들어오셨기에, 우리가 죄의 사슬에서 풀려나고, 새로운 소망과 생명을 얻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이 복음이 주어졌을 때, 우리의 태도는 자연스레 “믿고 순종함”으로 이어져야 한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한다”(롬 1:5)는 구절의 의미다. 곧 과거에는 전혀 구원의 언약 밖에 있었던 자들이, 이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복음을 듣고, 그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복음 안에서 “믿어 순종”하게 된 그들은, 과거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죄의 습관에 사로잡혀 살았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죄사함을 받고, 부활로 주어진 생명의 능력에 힘입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

바울이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롬 1:7)라고 호칭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복음의 능력 때문이다. 로마 제국이라는 거대한 문명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지배 이념이나 다신교적(多神敎的) 풍조와 충돌했지만, 오히려 복음의 가치를 붙들고 담대히 복음을 전했다. 그 결과로, 인간적 눈으로 보면 보잘것없는 소수 집단에 불과했던 교회 공동체가 역사를 움직여 왔다. 바울이 로마서 전체에서 복음의 위력과 의의, 그리고 그 복음에 의해 변화된 삶을 반복하여 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성육신은 “말씀이신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엄청난 신비이며, 동시에 우리에게는 “절망을 뚫고 들어온 광명”이다. 완전한 진리이자 영원한 빛이신 하나님이, 죄와 어둠에 사로잡힌 인간 가운데 친히 들어오셨다는 것은, 그 자체로 소망의 선언이다. 자칫 머리로만 그칠 수도 있는 ‘인간의 사상과 철학’을 넘어, 실제로 내가 만나고 체험할 수 있는 ‘인격적 진리’가 되신 것이다. 이것이 성육신의 위대함이다. 여기서부터 복음은 단지 귀에 들려오는 소문이 아니라, 가슴을 파고드는 ‘생명력 있는 메시지’가 된다.

한편, 이 성육신 사건은 우리에게 “거룩한 삶으로의 초대”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예수께서 우리와 동일한 몸을 입으셨다는 것은, 그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한시적으로 인간의 옷을 빌려 입으신 게 아니라, 우리에게도 그리스도를 닮은 거룩한 인격과 삶을 살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음을 의미한다. 바울이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롬 1:7)라고 칭할 때,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가 걸어가신 길을 따르는 자들”이라는 뜻이다. 성경의 인물들을 보면, 그들은 결코 죄가 없거나 완벽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구속사 속에서 그리스도의 은혜를 덧입었고, 예수님이 보여주신 그 낮아짐과 희생, 그리고 부활의 능력을 본받아, 새 생명의 길로 걸어갔다. 이것이 ‘성도’의 본질이다.

결국 소중한 것은, ‘성육신을 통해 역사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지적으로만 알고 있는 수준에서 끝나지 않고, 그분의 자기 비하와 희생을 ‘삶’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장재형 목사가 반복해서 설교에서 강조하는 점도 바로 이것이다. 교회 안에 머무는 사람이라 해도, 예수의 성육신과 십자가, 그리고 부활의 실제적 의미를 삶으로 체화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여전히 ‘머리 지식’에서 머무는 종교적 행위일 뿐이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복음 증언은 이론이 아니라, “내가 예수님을 이렇게 만났다. 내 죄와 죽음이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 안에서 어떻게 해결되었는지 실제로 경험했다.”라는 간증이어야 한다.

우리는 세상에 살며 때로 지치고 절망할 때가 있다. 인간 사회의 불의와 고난, 질병과 죽음은 어느 시대든 존재해 왔다. 그러나‘다윗의 혈통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그분의 성육신 안에서 “하나님이 정말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구나!”라는 사랑의 확증을 얻는다. 그분이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사건 안에서, “끝까지 우리를 붙드시려는 하나님의 거룩한 열정”을 확인하게 된다. 바울이 “은혜와 평강”(롬 1:7)을 언급하며 그 은혜가 바로 이 사랑에서 흘러나온다고 말할 때, 그것은 ‘아무리 내가 연약하고 죄가 많아도, 결코 포기되지 않는 하나님의 의지’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부활을 통해 선명해졌다는 의미다.

성육신에 대한 바른 이해는 곧 “온전한 복음 이해”로 우리를 안내한다. 예수님을 전적으로 하나님으로만 생각하면, 인간의 고통과 유혹을 겪으셨다는 사실을 놓치게 되고, 전적으로 인간으로만 생각하면, 우리가 왜 그분에게 경배해야 하는지, 왜 그분이 영원한 생명의 주관자이신지를 놓치게 된다. 바울은 로마서 1장 3~4절에서 ‘참 인간’이신 예수와 ‘참 하나님’이신 예수를 동시에 보여줌으로써,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그리스도론의 구조를 명확히 잡아 준다. 예수님은 다윗의 혈통으로 오신 참 인간이시며, 죽음에서 부활하사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된 참 하나님이시다. 이 두 축이 흔들리지 않아야, 비로소 복음이 제대로 이해되고 전파될 수 있다.

그러므로 로마서 1장 2~7절에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궁극적 메시지는, 첫째 “약속에 따라 오신 그리스도”이시고, 둘째 “그리스도가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고 오심으로써 죄인인 우리에게 생명의 문을 여셨다”는 사실이다. 이 약속이 성취되는 과정에서, 구약의 예언과 선지자들의 경고와 희망, 그리고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이어져 온 하나님의 섭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위한 준비였음을 우리는 확인한다. 심지어 로마의 길이 닦이는 과정까지도 복음 전파를 위한 준비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으니, 하나님의 계획은 광범위하고 치밀하다. 이 모든 것의 결론은,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오셨다는 점이며, 이것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이제 은혜와 평강이 임한다.

2. 십자가와 부활로 완성된 복음의 능력

바울이 로마서 1장 4절에서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라고 선포할 때, 여기에는 복음의 두 번째 중요한 축이 분명히 드러난다. 곧 “십자가와 부활”이다. 장재형 목사는 설교에서 자주 강조하듯, 복음은 그저 “예수님이 오셨다”라는 사실에서 끝나지 않는다. 예수님의 생애, 특히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사건이 없다면, 복음은 온전치 못하다.

성육신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되셨다”는 선언이고, 십자가는 “그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선언이며, 부활은 “우리를 위해 죽으셨던 그 하나님이 다시 사셨다”는 결정적 증거다. 바울은 그 부활의 사실을 통해, 예수님이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임이 공적으로(능력으로) 인정되었다고 말한다. 인간의 가장 큰 문제인 죄와 사망의 권세가, 예수님의 부활로 완전히 무력화되었기에,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도 헛것이요 우리가 전파하는 도(道)도 헛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한다(고전 15:14 이하). 곧 십자가의 사랑만으로는 아직 완성된 복음이라 할 수 없으며, 반드시 부활을 통해 ‘죄의 삯인 죽음’이 극복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역사 속에서 실제로 죽으셨고, 그 몸이 무덤에 놓였지만, “죽음의 고통에 매여 있을 수 없는” 분이셨다(행2:24).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을 최종적으로 ‘확정’하는 사건이다.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그 십자가와 부활이 “나”를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사랑이 나를 살렸고, 그 부활이 나에게 영원한 소망을 주었다.”는 개인적 체험이 동반될 때, 비로소 복음은 나의 ‘생명’이 된다. 장재형 목사는 이 지점을 ‘자기 고백’이라 부르며, “선교는 자기 변증이며, 자기 증언이며, 자기 간증”이라고 자주 말한다. 즉, 내가 죄인임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 죄를 용서했으며, 예수님의 부활이 나를 새 생명으로 이끌었다는 걸 구체적으로 고백하는 것이 선교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바울 자신이야말로 이 진리를 철저히 경험했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후, 그는 복음을 전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 자신이 경험한 “주님”은, 하늘 높은 곳에서 인간을 굽어보는 신적인 존재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임당한 모습 그대로이셨다. 또한, 그가 간증하는 “주님”은, 무덤에 갇힌 시신이 아니라 죽음을 깨뜨리고 다시 사신 분이셨다. 그렇기에 바울은 로마서 1장 4절에서 예수님을 가리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라고 선언하며,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라는 가장 완전한 이름을 붙인다. 예수님은 우리의 주, 곧 인생의 주인 되시는 분이며, 동시에 구약의 메시야로 예언된 그리스도이시다.

여기서 장재형 목사는 “자신을 낮추셨기 때문에 높아지신 예수님”이 교회와 신자들에게 주는 메시지를 크게 부각한다. 세상은 높은 지위나 권력을 추구하는 것을 성공으로 여기지만, 예수님은 거꾸로 자신을 철저히 낮추시고(케노시스), 가장 비참한 형태인 십자가 처형을 당하셨다. 그러나 부활을 통해,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높이심을 통해(빌 2:9 이하), 우리는 예수님이야말로 진정한 ‘승리자’이심을 본다. 이는 그분의 승리가 곧 ‘사랑의 승리’이며, ‘희생의 승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예수님의 그 길을 따르는 것이다.

바울이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았다”고 고백(롬 1:5)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해, 바울 자신이 완전히 변화되어 복음의 사도로 파송받았기 때문이다. 그 일을 위해서라면, 감옥에 갇히든, 매를 맞든, 생명을 잃든 상관없다고 선언할 만큼, 바울은 복음의 능력을 절실히 체험했고 그 복음에 모든 것을 건 사람이 되었다.

복음에는 ‘죽음을 넘어서는 능력’이 있다. 이는 세상 권세가 줄 수 없는 해방이다. 죽음의 공포 앞에 인간은 무력하지만,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그 두려움의 감옥을 깨뜨리셨기에, 그분 안에 있는 자들은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전 15:20 이하).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선포하는 것(롬 1:16)도, 이 복음이 참으로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장재형 목사는 여기서, 신자가 복음을 확신 있게 전하지 못하는 것은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에 대한 체험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라 지적하면서, 우리는 날마다 복음의 핵심인 십자가와 부활 앞에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한, “믿어 순종하게 한다”(롬 1:5)라는 표현에서 보듯,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결국 순종으로 결실을 맺어야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다면, 나는 이제 더 이상 나를 위해 살아갈 수 없게 된다. ‘나’를 구원하시고 다시 살리신 분이 예수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까지도 그분의 통치를 받아야 하는 것이 복음적 순종의 핵심이다. 세상적으로 보면, 내 뜻대로 살고자 하는 욕심을 내려놓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십자가와 부활을 진정으로 믿는 자라면, 결국 예수님의 손에 인생을 맡기게 되고, 그 믿음은 자연스럽게 순종으로 이어진다.

바울은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롬 1:7)라고 칭하며, 그들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한다”고 축복한다. 여기서 눈여겨볼 대목은 “하나님 우리 아버지”라는 표현이다. 과거에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른다는 자체가 거의 불경스럽게 여겨지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마 6:9)라고 가르치셨듯이, 우리는 이제 그분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관계가 되었다. 예수님을 통하여 의롭다 칭함을 받고, 거룩하게 된(성도로 부름받은) 이들에게, 하나님은 아버지 되시고 우리는 자녀가 된 것이다.

이때 “은혜와 평강”은 그 자녀로 부름받은 이들에게 임하는 영적인 선물이다. 평강(샬롬)은 구약에서부터 하나님의 백성이 애타게 구하던 최고의 가치였다. 그런데 바울은 그 평강이 어떻게 가능해지는가를 명확히 말한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진 은혜’가 선행되어야 한다. 죄인이 스스로 평안을 창조할 수 없다. 세상이 주는 일시적 평안이나 돈과 권력이 보장해주는 안정감은 오래가지 못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은혜 안에 들어오면, 죄책감과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된 참된 평강이 영혼에 깃든다. 이것이 바울이 “은혜와 평강”을 함께 묶어 선포하는 이유다.

장재형 목사는 설교에서, 교회가 단순히 ‘우리를 위한 종교적 취미나 모임’이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의 공동체”가 되어야 함을 역설한다. 교회 안에서 진정한 은혜와 참된 평강이 나누어지려면, 그 구성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고 순종하는 자들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십자가에 내가 못 박혀 죽었음을 믿으며, 부활로 새 생명 가운데 거함을 믿는 공동체라면, 서로에 대한 용서와 사랑, 헌신과 섬김이 자연스럽게 피어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신앙적 토대 없이 교회라는 이름만 붙여 놓은 집단은, 서로 대립하거나 갈등이 생기면 세상과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전락하기 쉽다.

결국 ‘복음의 완성’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승리이며, 이 승리가 우리의 삶과 공동체 안에서 현현될 때, 우리는 참된 교회가 된다. 또한, 바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르며 자신의 모든 정체성을 그 이름 안에 두었던 것처럼, 신자는 “내 삶의 중심은 예수님이시다”라고 고백하며 걷는 사람들이다. 그분이 그토록 낮아지고 희생함으로써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다면, 우리 역시 이웃을 섬기고 세상을 치유하기 위해 “희생과 낮아짐의 길”을 택해야 한다. 그것이 곧 십자가의 길이자 부활의 생명을 따라 걷는 길이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십자가와 부활의 연장선 위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주를 따르는 삶’(마 16:24)을 의미한다. 이는 우리의 욕망과 교만을 버리고, 주님의 뜻에 순종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예수님이 말씀하신 “나의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마 11:30)는 고백이 실제로 체험된다. 겉보기에는 좁은 길, 험난한 길 같지만, 참된 자유와 기쁨은 바로 이 복음에 순종할 때 찾아온다.

사도 바울이 편지 서두에서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요지는 명확하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약속의 복음은, 오랜 구약의 역사 속에서 이미 예언되었고, 성육신과 십자가, 그리고 부활을 통해 완전하게 실현되었다. 이 복음 때문에 내가 사도가 되었고, 너희도 그 복음을 들었으니, 이제 함께 은혜와 평강을 누리자. 그리고 그 복음에 합당한 믿음과 순종을 드리자.” 이것이 로마서 1장 2~7절에 담긴 바울의 간절한 인사이며, 동시에 교회의 사명이다.

장재형 목사가 강조하는 바 역시 동일하다. 우리는 반드시 복음의 전부, 즉 ‘오심(성육신)’과 ‘죽으심(십자가)’, 그리고 ‘부활하심’을 하나로 묶어서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한 가지만 전하거나 믿어서도 안 되고, 셋 중 한 가지만 강조해서도 안 된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으심, 그리고 부활로 승리하신 하나님 아들이심을 분명하게 증거해야 한다. 이것이 온전한 복음이며, 우리를 살리는 기쁜 소식이다.

오늘날도 세상은 여전히 여러 목소리를 낸다. 누군가는 인간의 이성과 지식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하고, 또 다른 이는 쾌락과 물질의 풍요가 인생의 목표라고 선언한다. 그러나 결국 그 어떤 것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근원적 문제는 ‘죄’와 ‘죽음’이다. 이에 대한 해답은 오직 십자가와 부활 안에 있다. 한때 기독교를 ‘죄인을 위한 종교’라 부르며 조롱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사실 그 말이야말로 복음의 정수를 보여주는 표현이다. 예수님이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 9:13) 하셨듯이, 기독교는 죄인들을 위한 종교다. 그리고 그 죄인이 바로 ‘우리 모두’임을 깨닫는 순간, 복음은 가장 아름다운 희망의 메시지로 다가온다.

바울의 로마서는 이 희망의 메시지를 체계적으로 풀어 놓은 ‘복음의 대헌장’이라 불린다. 그 서문에서부터 바울은 “이 복음이 나를 바꾸었고, 지금은 너희도 이 복음으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힘주어 말한다. 한때 교회를 박해하던 바울이, 이제는 교회를 세우는 사도로 변한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죄인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다. 그리고 그 사랑의 능력은 십자가와 부활에서 나온다.

결론적으로, 로마서 1장 2~7절은 복음의 본질을 간결하되 강력하게 보여준다. 복음은 인간의 철학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고, 그 약속은 예수님의 성육신과 십자가, 부활로 완성되었다. 예수님은 참 인간으로 낮아지셨고, 죽음을 이기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공적으로 증명되셨다. 그분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들에게는 은혜와 평강이 임하며, 새로운 정체성(성도, 곧 거룩하게 된 자)과 사명이 주어진다. 바울이 자신을 가리켜 ‘복음을 위해 부름받은 종’이라 일컬었듯, 우리 역시 복음을 듣고 변화되어, 이제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도구가 된다.

장재형 목사는 이 모든 가르침 위에 “복음은 곧 사랑”이라는 메시지를 덧붙인다. 예수님의 낮아지심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의 의미는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없이는 설명될 수 없다. 결국 복음이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는 사실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언이며, 그 독생자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임한 구원의 기쁨이다. 이 복음을 받은 이들은, 반드시 그 기쁨과 감사로 인해 ‘순종의 열매’를 맺게 된다. 그리고 그 삶의 모습이 곧 ‘복음의 삶’이다.

결국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핵심은, 첫째, 복음은 이미 약속된 것의 성취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역사 속에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둘째, 그 복음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완성되었고, 그 능력이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해방해 참된 평강에 이르게 한다는 사실이다. 바울이 처음부터 끝까지 외치는 복음이란, 바로 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베푸신 영원한 구원 계획이며, 이 복음은 우리의 인생과 세상을 뒤바꿀 만한 능력을 지닌다.

로마서 서두에서 나타난 바울의 인사는, 단순한 편지 예절이 아니다. 그것은 곧 모든 성도에게 주어진 축복이고 동시에 요청이다. “복음을 믿어 은혜와 평강을 누려라. 그리고 복음을 위해 부름받은 자답게 살아가라.” 이것이 장재형 목사가 설교에서 누차 강조하는 요점이기도 하다. 우리는 복음을 듣고, 그 복음의 진리를 이해하는 데서 멈추어선 안 된다. 복음이 우리 안에 살아 역사하도록, 날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하고, 그 부활의 생명력을 내 삶의 모든 영역에서 실천해 나가야 한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교회는 진정한 복음 공동체가 되며, 성도 개인도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라는 명칭에 합당한 삶을 살게 된다.

결국, 우리는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늘 고백해야 한다. 이 고백 안에는 예수님의 오심(성육신), 죽으심(십자가), 다시 사심(부활)이 한데 응축되어 있다. 바울은 이 사실을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확증하며,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롬 1:6)라고 부른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름받은 사람들의 모임이기에, 이제 그 이름을 위하여(롬 1:5) 세상에 나가 복음을 전한다. 이것이 우리가 ‘성도로 살아가는 이유’이며, 복음이 우리에게 준 가장 강력한 사명이다.

바라건대, 로마서 1장 2~7절의 말씀을 묵상하는 모든 이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고 오셨다”는 성육신의 은혜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다”는 구원의 능력을 마음 깊이 새기게 되길 바란다. 그리하여 죄의 멍에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진정한 자유와 기쁨, 그리고 순종의 은혜를 누릴 수 있길 소망한다. 그리고 이 복음의 삶을 통해, 서로를 사랑하며 섬기고, 세상에 주님의 빛을 드러내는 공동체를 이루어 가길 기도한다.

이는 장재형 목사가 설교와 사역에서 줄곧 지향하는 바이기도 하다.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이 복음, 즉 성육신에서 십자가와 부활에 이르는 예수 그리스도의 전 인격과 사역을 자신의 삶에 담아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바울이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 외쳤던 그 인사를 실제로 체험하게 된다. ‘죄인’에서 ‘성도’로, ‘절망’에서 ‘소망’으로 변화되는 이 여정이야말로 복음의 진수이며, 여기에 “기독교는 죄인의 종교”라는 구절의 참뜻이 살아 숨 쉬게 된다.

결국, 복음의 여정은 우리 각자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다. 당신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혹은 머리로만 알고 있으면서, 아직 마음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가? 바울이 증언하고, 장재형 목사를 비롯해 무수한 신앙 선배들이 반복해서 증거해온 것은, “복음은 실제다”라는 사실이다. 이 실제를 삶으로 경험하고, 그 경험을 다른 이들에게 간증하며, 그들 역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도록 돕는 것이 곧 교회의 존재 이유요, 성도의 고백이다.

부디 우리가 오늘 이 말씀을 붙들고, ‘약속의 성취’로 오신 예수님의 성육신, 그리고 ‘죽음을 깨뜨린’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더욱 깊이 묵상하자. 바울이 “복음으로 부름받았다”고 외쳤듯, 우리도 “복음을 위해 부름받은 자”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이 부르심 앞에서 순종하고, 우리에게 허락된 은혜와 평강을 누리며,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거룩한 통로가 되길 간절히 소망한다.

그렇게 살아가는 이들이 모여 있는 곳, 바로 그곳이 참된 교회다. 교회의 표지는 십자가, 교회의 생명은 부활, 그리고 교회의 사명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성육신을 통해 죄인들을 찾아오신 하나님, 십자가로 그 죄인들을 구원하신 하나님, 그리고 부활로 그들을 영원한 생명 안에 살도록 인도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우리가 이 복음의 이야기와 함께 오늘도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한다.

아울러, 로마서를 계속 공부하면서, 바울이 “이 복음으로 내가 부름을 받았다”고 고백하는 깊은 이유를 더 온전히 깨닫게 되길 바란다. 이는 바울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결국 “복음 때문에 부름받았다.” 그리고 그 복음을 통해 죄인에서 의인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존재들이다. 이 부르심에 감사하며, 매일의 삶 속에서 복음이 실제적 능력으로 작용하도록 깨어 있어야 한다.

이상으로, 로마서 1장 2~7절에 대한 묵상을 바탕으로, 약속으로 주어진 복음과 성육신의 신비,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로 완성된 복음의 능력을 정리해 보았다. 장재형 목사가 여러 설교를 통해 지속적으로 강조해 온 바와 같이, 복음은 우리에게 “약속된 사랑의 사건”이자 “생명을 주는 능력”임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의 언어와 삶 전체로 이 복음을 증거하며, 이방인 중에서도, 또 가까운 이웃 가운데서도 ‘믿어 순종케 하는’ 거룩한 도구로 쓰임 받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허락하시는 은혜와 평강이, 이 복음을 붙드는 모든 이에게 충만하기를 기도한다.

고난과 부활의 서막 – 장재형(장다윗)목사

1.안나스의 배후와 종교 권력의 타락

장재형(장다윗)목사가 강해한 요한복음 18장 12절에서 21절까지의 장면을 중심으로 묵상한 글인데 본문은 예수님을 잡아 심문하는 종교권력의 어두운 민낯을 극적으로 드러낸다. 이 본문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대목은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라는 표현이다. 이는 단순히 절차적인 문제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당대에 존재했던 거짓된 종교권력의 근본적인 부패를 보여주는 결정적인 단서이다. 당시 유대사회에서는 산헤드린 공의회가 종교재판을 주관했으며, 그 의장은 현직 대제사장이 맡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을 결박해 붙잡은 자들이 가장 먼저 끌고 간 곳이 현직 대제사장 가야바가 아닌, 그의 장인(丈人)인 안나스의 집이었다는 사실은 여러모로 심각한 문제를 시사한다.

안나스는 과거 A.D. 6년부터 15년까지 약 9년 정도 대제사장직을 수행한 바 있었고, 이후 자신의 다섯 아들을 모두 대제사장 자리에 앉혔으며, 결국 사위인 가야바에게까지 그 권력을 세습시킨 악명 높은 인물이다. 본래 유대교의 전통적 제사장직은 종신직이었고, 그만큼 존경받으며 권위 있는 자리였다. 하지만 로마 제국이 유대를 지배하게 된 후, 대제사장직은 돈과 정치적 줄대기에 의해 좌우되는 세속적 권력이 되어버렸다. 로마는 자신들에게 협조적이고 재정적으로 뒷받침이 될 만한 인물을 대제사장으로 세웠고, 안나스는 그러한 구조 속에서 막대한 금전을 로마에 바치며 제사장직을 잡고, 한편 성전 안에서는 장사와 환전으로 부를 축적하며 거대한 종교적 기득권을 형성했다.

당연히 이런 인물에게 예수님의 사역과 말씀은 눈엣가시였다. 예수님은 공생애 내내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이 하나님의 전(殿)을 장사치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질타하시며, 성전을 뒤엎고 정화하셨다. 복음서들 가운데 요한복음 2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비둘기와 양, 소를 파는 자들의 상과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버리며 말씀하신 장면이 등장한다. 그 당시에 ‘성전 안에서 파는 제물만 검열을 무사 통과하도록 하고, 바깥에서 준비해온 제물을 무조건 불합격 처리하여 다시 성전에서 비싼 값에 사도록 하는 구조’가 만연했는데, 그 중심에 바로 이 대제사장 일가의 이해관계가 있었다. 안나스와 그를 추종하는 종교 권력자들은 이를 통해 막대한 재산을 축적했고, 성전세나 환전에 대한 수익 또한 마찬가지의 구조로 거둬들였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이야말로 그들의 기득권을 무너뜨릴 가장 위협적인 존재였다. 안나스는 ‘율법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자신을 포장했지만, 정작 가장 거룩해야 할 성전을 돈과 권력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전락시켰고, 온갖 정치적 뒷거래로 로마와 결탁해 대제사장직을 세습하며 부와 명예를 지켜왔다. 그리하여 예수님이 성전을 청결케 하시고,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리라”고 하신 말씀을 들으며, 안나스는 이 도전자를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고 느꼈을 것이다. 종교적 폭정과 강압, 그리고 거짓된 법 적용을 통해서라도 예수님을 잡아내는 것, 그것이 그의 최우선 과제였다.

그렇다면 왜 산헤드린이 아닌 안나스 개인의 집에서 예수님이 먼저 심문을 당했을까? 유대인의 종교재판은 율법상 밤에 열 수 없었으며, 공정한 재판이 되려면 반드시 성전 뜰이나 공적으로 마련된 장소에서 낮에 이루어져야 했다. 더불어 최소 두 명 이상의 증인이 필요했고, 재판은 공정하게 진행되어야 했다. 그러나 예수님을 잡아온 이들은 어두운 밤에 은밀하게 안나스에게로 끌고 갔다. 현직 대제사장이 아닌 과거 대제사장이 예수님을 심문한다는 것 자체가 불법이었다. 또한 예수님을 사형에 처할 권한은 오직 로마 총독에게 있었으므로(유대인들에게는 사형 집행권이 없었다), 안나스는 일단 종교적 차원의 이단(異端) 정죄를 확정 지어 빌라도에게 넘기기만 하면 되었다. 어떻게든 예수님이 “율법을 거스르고, 성전을 헐고,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하며, 로마 황제 가이사 외에 다른 왕이 되려 한다”는 식으로 프레임을 씌워 형량을 무겁게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가 배반자 유다였다. 그는 예수 공동체 안의 내부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그 비밀스러운 가르침이나 예수님의 발언들을 과장 혹은 왜곡해 안나스 측에 전달했다. 요한복음 13장 30절에서 유다는 주님께서 주신 떡을 받자마자 어둠으로 떠나갔다. 그가 “밤이더라”라는 말씀은 단순한 시간적 배경일 뿐만 아니라, 영적·도덕적 어둠 속으로 그가 들어갔음을 의미한다. 그는 이미 대제사장 측과 은 30냥에 계약하여 예수님을 넘겨줄 계획을 세운 상태였으며, 예수님께서 ‘헐라’고 말씀하신 성전, 또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주장하신 부분(실제로 예수님은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여러 차례 암시하셨다) 등을 안나스에게 제보함으로써 빌미를 만들어주었다.

이처럼 안나스에게는 불법적인 심문을 행할만한 공식 권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 배후에서 사두개파 중심의 성전 경제와 권력을 틀어쥐고 있었기에, 산헤드린 전체의 움직임을 흔들 수 있는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또 대제사장직을 세습시키면서 실제 현직 대제사장인 가야바조차 자신의 ‘얼굴마담’처럼 세워놓고 배후에서 종교정치적 결정을 좌지우지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내내 이러한 거짓되고 부패한 종교 지도자들과 충돌을 피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바리새파, 사두개파, 여러 종파들 사이에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 14:6)이라 증언하시며, 사람들의 마음을 율법의 본질로 돌이키게 하고자 하셨다. 이것이 그들에게는 위협으로 다가왔고, 마침내 악명 높은 안나스가 최후의 결단을 내린 것이다.

여기서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는 바는, 종교와 권력이 결탁하면 얼마나 무서운 형태의 폭력이 나타나는가 하는 점이다. 장재형목사는 복음서의 이 장면을 연구하며, 지도자라고 스스로 자부하는 자들이 하나님을 건성으로 붙들고 사실은 세상의 힘을 빌려 사람을 해치려 할 때, 그 배후에는 어김없이 거짓과 부패가 있음을 지적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과 사랑을 지향하는 것이지만, 안나스와 같은 거짓된 종교 지도자들은 율법을 오히려 죽이는 도구로 만들고, 백성들의 믿음을 수단화해 자신의 권력과 부를 공고히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겉으로는 거룩한 척하지만 속은 독사의 자식과 같은 이들에게 “화 있을진저”라고 거듭 말씀하신 것이다. 이들은 단순히 종교적 지식을 갖고 있었을 뿐, 참된 영적 본질에서 멀어져 있었다.

우리가 살피는 요한복음 18장 19~21절에서 대제사장이 예수님께 “그의 제자들과 교훈에 대하여” 물은 것은, 그가 과연 어떠한 가르침으로 사람들을 꾀고 있기에 이렇게 세력이 형성되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유다는 “비밀스러운 가르침”이 있다고 찔러 넣었을지 모르고, 그것을 바탕으로 대제사장들은 “네가 감히 우리 전통과 율법, 그리고 로마 권력에 도전하는 가르침을 폈느냐?”라고 공격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여 이르셨다. “내가 드러내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의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히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요 18:20). 예수님은 굳이 감출 것이 없었다. 그들은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집요한 음모를 꾸몄으나, 예수님은 진리 자체였기에 자신을 숨길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보라. 저희가 나의 하던 말을 아느니라”(요 18:21)고 하시며, 증인과 증언을 통한 공정한 재판 절차를 도리어 되짚어주신다. 그러나 이미 결론은 나 있었다. 안나스와 그 일당들은 예수님께서 어떤 답을 하든 마음이 닫혀 있었고, 예수님이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신지 여부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그들의 성전 장사와 기득권을 지켜줄 정치·종교적 합의를 유지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모습이 교회 안에서도 나타날 수 있음을 경고한다. 진정한 복음을 외치고, 교회가 먼저 회개해야 한다며 성전을 가꾸려고 하면, 이미 교권주의와 물질주의에 물든 일부 세력은 오히려 그를 이단이라 공격할 수 있다. 교권세력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생각하며, 소위 ‘교회를 지킨다’는 명분하에 정작 하나님의 임재와 말씀을 거부하는 역설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교회 역사를 예로 들며, 종교개혁의 시대 때도 중세 카톨릭 교권이 물질적·정치적 힘과 결탁하여 면죄부를 팔고, 교회 세속화가 심각해졌을 때, 루터가 “오직 성경”을 외치며 진리를 환기시키려 하자 거대한 교권의 벽에 부딪힌 사례를 상기시킨다. 예수님 시대의 안나스 세력이나, 중세 시대의 교권주의자나, 오늘날 여전히 존재하는 거짓된 지도자들이나, 본질은 동일하다.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권력과 이익을 좇고, 성전을 거룩하게 지키기보다는 매매의 장소로 만들며,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는 자들을 오히려 탄압하고 추방하려고 한다.

결국 이러한 배경 속에서 예수님은 종교재판이라는 명목의 불법 심문을 받으시고, 곧 이어 빌라도의 법정으로 이송된다. 여기서부터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지만, 실제로 이 모든 음모의 실질적 시작점은 바로 안나스의 집에서 이루어진‘배후 심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밤의 비밀 거래와 음모가 예수님을 가야바와 빌라도, 그리고 끝내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로 몰아넣었다. 빌라도는 로마 권력의 대표였고, 가야바는 유대교 권력의 대표였으나, 이 양측 권력의 ‘진정한’ 조정자는 안나스였다. 요한복음이 다른 공관복음서(마태, 마가, 누가)와 달리 안나스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지목하고, 예수님을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갔다”고 기술한 것은 이 음모의 시작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독자들에게 분명히 알려주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이 장면은 ‘정치 권력’과 ‘종교 권력’이 야합하면 얼마든지 무고한 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음을 증거한다. 예수님은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으셨으며, 결국 십자가의 길을 기꺼이 가심으로써 모든 인류를 구원하신다. 아이러니하게도 안나스는 자신이 지키려고 했던 성전을 스스로 무너뜨렸다. 그 성전은 돌과 건물, 돈과 권력으로 운영되는 종교 기관이었다. 예수님은“내가 다시 세우리라”는 말씀으로 참된 성전이 ‘주님 자신’이며, 성령으로 하나 되는 공동체임을 선언하셨다. 이 메시지가 안나스와 그 세력에겐 가장 큰 위협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지키고 누려온 기득권 체제 전부가 부정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장재형목사는 오늘날에도 이런 안나스와 같은 거짓 지도자들의 양상이 재현될 수 있음을 거듭 강조한다. 크리스천 공동체가 부흥하면서 조직화되고 제도적 권위가 커질수록, 어느 순간부터 물질적 이득이나 명예, 정치적 영향력을 탐하는 자들이 생겨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겉으로는 교회나 성전을 위한다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스스로를 위한 종교 장사를 벌이게 된다. 이것이 누적되면 예수님 시대의 성전처럼, 결국 거룩이 사라지고 장사치의 소굴이 될 위험이 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어떤 시대에도 회개를 외치고 진리를 선포하는 예언자적 음성을 세우신다. 그때마다 안나스 같은 거짓 권력이 그 목소리를 잠재우고 심지어 죽이려 할 수 있는데, 성도들은 오히려 진리의 음성을 분별해내야 하고, 담대히 복음의 본질을 지켜야 한다고 장재형목사는 역설한다.

결국 요한복음 18장 12~21절에 나타난 “먼저 안나스에게로 데리고 가니”라는 장면은 단순한 에피소드가 아니라, 부패한 종교지도자와 정치 권력이 결탁하여 예수님을 고난의 길로 몰아넣는 역사의 비참한 상징이다. 동시에 이 어두운 그림자를 통해 예수님께서 빛 되심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신다. 악의 최후 발악이 있었기에 주님의 구원사역이 오히려 빛나게 되었다. 우리가 교회를 섬기며 신앙생활할 때, 안나스와 같은 인물이 혹시 우리의 공동체를 오염시키지 않는지 늘 깨어 있어야 할 것이다. 공정한 재판과 율법 준수, 그리고 성전의 본래 목적이 완전히 뒤틀려버린 한 시대를 반면교사 삼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더욱 붙들고, 회개와 거룩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고 장재형목사는 반복해서 설파한다.

Ⅱ. 베드로의 부인과 성령의 능력

이제 시선을 베드로에게로 돌려보자. 예수님께서는 결국 안나스의 집에 먼저 끌려가 불법 심문을 받으신 뒤, 공관복음서가 주로 보여주는 가야바와 산헤드린의 종교재판 과정을 거치신다. 그 와중에 제자들의 모습은 어떠했는가? 예수님께서 체포되자 대부분의 제자들이 뿔뿔이 흩어졌고, 요한복음 18장 15~16절에 따르면,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하나(‘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으로 묘사되는데, 학자들 사이에서는 요한 혹은 유다일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가 예수님을 뒤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갔다고 기록한다. 그나마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과 달리 “주님을 버려둘 수 없다”는 마음이 있었는지, 무장을 한 군인들 앞에서도 칼을 뽑아 들고 저항하려 했으며, 예수님께서 결박당해 끌려가시는 모습을 뒤쫓아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들어간 것이다.

그러나 곧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임을 부인한다. 요한복음 18장 17절에서 문지기 여종이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고 묻자, 베드로는 “나는 아니라”고 답한다. 이후 숯불을 쬐고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도 베드로는 연이어 예수님과 자신은 무관하다고 잡아뗀다. 공관복음서는 그때 닭이 울었다고 전하며, 베드로가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심히 통곡했다고 기록한다(마 26:75, 막 14:72, 눅 22:62). 사랑하는 스승을, 그것도 가장 가까운 제자였던 베드로가 세 번씩이나 부인해버린 이 사건은 기독교 신앙에서 한없이 큰 슬픔과 자책의 이야기로 남아 있다. 그러나 동시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다시 베드로를 찾아가셔서“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 21장)라고 세 번 물으시고 다시금 사도의 사명을 주시는 장면을 통해, 주님의 놀라운 용서와 사랑의 스토리로 완성된다.

왜 베드로는 그토록 담대했던 제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결정적 순간에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하고 말았을까? 이는 거대한 종교 권력과 정치 권력이 합작한 잔혹하고도 단호한 심판의 분위기, 그 앞에서 느끼는 공포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미 안나스의 집뜰에서 군인들과 하속들이 예수님을 결박해 끌고 들어갔고, 그가 곧 무거운 형벌을 받을 것이 자명해 보이는 상황에서, 베드로가“나도 그의 제자다”라고 인정했다가는 자신 또한 체포되어 혹독한 형벌을 받을 수 있다고 직감했을 것이다. 특히 안나스라는 배후 권력이 얼마나 무서운지, 그는 로마의 군병들과도 협력하며 예수님을 잡아온 이들이다. 그런데 베드로가 무슨 힘이 있어 그 대세를 뒤집을 수 있겠는가? 결국 인간적인 두려움이, 그를 한순간에 약한 존재로 만들었다.

여기서 우리는 배반자 유다와 달리, 베드로는 적어도 그 뜰까진 따라왔다는 점에 주목할 수 있다. 그는 끝까지 주님 곁을 지키고 싶었으나, 잔인한 현실 앞에서 믿음을 지키지 못했다. 그리고 그 부인 후에, 베드로는 자복하듯 통곡했다. 거기서 끝이었으면, 베드로는 한 인간의 연약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실패자로 남았겠지만, 주님의 부활 이후 베드로는 다시 회복되어 초대 교회의 기둥으로 선다. 사도행전 2장에서 오순절 성령 강림이 임했을 때, 베드로가 사람들 앞에 서서 담대히 복음을 전하고, 3000명이나 회심하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다. 과거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회개한 베드로가, 성령의 능력을 통해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하는 담대한 사도로 변화된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장면을 통해 성령의 역사가 얼마나 실제적이며 능력 있는지 강조한다. 베드로의 부인은 분명 인간적인 나약함과 두려움의 소산이지만, 그가 한없이 추락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한계를 절감한 순간이 그가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고 진정한 믿음의 용기로 재무장하는 계기가 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목격한 후, 더 이상 물러서지 않고, 설령 종교적 권력이든 정치적 권력이든 어떤 위협이 닥쳐올지라도 복음을 외치게 된다. 그 유명한 말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행 5:29)고 외치며, 박해에 굴복하지 않는 지도자로 거듭난다.

이것은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의 배신과 극명하게 대조된다. 유다는 안나스에게 정보와 기회를 팔아버리고, 결국 “나는 죄 없는 피를 팔았다”는 죄책감에 휩싸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도 회개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유다의 회개는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고, 자기 파멸로 치닫고 말았다. 반면 베드로는 심히 통곡함으로써 어떻게든 다시 주님께 돌아갈 수 있었고, 주님이 그를 찾아와 주도적으로 회복시켜주셨다. 장재형목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사랑의 본질’과 ‘성령의 회복 사역’을 강력히 강조한다. 인간의 불신과 배신이 아무리 심각하더라도, 부활하신 주님의 용서와 성령의 회복 역사는 그를 다시 일으키고도 남는다는 것이다.

또한 베드로의 부인 사건은 교회와 성도들에게 계속해서 깨달음을 준다. 누구나 신앙의 담대함을 말하고 결단을 외칠 수 있으나, 현실의 압박 앞에서 약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베드로처럼 수제자라 불리던 자도 그렇게 될 수 있다면, 오늘을 사는 우리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종교 권력과 정치 권력이 한목소리로 “예수를 따르는 자들을 제거하자”라고 외치면, 그 분위기 속에서 수많은 성도가 위축되고, 어떤 이들은 베드로처럼 “나는 예수를 모른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그 부인 후의 태도다. 베드로처럼 통곡하며 회개한다면, 주님께서는 이를 외면하지 않으신다. “양을 먹이라”고 다시 사명을 주시고, 그를 통해 복음의 큰 역사를 이루신다.

장재형목사는 현대 교회 안에서도 이러한 ‘베드로의 회개와 회복’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교회가 여러 가지 이유로 핍박을 받을 때, 성도들은 때로 세상의 조롱과 적대 앞에서 움츠러들 수 있다. 혹은 자신이 그동안 지켜온 신앙 원칙을 순식간에 포기하고 세상과 타협할 수도 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여전히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신다. 그때 우리가“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연약함으로 넘어졌습니다”라고 고백한다면, 주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우리를 다시 일으키시고, 손에 복음의 깃발을 쥐어주신다. 베드로가 과거의 실패를 딛고 일어나 오순절의 복음 전도자가 된 것처럼, 우리도 회복되어 주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사도행전의 베드로 행적을 보면, 그는 감옥에 갇히고 매질을 당해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 부활의 주를 만난 확신, 그리고 성령의 능력 안에서 살 때, 어떠한 종교적·정치적 협박도 그를 꺾지 못했다.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의 말씀 전하는 것을 그치라고 하느냐,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라는 그의 선언은 신앙의 자유와 담대함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잘 보여준다. 이전에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이다. 이는 장재형목사가 반복해서 설명하는‘성령의 실재성’이다. 성령은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과 부활의 진리를 받아들일 때, 구체적으로 우리 심령 안에 내주하시어 근본적 변화를 일으키는 분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성령의 능력을 누리고 베드로처럼 담대한 증인이 될 수 있을까? 첫째는 진솔한 회개다. 베드로는 스승을 부인한 후 통곡했다. 자신이 얼마나 주님을 사랑했으나 동시에 얼마나 연약했는지를 인정한 것이다. 참회가 없이는 성령이 주시는 진정한 치유와 새출발이 어렵다. 둘째는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이다. 베드로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물음을 세 번 받았다. 그것은 자기 기만이나 교만을 무너뜨리고, 오직 예수의 사랑과 용서로만 살 수 있음을 깨닫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셋째는 말씀과 기도를 통해 성령 충만을 구하는 것이다.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오순절 사건은 제자들이 ‘전혀 기도에 힘썼다’는 배경 속에서 일어났다. 성령의 임재가 있으므로 제자들은 더는 숨어 지내지 않고, 공공연하게 복음을 외칠 수 있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현대 교회에 적용할 때, 우리도 끊임없이 말씀과 기도 안에서 성령을 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오늘날에도 교회나 성도가 세상의 권력 구조나 사회 분위기에 눌려 진리를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교회가 이익 집단이나 정치 세력의 이해관계에 휘말리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르는 사람, 성령에 붙들린 사람이라면, 어렵고 힘든 가운데서도 베드로처럼 일어나 복음을 변증하고 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특히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부르시는 자리로 다시 나아가는 결단”을 중요시한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타협을 요구하고, 거짓 권력은 위협으로 몰아가지만, 성령께서는 “감히 너희가 내 이름을 어떻게 해서든 담대히 전하라”고 도우신다.

결국 예수님께서 안나스의 집에서 불법 심문을 당하시고, 가야바와 빌라도로 이어지는 잔혹한 재판을 거쳐 십자가에 달리시는 극적인 전개 한가운데, 베드로의 부인은 오히려 죄와 은혜의 대조를 선명하게 그려내는 중요한 사건이 된다. 정치와 종교 권력의 결탁이라는 ‘최대 악의 시나리오’ 앞에서도, 주님의 사랑과 성령의 회복은 결코 좌절되지 않는다는 메시지가 요한복음의 전체 맥락 속에 분명히 자리잡고 있다.

장재형목사는 신앙 공동체 안에서 실패하고 낙심한 이들이 있더라도, 결코 끝이 아님을 잊지 말라고 권면한다. 베드로처럼 주님 앞에 진심으로 회개하고 성령의 은혜를 구한다면, 그 어떤 과거의 실수와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큰일을 감당할 수 있게 된다. 교회 안에 혹 “안나스 같은 세력”이 득세하여 진리를 왜곡하고 거짓으로 사람들을 압박하더라도, 베드로와 같이 예수님을 바라보고 성령의 용기를 구하는 성도는 결코 넘어지지 않는다. 교회의 참된 권위는 사람의 지위와 힘에서 오지 않고, 오직 성령의 역사를 통해 예수님의 가르침을 바로 전하는 그 말씀의 능력에서 나온다. 이는 2천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결코 바뀌지 않는 복음의 진리다.

우리는 요한복음 18장 12~21절을 통해, 안나스라는 부패한 종교 권력자가 어떻게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음모를 진행했는지, 그 배후에 있는 악의 기제를 분명히 볼 수 있다. 율법과 성전, 그리고 종교 재판이라는 거룩해 보이는 틀 안에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그리스도를 죽이는 모순이 드러난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제자들, 그중에서도 베드로는 두려움에 휩싸여 주님을 부인한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그는 다시 회복되고, 복음 전도의 핵심 인물이 된다. 이것이 요한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강력한 아이러니이자 소망의 메시지다. 가장 음습하고 어두운 곳에서 거짓 권력이 횡행할 때, 참된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더욱 선명히 드러난다. 그리고 성령은 인간의 연약함을 덮고도 남을 능력으로 우리를 새 사람으로 빚어내신다.

“장재형목사”는 이 본문을 강해하며, 교회사의 수많은 박해와 왜곡 속에서도 복음이 계속 전파되고, 무너진 자들이 다시 일어나 복음을 증거해온 것을 상기시키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 역사를 배움으로써,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역사하시는 성령을 신뢰하고, 예수님의 진리와 사랑을 붙들어야 한다. 과거 안나스와 같은 교권주의자들이, 혹은 세상의 권력자들이 교회를 제압하려 한 사례는 부지기수였지만, 그럴 때마다 주님께서 숨겨 놓으신 사람들, 회개하고 돌아선 ‘베드로들’을 통해 교회는 다시금 살아났다. 따라서 교회와 성도는 어떠한 악한 환경이나 배신, 혹은 자기 실수에도 희망을 놓지 않아야 한다. 주님은 살아 계시고, 성령은 여전히 임재하신다. 밤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까워지듯, 우리는 요한복음 18장에 담긴 검은 그림자 속에서 오히려 빛의 준비가 한창 진행되고 있음을 봐야 한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의 체포부터 심문, 그리고 베드로의 부인과 이어지는 이 일련의 사건들은, 한편으로는 부패한 종교 권력과 정치 권력이 어떻게 합심해 진리를 파괴하려 드는지를 보여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님의 사랑과 성령의 회복 능력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좌절되지 않는다는 궁극적 소식을 전한다. 공포와 배신, 음모와 죄악이 난무하는 밤이었으나, 그 모든 것을 넘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신 주님의 의와 은혜가 최종 승리를 거두었다. 교회 안에 안나스가 잠입하더라도, 제자들이 때로는 베드로처럼 넘어질지라도, 성령으로 함께하시는 하나님은 결코 교회를 포기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는 대로, 이 본문을 통하여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고 공동체를 점검해야 한다. 혹시 우리의 신앙이 기득권과 세속적 욕망에 휘둘리고 있지 않은지, 혹은 극심한 억압 앞에서 주님을 부인하고 세상을 좇고 있지는 않은지, 혹은 자신도 모르게 안나스의 편에 서서 참된 복음을 외치는 이들을 배척하고 있지는 않은지를 살펴야 한다. 동시에, 혹 나 자신의 연약함과 실패가 크더라도, 베드로처럼 회개하고 성령의 능력 안에서 주님께 나아가면, 주님은 새날을 열어주신다는 약속을 기억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요한복음 18장의 심문 장면이 전해주는 교훈이자,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모든 신앙 공동체가 가슴 깊이 새겨야 할 메시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