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약속으로 주어진 복음과 성육신의 신비
장재형(장다윗)목사가 강의한 로마서 1장 2~7절을 묵상하며, 우리는 먼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복음이 왜 우리 가운데 ‘약속의 성취’로 나타난 것인지를 깊이 살펴볼 수 있다. 장재형 목사는 이 말씀을 통해, 복음이 결코 인간의 이론이나 사상, 혹은 어느 개인의 사설이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의 약속에서 비롯된 것임을 강조한다. 곧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롬 1:2)라는 말씀 안에는, 하나님이 인류 역사 속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이 복음이 선포될 것을 계획하셨다는 놀라운 섭리가 담겨 있다.
우리는 복음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낯선 가르침이 아니라, 구약시대를 통틀어 계속해서 예언되어 온 “그리스도”라는 분에 대한 구체적인 약속임을 기억해야 한다. 이때 바울이 말하는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으로 오셨다’는 선언으로 정리된다. 바울은 로마서 1장 3절에서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라고 증언하며, 예수 그리스도가 정말로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셨음을 선포한다. 성경의 예언은 모두 이 사실을 향하고 있었다.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선지자들과 예언자들을 통해 당신의 섭리를 때마다 드러내셨고, 그 최종적 완성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Incarnation)’으로 나타난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여기서 ‘기독교는 죄인의 종교’라는 사실을 다시금 부각시킨다. 예수님이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찾아오셨다는 복음서의 선포가, 바로 이 성육신 사건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죄인들의 삶 한가운데 거하셨다.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다”는 구절은 그저 예수께서 다윗 왕조의 후손이라는 역사적·계보적 사실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이 진짜 인간으로 세상에 들어오셨음을 알리는 상징적 표현이다.
이 성육신 사건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가장 큰 특징이자 역설이다. 바울은 빌립보서 2장 6~8절에서 이를 ‘케노시스(Kenosis)’, 곧 자기를 비우심이라 표현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본래 하나님과 동등되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음을 강력하게 선언한다. 참 하나님이신 그분이 동시에 참 인간이 되셨다는(“참 하나님과 참 인간”, Vere Deus & Vere Homo) 이 놀라운 진리는, 그리스도인이 믿는 ‘복음’의 결정적 근거다.
바울은 로마서 1장 3~4절에서 바로 이 케노시스와 성육신, 그리고 그 결과로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짧지만 강력하게 요약해 놓았다. 예수님이 인간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셨고, 성결의 영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이것이 곧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신 예수 그리스도’이다(롬 1:4, 개역한글에는 “선포되셨으니”를 “인정되셨으니”라 표현). 사람이 보기에는 죄인의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았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죽음을 이기는 자’로 인정하셨다는 뜻이 여기에 담겨 있다.
복음은 곧 이 역사적·실존적 사건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인이 전하는 메시지는 “죄인을 살리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이지, 인간의 도덕적 교훈이나 추상적 철학이 아니다. 바울 시대의 헬라 철학자들은 ‘진리(로고스)’를 찾기 위해 평생을 투자했지만, 결국 ‘사람의 힘’만으로는 그 로고스에 이를 수 없었다. 그러나 요한복음 1장은 선언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요 1:14). 곧 모든 철학자와 현자들이 그토록 갈구했던 진리가, 실제로 사람이 되어 이 땅에 거하셨다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이를 가리켜 “다윗의 혈통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르며, 동시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다”고 말함으로써, 예수님이 역사 속에서 진정한 인간이 되셨고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임을 분명히 증거한다.
장재형 목사는 우리가 이 복음 앞에 서게 될 때, 우리의 지성과 이성을 넘어선 “은혜”가 임한다고 가르친다. 이는 곧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Unconditional Love)과 전적인 선물(Surprising Gift)이다. 복음을 모르고 살던 죄인이 이 메시지를 듣고 나를 위해 낮아지신 그리스도의 사랑에 눈물 흘릴 때, 그게 바로 은혜다. 바울이 경험한 것도 이것이다. 과거 그는 ‘교회를 박해하고, 그리스도인을 잔인하게 핍박하던 죄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찾아온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완전히 거꾸러졌다. 그가 곧장 복음의 사도가 되어, 가장 극렬하게 복음을 외치고, 교회를 세우며, 자신의 모든 생애를 이 ‘약속의 복음’을 전하는 데 바친 것이다.
결국 복음은 ‘구원의 메시지’이자 ‘역사의 완성’이다. 하나님이 보내주신 약속의 아들, 예수님이 인간으로 오셨고, 그분이 십자가와 부활로 죄와 죽음을 깨뜨려버리셨다. 이 사실이 이미 선지자들을 통해 약속되었고, 실제로 우리 눈앞에 드러났다. 이것이 복음이며, 그렇기에 복음이 우리 삶을 뒤바꾼다. 또한,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벧전 3:15)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이 복음에 관해 묻는 세상에 대답할 것을 준비해야 한다. 그 대답이 곧 ‘간증’이며, ‘내가 들은 복음, 내가 만난 그리스도’를 그대로 전하는 것이다.
바울이 “내가 십자가와 부활밖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우리의 선교와 전도는 내 생각, 내 지식을 뽐내는 장이 아니다. 오직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그 십자가의 사랑’과 ‘나를 새 생명으로 불러 일으키신 부활의 권능’을 증언하는 것이다. 복음에 대해 누군가 묻거든, 우리는 그리스도가 어떻게 내 삶에 들어오셨는지, 어떻게 나를 변화시키셨는지, 그리고 어떻게 나로 하여금 영원한 소망을 품게 하셨는지 증거하면 된다. 바울 역시 자신의 편지를 시작할 때, “나는 복음을 위해 부름받은 사람”이라는 고백으로 서문을 열고, 그 복음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복음 안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증언했다.
결국 ‘복음’은 세상과 대적하는 신비한 이론이나 우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오래전부터 예언해 왔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실제적 사건이다. 또 복음은 한없이 거룩하신 하나님이 죄인인 우리를 직접 찾아오셔서 구원하시려는 ‘사랑의 이야기’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 성육신의 사랑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우리 안에 들어오셨다”는 것이야말로 기독교의 핵심이라고 강조한다. 그분이 들어오셨기에, 우리가 죄의 사슬에서 풀려나고, 새로운 소망과 생명을 얻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이 복음이 주어졌을 때, 우리의 태도는 자연스레 “믿고 순종함”으로 이어져야 한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한다”(롬 1:5)는 구절의 의미다. 곧 과거에는 전혀 구원의 언약 밖에 있었던 자들이, 이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복음을 듣고, 그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복음 안에서 “믿어 순종”하게 된 그들은, 과거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죄의 습관에 사로잡혀 살았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죄사함을 받고, 부활로 주어진 생명의 능력에 힘입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
바울이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롬 1:7)라고 호칭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복음의 능력 때문이다. 로마 제국이라는 거대한 문명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지배 이념이나 다신교적(多神敎的) 풍조와 충돌했지만, 오히려 복음의 가치를 붙들고 담대히 복음을 전했다. 그 결과로, 인간적 눈으로 보면 보잘것없는 소수 집단에 불과했던 교회 공동체가 역사를 움직여 왔다. 바울이 로마서 전체에서 복음의 위력과 의의, 그리고 그 복음에 의해 변화된 삶을 반복하여 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성육신은 “말씀이신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엄청난 신비이며, 동시에 우리에게는 “절망을 뚫고 들어온 광명”이다. 완전한 진리이자 영원한 빛이신 하나님이, 죄와 어둠에 사로잡힌 인간 가운데 친히 들어오셨다는 것은, 그 자체로 소망의 선언이다. 자칫 머리로만 그칠 수도 있는 ‘인간의 사상과 철학’을 넘어, 실제로 내가 만나고 체험할 수 있는 ‘인격적 진리’가 되신 것이다. 이것이 성육신의 위대함이다. 여기서부터 복음은 단지 귀에 들려오는 소문이 아니라, 가슴을 파고드는 ‘생명력 있는 메시지’가 된다.
한편, 이 성육신 사건은 우리에게 “거룩한 삶으로의 초대”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예수께서 우리와 동일한 몸을 입으셨다는 것은, 그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한시적으로 인간의 옷을 빌려 입으신 게 아니라, 우리에게도 그리스도를 닮은 거룩한 인격과 삶을 살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음을 의미한다. 바울이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롬 1:7)라고 칭할 때,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가 걸어가신 길을 따르는 자들”이라는 뜻이다. 성경의 인물들을 보면, 그들은 결코 죄가 없거나 완벽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구속사 속에서 그리스도의 은혜를 덧입었고, 예수님이 보여주신 그 낮아짐과 희생, 그리고 부활의 능력을 본받아, 새 생명의 길로 걸어갔다. 이것이 ‘성도’의 본질이다.
결국 소중한 것은, ‘성육신을 통해 역사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지적으로만 알고 있는 수준에서 끝나지 않고, 그분의 자기 비하와 희생을 ‘삶’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장재형 목사가 반복해서 설교에서 강조하는 점도 바로 이것이다. 교회 안에 머무는 사람이라 해도, 예수의 성육신과 십자가, 그리고 부활의 실제적 의미를 삶으로 체화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여전히 ‘머리 지식’에서 머무는 종교적 행위일 뿐이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복음 증언은 이론이 아니라, “내가 예수님을 이렇게 만났다. 내 죄와 죽음이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 안에서 어떻게 해결되었는지 실제로 경험했다.”라는 간증이어야 한다.
우리는 세상에 살며 때로 지치고 절망할 때가 있다. 인간 사회의 불의와 고난, 질병과 죽음은 어느 시대든 존재해 왔다. 그러나‘다윗의 혈통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그분의 성육신 안에서 “하나님이 정말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구나!”라는 사랑의 확증을 얻는다. 그분이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사건 안에서, “끝까지 우리를 붙드시려는 하나님의 거룩한 열정”을 확인하게 된다. 바울이 “은혜와 평강”(롬 1:7)을 언급하며 그 은혜가 바로 이 사랑에서 흘러나온다고 말할 때, 그것은 ‘아무리 내가 연약하고 죄가 많아도, 결코 포기되지 않는 하나님의 의지’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부활을 통해 선명해졌다는 의미다.
성육신에 대한 바른 이해는 곧 “온전한 복음 이해”로 우리를 안내한다. 예수님을 전적으로 하나님으로만 생각하면, 인간의 고통과 유혹을 겪으셨다는 사실을 놓치게 되고, 전적으로 인간으로만 생각하면, 우리가 왜 그분에게 경배해야 하는지, 왜 그분이 영원한 생명의 주관자이신지를 놓치게 된다. 바울은 로마서 1장 3~4절에서 ‘참 인간’이신 예수와 ‘참 하나님’이신 예수를 동시에 보여줌으로써,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그리스도론의 구조를 명확히 잡아 준다. 예수님은 다윗의 혈통으로 오신 참 인간이시며, 죽음에서 부활하사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된 참 하나님이시다. 이 두 축이 흔들리지 않아야, 비로소 복음이 제대로 이해되고 전파될 수 있다.
그러므로 로마서 1장 2~7절에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궁극적 메시지는, 첫째 “약속에 따라 오신 그리스도”이시고, 둘째 “그리스도가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고 오심으로써 죄인인 우리에게 생명의 문을 여셨다”는 사실이다. 이 약속이 성취되는 과정에서, 구약의 예언과 선지자들의 경고와 희망, 그리고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이어져 온 하나님의 섭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위한 준비였음을 우리는 확인한다. 심지어 로마의 길이 닦이는 과정까지도 복음 전파를 위한 준비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으니, 하나님의 계획은 광범위하고 치밀하다. 이 모든 것의 결론은,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오셨다는 점이며, 이것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이제 은혜와 평강이 임한다.
2. 십자가와 부활로 완성된 복음의 능력
바울이 로마서 1장 4절에서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라고 선포할 때, 여기에는 복음의 두 번째 중요한 축이 분명히 드러난다. 곧 “십자가와 부활”이다. 장재형 목사는 설교에서 자주 강조하듯, 복음은 그저 “예수님이 오셨다”라는 사실에서 끝나지 않는다. 예수님의 생애, 특히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사건이 없다면, 복음은 온전치 못하다.
성육신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되셨다”는 선언이고, 십자가는 “그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선언이며, 부활은 “우리를 위해 죽으셨던 그 하나님이 다시 사셨다”는 결정적 증거다. 바울은 그 부활의 사실을 통해, 예수님이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임이 공적으로(능력으로) 인정되었다고 말한다. 인간의 가장 큰 문제인 죄와 사망의 권세가, 예수님의 부활로 완전히 무력화되었기에,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도 헛것이요 우리가 전파하는 도(道)도 헛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한다(고전 15:14 이하). 곧 십자가의 사랑만으로는 아직 완성된 복음이라 할 수 없으며, 반드시 부활을 통해 ‘죄의 삯인 죽음’이 극복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역사 속에서 실제로 죽으셨고, 그 몸이 무덤에 놓였지만, “죽음의 고통에 매여 있을 수 없는” 분이셨다(행2:24).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을 최종적으로 ‘확정’하는 사건이다.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그 십자가와 부활이 “나”를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사랑이 나를 살렸고, 그 부활이 나에게 영원한 소망을 주었다.”는 개인적 체험이 동반될 때, 비로소 복음은 나의 ‘생명’이 된다. 장재형 목사는 이 지점을 ‘자기 고백’이라 부르며, “선교는 자기 변증이며, 자기 증언이며, 자기 간증”이라고 자주 말한다. 즉, 내가 죄인임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 죄를 용서했으며, 예수님의 부활이 나를 새 생명으로 이끌었다는 걸 구체적으로 고백하는 것이 선교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바울 자신이야말로 이 진리를 철저히 경험했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후, 그는 복음을 전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 자신이 경험한 “주님”은, 하늘 높은 곳에서 인간을 굽어보는 신적인 존재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임당한 모습 그대로이셨다. 또한, 그가 간증하는 “주님”은, 무덤에 갇힌 시신이 아니라 죽음을 깨뜨리고 다시 사신 분이셨다. 그렇기에 바울은 로마서 1장 4절에서 예수님을 가리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라고 선언하며,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라는 가장 완전한 이름을 붙인다. 예수님은 우리의 주, 곧 인생의 주인 되시는 분이며, 동시에 구약의 메시야로 예언된 그리스도이시다.
여기서 장재형 목사는 “자신을 낮추셨기 때문에 높아지신 예수님”이 교회와 신자들에게 주는 메시지를 크게 부각한다. 세상은 높은 지위나 권력을 추구하는 것을 성공으로 여기지만, 예수님은 거꾸로 자신을 철저히 낮추시고(케노시스), 가장 비참한 형태인 십자가 처형을 당하셨다. 그러나 부활을 통해,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높이심을 통해(빌 2:9 이하), 우리는 예수님이야말로 진정한 ‘승리자’이심을 본다. 이는 그분의 승리가 곧 ‘사랑의 승리’이며, ‘희생의 승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예수님의 그 길을 따르는 것이다.
바울이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았다”고 고백(롬 1:5)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해, 바울 자신이 완전히 변화되어 복음의 사도로 파송받았기 때문이다. 그 일을 위해서라면, 감옥에 갇히든, 매를 맞든, 생명을 잃든 상관없다고 선언할 만큼, 바울은 복음의 능력을 절실히 체험했고 그 복음에 모든 것을 건 사람이 되었다.
복음에는 ‘죽음을 넘어서는 능력’이 있다. 이는 세상 권세가 줄 수 없는 해방이다. 죽음의 공포 앞에 인간은 무력하지만,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그 두려움의 감옥을 깨뜨리셨기에, 그분 안에 있는 자들은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전 15:20 이하).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선포하는 것(롬 1:16)도, 이 복음이 참으로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장재형 목사는 여기서, 신자가 복음을 확신 있게 전하지 못하는 것은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에 대한 체험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라 지적하면서, 우리는 날마다 복음의 핵심인 십자가와 부활 앞에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한, “믿어 순종하게 한다”(롬 1:5)라는 표현에서 보듯,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결국 순종으로 결실을 맺어야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다면, 나는 이제 더 이상 나를 위해 살아갈 수 없게 된다. ‘나’를 구원하시고 다시 살리신 분이 예수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까지도 그분의 통치를 받아야 하는 것이 복음적 순종의 핵심이다. 세상적으로 보면, 내 뜻대로 살고자 하는 욕심을 내려놓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십자가와 부활을 진정으로 믿는 자라면, 결국 예수님의 손에 인생을 맡기게 되고, 그 믿음은 자연스럽게 순종으로 이어진다.
바울은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롬 1:7)라고 칭하며, 그들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한다”고 축복한다. 여기서 눈여겨볼 대목은 “하나님 우리 아버지”라는 표현이다. 과거에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른다는 자체가 거의 불경스럽게 여겨지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마 6:9)라고 가르치셨듯이, 우리는 이제 그분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관계가 되었다. 예수님을 통하여 의롭다 칭함을 받고, 거룩하게 된(성도로 부름받은) 이들에게, 하나님은 아버지 되시고 우리는 자녀가 된 것이다.
이때 “은혜와 평강”은 그 자녀로 부름받은 이들에게 임하는 영적인 선물이다. 평강(샬롬)은 구약에서부터 하나님의 백성이 애타게 구하던 최고의 가치였다. 그런데 바울은 그 평강이 어떻게 가능해지는가를 명확히 말한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진 은혜’가 선행되어야 한다. 죄인이 스스로 평안을 창조할 수 없다. 세상이 주는 일시적 평안이나 돈과 권력이 보장해주는 안정감은 오래가지 못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은혜 안에 들어오면, 죄책감과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된 참된 평강이 영혼에 깃든다. 이것이 바울이 “은혜와 평강”을 함께 묶어 선포하는 이유다.
장재형 목사는 설교에서, 교회가 단순히 ‘우리를 위한 종교적 취미나 모임’이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의 공동체”가 되어야 함을 역설한다. 교회 안에서 진정한 은혜와 참된 평강이 나누어지려면, 그 구성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고 순종하는 자들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십자가에 내가 못 박혀 죽었음을 믿으며, 부활로 새 생명 가운데 거함을 믿는 공동체라면, 서로에 대한 용서와 사랑, 헌신과 섬김이 자연스럽게 피어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신앙적 토대 없이 교회라는 이름만 붙여 놓은 집단은, 서로 대립하거나 갈등이 생기면 세상과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전락하기 쉽다.
결국 ‘복음의 완성’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승리이며, 이 승리가 우리의 삶과 공동체 안에서 현현될 때, 우리는 참된 교회가 된다. 또한, 바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르며 자신의 모든 정체성을 그 이름 안에 두었던 것처럼, 신자는 “내 삶의 중심은 예수님이시다”라고 고백하며 걷는 사람들이다. 그분이 그토록 낮아지고 희생함으로써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다면, 우리 역시 이웃을 섬기고 세상을 치유하기 위해 “희생과 낮아짐의 길”을 택해야 한다. 그것이 곧 십자가의 길이자 부활의 생명을 따라 걷는 길이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십자가와 부활의 연장선 위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주를 따르는 삶’(마 16:24)을 의미한다. 이는 우리의 욕망과 교만을 버리고, 주님의 뜻에 순종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예수님이 말씀하신 “나의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마 11:30)는 고백이 실제로 체험된다. 겉보기에는 좁은 길, 험난한 길 같지만, 참된 자유와 기쁨은 바로 이 복음에 순종할 때 찾아온다.
사도 바울이 편지 서두에서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요지는 명확하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약속의 복음은, 오랜 구약의 역사 속에서 이미 예언되었고, 성육신과 십자가, 그리고 부활을 통해 완전하게 실현되었다. 이 복음 때문에 내가 사도가 되었고, 너희도 그 복음을 들었으니, 이제 함께 은혜와 평강을 누리자. 그리고 그 복음에 합당한 믿음과 순종을 드리자.” 이것이 로마서 1장 2~7절에 담긴 바울의 간절한 인사이며, 동시에 교회의 사명이다.
장재형 목사가 강조하는 바 역시 동일하다. 우리는 반드시 복음의 전부, 즉 ‘오심(성육신)’과 ‘죽으심(십자가)’, 그리고 ‘부활하심’을 하나로 묶어서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한 가지만 전하거나 믿어서도 안 되고, 셋 중 한 가지만 강조해서도 안 된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으심, 그리고 부활로 승리하신 하나님 아들이심을 분명하게 증거해야 한다. 이것이 온전한 복음이며, 우리를 살리는 기쁜 소식이다.
오늘날도 세상은 여전히 여러 목소리를 낸다. 누군가는 인간의 이성과 지식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하고, 또 다른 이는 쾌락과 물질의 풍요가 인생의 목표라고 선언한다. 그러나 결국 그 어떤 것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근원적 문제는 ‘죄’와 ‘죽음’이다. 이에 대한 해답은 오직 십자가와 부활 안에 있다. 한때 기독교를 ‘죄인을 위한 종교’라 부르며 조롱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사실 그 말이야말로 복음의 정수를 보여주는 표현이다. 예수님이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 9:13) 하셨듯이, 기독교는 죄인들을 위한 종교다. 그리고 그 죄인이 바로 ‘우리 모두’임을 깨닫는 순간, 복음은 가장 아름다운 희망의 메시지로 다가온다.
바울의 로마서는 이 희망의 메시지를 체계적으로 풀어 놓은 ‘복음의 대헌장’이라 불린다. 그 서문에서부터 바울은 “이 복음이 나를 바꾸었고, 지금은 너희도 이 복음으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힘주어 말한다. 한때 교회를 박해하던 바울이, 이제는 교회를 세우는 사도로 변한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죄인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다. 그리고 그 사랑의 능력은 십자가와 부활에서 나온다.
결론적으로, 로마서 1장 2~7절은 복음의 본질을 간결하되 강력하게 보여준다. 복음은 인간의 철학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고, 그 약속은 예수님의 성육신과 십자가, 부활로 완성되었다. 예수님은 참 인간으로 낮아지셨고, 죽음을 이기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공적으로 증명되셨다. 그분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들에게는 은혜와 평강이 임하며, 새로운 정체성(성도, 곧 거룩하게 된 자)과 사명이 주어진다. 바울이 자신을 가리켜 ‘복음을 위해 부름받은 종’이라 일컬었듯, 우리 역시 복음을 듣고 변화되어, 이제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도구가 된다.
장재형 목사는 이 모든 가르침 위에 “복음은 곧 사랑”이라는 메시지를 덧붙인다. 예수님의 낮아지심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의 의미는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없이는 설명될 수 없다. 결국 복음이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는 사실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언이며, 그 독생자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임한 구원의 기쁨이다. 이 복음을 받은 이들은, 반드시 그 기쁨과 감사로 인해 ‘순종의 열매’를 맺게 된다. 그리고 그 삶의 모습이 곧 ‘복음의 삶’이다.
결국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핵심은, 첫째, 복음은 이미 약속된 것의 성취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역사 속에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둘째, 그 복음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완성되었고, 그 능력이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해방해 참된 평강에 이르게 한다는 사실이다. 바울이 처음부터 끝까지 외치는 복음이란, 바로 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베푸신 영원한 구원 계획이며, 이 복음은 우리의 인생과 세상을 뒤바꿀 만한 능력을 지닌다.
로마서 서두에서 나타난 바울의 인사는, 단순한 편지 예절이 아니다. 그것은 곧 모든 성도에게 주어진 축복이고 동시에 요청이다. “복음을 믿어 은혜와 평강을 누려라. 그리고 복음을 위해 부름받은 자답게 살아가라.” 이것이 장재형 목사가 설교에서 누차 강조하는 요점이기도 하다. 우리는 복음을 듣고, 그 복음의 진리를 이해하는 데서 멈추어선 안 된다. 복음이 우리 안에 살아 역사하도록, 날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하고, 그 부활의 생명력을 내 삶의 모든 영역에서 실천해 나가야 한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교회는 진정한 복음 공동체가 되며, 성도 개인도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라는 명칭에 합당한 삶을 살게 된다.
결국, 우리는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늘 고백해야 한다. 이 고백 안에는 예수님의 오심(성육신), 죽으심(십자가), 다시 사심(부활)이 한데 응축되어 있다. 바울은 이 사실을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확증하며,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롬 1:6)라고 부른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름받은 사람들의 모임이기에, 이제 그 이름을 위하여(롬 1:5) 세상에 나가 복음을 전한다. 이것이 우리가 ‘성도로 살아가는 이유’이며, 복음이 우리에게 준 가장 강력한 사명이다.
바라건대, 로마서 1장 2~7절의 말씀을 묵상하는 모든 이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고 오셨다”는 성육신의 은혜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다”는 구원의 능력을 마음 깊이 새기게 되길 바란다. 그리하여 죄의 멍에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진정한 자유와 기쁨, 그리고 순종의 은혜를 누릴 수 있길 소망한다. 그리고 이 복음의 삶을 통해, 서로를 사랑하며 섬기고, 세상에 주님의 빛을 드러내는 공동체를 이루어 가길 기도한다.
이는 장재형 목사가 설교와 사역에서 줄곧 지향하는 바이기도 하다.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이 복음, 즉 성육신에서 십자가와 부활에 이르는 예수 그리스도의 전 인격과 사역을 자신의 삶에 담아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바울이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 외쳤던 그 인사를 실제로 체험하게 된다. ‘죄인’에서 ‘성도’로, ‘절망’에서 ‘소망’으로 변화되는 이 여정이야말로 복음의 진수이며, 여기에 “기독교는 죄인의 종교”라는 구절의 참뜻이 살아 숨 쉬게 된다.
결국, 복음의 여정은 우리 각자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다. 당신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혹은 머리로만 알고 있으면서, 아직 마음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가? 바울이 증언하고, 장재형 목사를 비롯해 무수한 신앙 선배들이 반복해서 증거해온 것은, “복음은 실제다”라는 사실이다. 이 실제를 삶으로 경험하고, 그 경험을 다른 이들에게 간증하며, 그들 역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도록 돕는 것이 곧 교회의 존재 이유요, 성도의 고백이다.
부디 우리가 오늘 이 말씀을 붙들고, ‘약속의 성취’로 오신 예수님의 성육신, 그리고 ‘죽음을 깨뜨린’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더욱 깊이 묵상하자. 바울이 “복음으로 부름받았다”고 외쳤듯, 우리도 “복음을 위해 부름받은 자”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이 부르심 앞에서 순종하고, 우리에게 허락된 은혜와 평강을 누리며,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거룩한 통로가 되길 간절히 소망한다.
그렇게 살아가는 이들이 모여 있는 곳, 바로 그곳이 참된 교회다. 교회의 표지는 십자가, 교회의 생명은 부활, 그리고 교회의 사명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성육신을 통해 죄인들을 찾아오신 하나님, 십자가로 그 죄인들을 구원하신 하나님, 그리고 부활로 그들을 영원한 생명 안에 살도록 인도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우리가 이 복음의 이야기와 함께 오늘도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한다.
아울러, 로마서를 계속 공부하면서, 바울이 “이 복음으로 내가 부름을 받았다”고 고백하는 깊은 이유를 더 온전히 깨닫게 되길 바란다. 이는 바울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결국 “복음 때문에 부름받았다.” 그리고 그 복음을 통해 죄인에서 의인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존재들이다. 이 부르심에 감사하며, 매일의 삶 속에서 복음이 실제적 능력으로 작용하도록 깨어 있어야 한다.
이상으로, 로마서 1장 2~7절에 대한 묵상을 바탕으로, 약속으로 주어진 복음과 성육신의 신비,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로 완성된 복음의 능력을 정리해 보았다. 장재형 목사가 여러 설교를 통해 지속적으로 강조해 온 바와 같이, 복음은 우리에게 “약속된 사랑의 사건”이자 “생명을 주는 능력”임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의 언어와 삶 전체로 이 복음을 증거하며, 이방인 중에서도, 또 가까운 이웃 가운데서도 ‘믿어 순종케 하는’ 거룩한 도구로 쓰임 받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허락하시는 은혜와 평강이, 이 복음을 붙드는 모든 이에게 충만하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