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을 헐라 – 장재형목사

1. ‘성전을 헐라’라는 도전과 십자가의 정신

예수께서 공생애 동안 보여 주신 많은 사역 중 하나는 예루살렘 성전 정화 사건입니다. 요한복음 2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올라가셨고, 성전 뜰 안에서 제물(소, 양, 비둘기)과 관련된 장사를 하는 이들을 쫓아내고 상을 뒤엎으셨습니다. 이것은 당시 종교 권력자들이 지닌 악습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상징적 행동이었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제사를 드리기 위해 소나 양, 혹은 비둘기를 준비해야 했고, 이를 위한 돈 바꾸는 장사치들도 성전 뜰에서 영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가난한 자들에게조차 엄청난 고가에 제물을 팔고, 성전 밖에서 구해 온 제물은 흠을 찾아 들어오지 못하게 만들던 방식은 종교 기득권이 하나님의 성전을 돈과 권력으로 오염시키고 있음을 극명하게 드러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당시 대제사장 가문, 특히 안나스 가문의 문제점이 노골적으로 폭로됩니다. 대제사장직을 세습하고, 로마 제국과 결탁하며 스스로 이익을 챙기던 안나스 가문은 ‘성전 장사’를 이용해 백성의 신앙심을 거래 대상으로 삼았고, 그 수익과 권력을 이용해 종교적·정치적 기반을 더욱 공고히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요2:16)고 선언하셨고, 이때 제자들은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시 69:9)라는 구약의 예언을 떠올리며, 메시아가 불의한 종교 시스템을 그대로 두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체험했습니다.

장재형(장다윗) 목사는 이 장면에서 두 가지 핵심을 강조합니다. 첫째, 예수님의 성전 정화는 단순히 ‘성전 안에서의 장사 행위’만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그 배후에 있는 인간의 죄성, 즉 기득권과 돈과 권력에 대한 탐욕이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간을 더럽힐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사건이라는 점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당시 유대인 신앙 체계의 중심이었고, 그 자체가 신성 불가침의 영역처럼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이뤄지던 부정과 거짓, 사람을 수탈하는 제사 시스템은 결코 하나님의 뜻과 어울릴 수 없었고, 예수님은 아버지의 이름이 욕되게 되는 현장을 결코 방치하지 않으셨습니다.

둘째,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라고 하심으로써, 곧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새로운 성전’이 세워질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말씀을 곧바로 이해하지 못했고, “이 성전은 46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요 2:20)라며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신 ‘성전’은 ‘자신의 몸’을 가리킨 것이었습니다. 즉, 더 이상 눈에 보이는 건물로서의 성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구원과 예배의 중심이자, 부활의 몸을 통해 새로워진 ‘영적 성전’의 기초가 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파격적인 메시지, 즉 예수 그리스도가 스스로를 ‘진정한 성전’으로 선포하셨다는 말은 당시 종교 권력층에게 큰 위협이 되었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예루살렘 성전은 모든 신앙생활과 율법 준수의 상징이었고, 우주의 중심이라 여겨졌습니다. 누가 그 성전을 헐어버린다 하거나, 성전보다 더 큰 권위를 가진 존재가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극단적인 신성 모독으로 간주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안나스, 가야바를 비롯한 대제사장 집단은 이 예수의 선언과 행보를 매우 위험하게 느꼈고, 실제로 예수님이 체포되며 십자가의 길을 걷게 된 데에는 이러한 성전 파괴 선언이 주요한 ‘죄목’으로 작용했습니다.

장재형 (장다윗)목사는 이 지점에서, 우리 내면에도 ‘헐어버려야 할 성전’이 있음을 통찰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중심성을 가지고 있고, 그 자기중심성을 자신만의 ‘성전’처럼 여겨 무너지지 않으려 하며, 그 성전 안에서 자신의 이익과 욕심, 고집, 체면을 지키려 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특별히 십자가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도전은 “네 안에 있는 그 거짓된 성전을 헐라”는 말씀일 수밖에 없습니다. 헐어지지 않는 자기중심성, 자신만의 절대 영역이라 우기는 것들, 이것이 곧 죄의 뿌리이며 모든 분쟁과 불화의 시작점이 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8장을 보면, 예수님이 실제로 체포되시고, 대제사장 안나스에게로 끌려가심으로써, 성전 정화 사건 때부터 시작된 종교 권력층과의 충돌이 극단으로 치닫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물으니”(요 18:19)라는 구절은, 그들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추종자들’을 어떻게든 죄로 몰아넣으려는 저의를 엿보게 합니다. 안나스가 먼저 예수님을 신문한 이유는, 예수님이야말로 성전을 헐라 하고(자신을 진정한 성전이라고 선언한 것과 동등하게 여겨진 말), 자신들의 기득권 체계를 위협하는 가장 큰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대제사장 집단에 의해 ‘공개 재판’이 아닌 밤중의 음모적인 절차를 거쳐 고발당하고 결국 십자가에 내어주신 사건은, 거짓 권력과 타락한 종교가 어떻게 참 진리를 배척하는지 여실히 드러냅니다. 그리고 그 저변에는 자신들의 권력 기반인 ‘눈에 보이는 성전’과 그를 둘러싼 모든 세속적 이권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태도가 있었습니다. 복음서 곳곳에서 예수님이 기존 종교 체제와 맞부딪히는 장면을 보면, 모든 갈등의 핵심은 예수님의 메시지와 기득권 종교 지도자들의 탐욕이 충돌한다는 점입니다.

장재형 목사가 강조하듯, 교회라는 이름, 혹은 어느 개인의 신앙의 울타리 안에서도 동일한 문제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곧 교회가 본연의 영적 역할을 상실하고 세속적 욕망이나 권력을 지향한다면, 예루살렘 성전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든 자들과 다를 바 없게 됩니다. 또, 개개인도 교회를 다니면서 마음 깊숙이 여전히 자신의 작은 성전을 지키기 위해 복음에 저항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전을 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신앙인이라면 누구에게나 강력하게 들려야 하며, 내 안에 세워진 모든 이기적 성전을 해체함으로써 비로소 ‘부활의 성전’이 일어설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바로 이 점에서 십자가의 정신이 두드러집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내가 생명을 버리는 것은 다시 그것을 얻기 위함”이라고 하셨고(요 10:17), 자기 몸을 헐어, 사흘 만에 새로운 삶을 일으키겠다는 약속을 실천해 보이셨습니다. 이는 말뿐이 아니라 실제 십자가의 길을 통해 확증되었습니다. 기독교의 핵심 교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인데, 이것이 곧 예수님의 ‘성전 파괴와 재건’이라는 상징적 행동과 깊이 연결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성전을 헐라”는 말씀이 결코 폭력적 파괴나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오래된 것의 죽음과 새로운 것의 탄생’을 가리키는 복음의 핵심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8장에 등장하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 사건도, 율법과 복음이 충돌하고, 또다시 예수님이 거짓 종교 권력 앞에서 위협받는 장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대로라면 돌로 쳐 죽여야 할 이 여인을 예수님은 결국 용서하시고, “너희 중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고 선언하심으로써, 율법보다 크신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의 법을 선포하셨습니다. 이 역시 기존 종교 체계 입장에서는 파격적인 ‘율법 파괴’처럼 비쳤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체포되신 후, 스데반도 같은 맥락에서 잡혀 돌에 맞아 죽었는데, 스데반에게 씌워진 죄목 중 하나가 곧 “이 사람이 성전을 헐겠다고 했고, 또 모세의 율법을 고치려 한다”고 한 것입니다(행 6:13-14).

결국 ‘성전을 헐라’는 예수님의 메시지는 외형적 제도나 율법에 매어 있는 신앙이 아닌, 영적 실체이신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사귐으로 나아가라는 선언이며, 그 중심에는 자기 부정과 헌신, 그리고 죄인을 향한 무한한 용서가 놓여 있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가리켜, “내 안의 이기적 성전을 무너뜨리고, 그 자리에 주님의 십자가 정신을 세움으로써 진정한 교회와 성령의 역사가 시작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복음서 전체, 특히 요한복음이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핵심 사역, 즉‘화목과 구원’을 향한 길이라고 역설합니다.

다시 요한복음 2장으로 돌아가 보면, 예수님은 이미 부활 이후를 예견하시며 “사흘 만에 이 성전을 세우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도 실제 부활 사건을 체험하고 나서야 이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깨달았습니다(요 2:22).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없이는 부활도 없고, 옛 것을 철저히 헐지 않으면 새 것이 일어날 수 없다는 복음적 진리가, 바로 성전 파괴 선언 속에 압축적으로 담긴 셈입니다. 이는 오늘날 교회와 신자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며, 자신만의 ‘우주의 중심’처럼 여기던 것을 과감히 내려놓으라는 부름이기도 합니다.

장재형 목사가 목회 활동에서 강조하는 바는, 기독교 신앙이 결코 안전지대 안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늘 우리를 도전하고 뒤흔들며 ‘거짓된 종교심’과 싸우도록 이끈다는 것입니다. “성전을 헐라”는 메시지는 그저 교리적 문구가 아니라, 각자가 지닌 고집스런 성벽, 정죄적 시선, 자기영광을 구하는 탐욕 등 모든 것을 내려놓으라는 초청입니다. 이 초청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예수님 시대의 종교 권력자들과 같이 불순한 것에 안주한 채 참된 복음을 배척할 수도 있다는 경고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이 부르심에 순복하여 자신을 낮추고 자기를 부정할 때, 비로소 십자가의 영광과 부활의 영광을 함께 체험할 수 있다고 장재형목사는 거듭 가르칩니다.

종교 권력과의 충돌이 극에 달했던 십자가 사건을 면밀히 살펴보면, 예수님의 오심은 낡은 율법주의와 타락한 구조를 깨뜨리는 혁명적 행위였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성전을 헐라”는 구절은 그 혁명의 중심 사상, 곧 십자가의 희생정신을 통찰하게 하는 열쇠로 작용합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대목에서, 신앙인이 진정 성숙해지려면 바로 이 ‘성전 파괴와 재건’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율법의 문자적 준수나 교회 안에서의 의식, 제도적 틀을 지키는 것으로는 한계가 있으며, 결국 자신의 옛 자아를 완전히 깨뜨리고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참된 ‘영적 성전’이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이러한 십자가의 정신이 없다면 교회는 결국 구약 시대 제사장들과 동일하게 권력과 돈의 매개체로 전락하기 쉽습니다. 성전 정화가 필요했던 예루살렘처럼, 현대 교회도 안팎으로 ‘정화’가 끊임없이 요구됩니다. 이것이 “성전을 헐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가 지금도 되새겨야 하는 이유입니다. 무너뜨릴 것들을 향해 눈을 감고 덮어두는 것은 결코 복음이 요청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와 개인이 신앙고백 속에서 스스로를 성찰하고, 타락하거나 변질된 요소들을 발견하면 아낌없이 내던지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성령이 임재하시는 새로운 교회의 모습, 곧 ‘주님의 몸된 성전’이 가시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결론적으로, 장재형 목사는 “성전을 헐라”라는 본문을 해설하며, 이것이 곧 ‘내가 죽고 주님이 사는 길’이자 ‘오래된 율법적 틀을 넘어서는 복음적 자유’로 가는 시작점임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이 메시지를 온전히 받아들인 사람은 자발적으로 자신을 비우고, 이웃과 교회를 섬기게 됩니다. 십자가 정신이 구체적으로 실천되는 곳에는 어떤 담도, 분쟁도, 차별도 설 자리가 없습니다. 그 거룩한 길이 바로 예수님이 여신 ‘성전 파괴와 재건’의 길이요, 우리 모두가 거쳐야 할 십자가의 길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소주제 2: 화평의 길과 성령의 시대, 그리고 참된 교회의 본질

‘성전을 헐라’는 선언이 단순히 과거 유대교 체제에 대한 물리적 파괴가 아니라,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영적 선포였다는 점은 사도행전의 전개와도 맞물려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후, 제자들은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해 복음이 얼마나 확장성과 보편성을 가지는지 체험하게 됩니다. 특히 사도행전 2장을 보면, 120명의 제자가 모인 곳에 성령이 임함으로써 모두가 하나님을 찬양하며 각 나라 말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은혜로운 사건을 통해 과거처럼 특정 계층이나 제도권 지도자들만이 하나님의 임재를 맛보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성령을 받는 시대가 열렸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같은 성령의 역사에서 ‘성전을 허무신 예수님의 의도’를 더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고 봅니다. 과거에는 예루살렘 성전이 신앙생활의 절대적 중심이었으나, 이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직접 우리의 ‘거룩한 예배의 대상’이 되시고, 그를 통해 임하는 성령이 새 시대의 예배 처소가 된 것입니다. 더 나아가, 사도들은 “너희가 성전인 것”이라고 선언함으로써(고전 3:16, 6:19 등), 이제 공동체 안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며, 그리스도인 개개인이 ‘살아 있는 성전’이자 동시에 ‘연합된 몸’임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성전’이 세워지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옛 성전’이 허물어져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당시, 성전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다는 보도(마 27:51)는 상징적으로, 더 이상 구약의 제도적 성전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매개가 아님을 보여줍니다. 이제 누구나 그리스도를 통해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더 이상 대제사장이나 특정 의식에 구속되지 않는 자유가 선포되었습니다. 이것은 구원 역사의 획기적인 변화였고, 동시에 옛 종교 권력 체제에겐 치명적인 타격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성전을 헐라”는 예수님의 발언이 단지 건물을 없애자거나, 과격한 반체제 운동을 일으키자는 의미가 아니라, ‘성령의 시대’가 도래하는 전환점을 미리 알리는 선언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셨다”(엡 2:14)라고 요약합니다. 이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이 사라지고,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하나가 된다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 뜰에서도 이방인들이 들어올 수 있는 지역을 제한적으로만 허용했는데, 그 벽을 넘으면 사형에 처할 수도 있을 정도로 엄격한 분리 정책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는 그러한 차별의 담이 무너지고, ‘새 사람’(엡2:15)으로 지음을 받아 모두가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습니다(엡 2:19).

장재형 목사는 이 에베소서의 가르침을 교회 공동체에 직접 적용하며, “참된 교회는 차별이 존재할 수 없는 곳”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단순히 조직 차원에서 평등을 표방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로 인해 ‘나의 옛 자아가 완전히 무너지고, 오직 예수 안에 새롭게 태어났음’을 실제 삶으로 증명하는 공동체라는 뜻입니다. 교회 안에 여전히 차별이나 담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아직 헐려야 할 ‘옛 성전’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성전을 헐라”는 말씀은 개인과 공동체가 자신 안에 존재하는 배타적 경계, 미움, 불의한 특권 등을 발견하고, 십자가 앞에서 철저히 회개하며 그 담을 허무는 삶으로 초대합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복음은 세리, 창녀, 이방인, 여인, 소외된 자들을 품어 주셨고, 그들을 오히려 하늘나라에서 높여 세우셨다는 점을 곳곳에서 보여 줍니다(막 2:15-17 등). 이것은 옛 율법적 사고에 물들어 있던 유대인에게 혁명적인 메시지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소와 양, 비둘기 파는 장사치들은 ‘유월절 제물 준비’라는 제도적 필요를 악용해 가난한 자들까지 착취했지만, 예수님은 세리를 비롯해 죄인 취급받는 이들을 식탁 교제에 초대하셨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이러한 예수님의 선교 방식과 정신을 이어받아, 모든 사람을 예배 공동체로 불러 모으는 ‘열린 성전’이 되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교회는 역사를 거쳐 오며 때로 성직 계급과 권력이 결탁해서, 초대교회 정신과 멀어진 모습도 보였습니다. 종교개혁 시기에도 마르틴 루터나 츠빙글리, 칼뱅 등이 소위 ‘타락한 성전을 허물고 복음의 순수성을 회복하자’고 외치며 새로운 흐름을 만든 것은, 예수님의 “성전을 헐라”는 말씀을 시대적으로 재해석한 사건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장재형 목사 역시 현대 교회가 위기에 처했을 때, 이 말씀을 다시금 소환해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고, 성령의 인도하심 아래서 옛 구조를 허무는 개혁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특히 교회가 세상의 ‘화평’과 ‘화해’를 이루는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먼저 내부적으로 하나 됨을 이뤄야 하고, 그리스도의 핏값으로 산 공동체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육체를 ‘성전’으로 칭하시며 그 성전을 헐고 사흘 만에 일으키시겠다고 하셨는데, 이는 곧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완성되는 구속 사건을 예표합니다. 이 구속 사건의 결과로 나타난 가장 특징적인 현상 중 하나가 바로 “성령 강림으로 모든 이들이 하나님 앞에 동등하게 서게 됐다”는 사실입니다. 남종이나 여종이나, 늙은이나 젊은이나,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행 2:17-18), 차별이 철폐된 성령의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교회가 이러한 성령의 시대 정신을 이어받아 ‘성전 파괴와 재건’의 메시지를 자기 자신에게도 적용하지 않는다면, 곧 스스로를 돌아보고 회개하지 않는다면, 과거 안나스와 가야바의 길을 뒤따를 위험이 있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교회가 십자가의 복음을 제일선에 두지 않고, 교권 다툼이나 재정 문제로 인해 서로를 헐뜯는다면, 이미 거짓된 성전에 잡혀 있는 것”이라 직설적으로 말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성령의 능력이 나타날 수 없고,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비난만 받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성전을 헐라”는 말씀은 단지 2,000년 전 유대교 체제에 대한 선언이 아니라, 지금 우리 교회가 현실 속에서 부딪히는 모든 불의·교만·분열을 내려놓으라는 시급한 명령이기도 합니다.

한편, 장재형 목사는 개인의 내면에 대해서도 같은 논리를 적용합니다. ‘성전을 헐라’는 것은 공동체적 차원의 교회 개혁에만 국한되지 않고, 각 신자가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욥기에 “하나님을 대면한 자는 스스로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한다”(욥 42:6)는 대목이 나오듯,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성과 한계를 온전히 인정해야만 주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간은 ‘자기만의 성전’을 지키려 하고, 그 안에서 안정감을 찾고자 하는 본성을 지닙니다. 장재형목사는 그 성전을 허무는 것이 곧 ‘온전한 회개와 성령의 내주’를 위한 필수 과정이라 하며, 이를 십자가의 삶, 곧 ‘자기 부정과 자발적 희생’이라는 키워드로 연결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갈 2:20)는 바울의 고백은 ‘성전을 허무는 것’을 아주 극단적으로 표현한 신앙 고백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바리새인으로서 율법의 의를 따라 흠 없이 살던 자였지만(빌 3:4-6),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는 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예수와 함께 죽어 새로운 피조물로 살겠다고 선언합니다(빌 3:7-8). 이것이 곧 예수님이 주신 “성전을 헐라”는 복음의 실천이며, 부활 신앙의 실제적 적용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참된 교회란 이러한 바울의 자세를 본받아, 과거에 자랑하거나 의존하던 것을 모두 주님 앞에 내려놓고, 오직 주님의 생명으로 일어서는 곳입니다.

현대 사회는 분열과 갈등, 배제와 폭력이 만연하지만, 동시에 ‘함께 잘 사는’ 길을 고민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이 이 땅에 제시하는 해답은 “원수까지 사랑하고, 서로 발을 씻어 주며, 필요하면 내 것을 내려놓아서 이웃을 살려라”라는 급진적 사랑과 희생입니다. 그 근본은 십자가 정신이며, “성전을 헐라”는 비움과 자기를 내려놓는 태도가 필수적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런 점에서 기독교 신앙의 독특성을 강조합니다. 세상의 이념, 철학도 나름의 이상을 설파하지만, ‘성전을 스스로 허무시는 하나님’이라는 복음만큼 급진적인 메시지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고, 그분이 죽으심으로 새 생명이 열렸다는 사건 자체가 믿을 수 없을 만큼 파격적이기에, 이것을 진심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삶의 방식이 근본적으로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그는 가르칩니다.

교회 안의 예배도 마찬가지로, ‘성전을 허무는 정신’이 담기지 않으면 결국 형식적이고 추상적 의식에 그치고 맙니다. 예배는 주님 앞에 자신을 내려놓고, 서로가 서로를 섬기며, 죄인까지도 환대하는 자리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성령은 공동체 안에 역사하시고, 교회의 지체들은 “너희 몸이 성령이 거하시는 전인 줄 알지 못하느냐”(고전 6:19)는 말씀을 체험하게 됩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영적 원리를 한국 교회, 더 나아가 전 세계 기독교 공동체가 다시 한번 붙들어야 한다고 촉구합니다. 왜냐하면 시대가 빠르게 변하더라도, 복음이 지닌 “낮아짐과 헐어짐의 능력”은 결코 바뀌지 않고, 오히려 점점 더 절실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문화권에서 복음이 전파될 때 나타나는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전을 허무는 행위, 즉 자기가 세워 놓은 최고의 권위나 전통을 포기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순절의 성령 강림 이후로, 복음은 언어·문화·인종·신분의 벽을 넘어 전파되었습니다. 세계 각지에서 신앙을 갖게 된 사람들은 각자의 ‘작은 성전’을 무너뜨리고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는 길을 경험해 왔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더 이상 ‘누가 유대인이고, 누가 이방인인가’를 묻지 않으며, 함께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는 표징을 간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의 “성전을 헐라”라는 선언이 결국 인류 보편적 구원의 길로 이어지는 핵심 이유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목회 현장에서, 그리고 다양한 선교적 활동을 통해 “교회가 곧 예수님의 성전”임을 가르치면서, 그 교회가 세속적 권력이나 물질적 유혹에 빠지면 안 된다는 점을 거듭 강조해 왔습니다. 예수님 당대의 예루살렘 성전이 성전세와 희생 제물을 매개로 백성을 착취하던 것처럼, 현대 교회도 교회 재정을 마치 사적 이익처럼 운용하거나, 교권을 이용해 신도들을 지배하려는 모습을 보일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그리고 그런 상황이 반복될수록 “성전을 헐라”는 예수님의 음성은 더욱 절실히 들려야 합니다. 그 음성에 순종하여 교회가 회개와 자정을 실천할 때, 비로소 세상은 교회를 향한 신뢰를 회복하고, 복음의 참된 빛이 드러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성전을 헐라”는 말씀을 단지 과거사로만 치부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이 주신 이 도전적 선언은 2,000년 교회사의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개혁과 부흥을 촉발해 온 근본 원리였습니다. 아울러 개인적으로도, 신앙이 깊어질수록 우리는 더 철저히 자신을 내려놓아야만 하며, ‘내가 지키고 싶은 욕망의 성전’을 주님의 손에 맡겨 허물어뜨리도록 내어드려야 합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참된 자유와 기쁨, 그리고 공동체의 연합이 열매 맺는 것을 볼 수 있게 됩니다.

결국, 요한복음 18장에서 예수님이 체포되시고, 그 종교재판 과정에서 “네가 어떤 죄를 지었는지 밝히라”는 식으로 압박받았던 상황은, 예수님의 메시지가 얼마나 종교 권력자들에게 위협적이었는지 단적으로 보여 주는 예입니다. 그 핵심은 단순한 교리 논쟁이 아니었습니다. “성전을 헐라”는 말씀은 곧 대제사장과 같은 기득권에게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자신들의 기반을 뒤흔드는 혁신적 가르침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굴하지 않았고, 십자가에서 실제로 몸을 찢기심으로써 그 말씀을 완수하셨습니다. 그리고 사흘 뒤에 부활하심으로,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새 성전의 시대’를 열어젖히셨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같은 복음의 결론부가 “우리 역시 성전을 허물어야만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을 누릴 수 있다”는 교훈을 절대 잊지 말라는 초대라고 해석합니다. 자기를 부정하고, 옛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을 때만이, 부활의 기쁨이 실제로 내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 내에서의 분란, 가정과 사회 안에서의 불화도 사실 근본을 들여다보면, “자신의 성전”을 포기하지 못하기에 발생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화평의 길”(엡 2:14)로 초대하시며, 당신의 몸으로 모든 담을 허물어 주셨습니다. “성전을 헐라”는 도전 뒤에는 곧 “내가 다시 세우리라”는 약속이 따라오고, 그 약속은 결코 우리를 파멸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풍성한 생명으로 이끄는 하나님의 구원 경륜입니다.

예수님께 돌로 치려 했던 이들이, 또 예루살렘 성전을 절대적이라 믿었던 이들이 결국 그 찬란한 부활의 의미를 처음에는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성령 강림 이후, 제자들은 담대히 이 소식을 전파했고, 스데반조차 같은 이유로 죽임을 당했으나, 그 피가 오히려 복음 전파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성전을 헐라”는 복음적 도전은 때로 우리를 박해받게 만들 수 있고, 세상이나 기득권 종교층으로부터 공격을 당할 수도 있지만, 그 길 끝에는 승리의 부활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교회가 이 사실을 잊지 않는다면, 어떠한 도전과 비난에도 불구하고 참 교회의 본질을 지켜 갈 수 있습니다.

정리하자면, ‘성전을 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사랑과 화평, 구원과 희생이 만나는 십자가 신앙의 정수입니다. 그분은 “내가 버리면, 내가 헐리면, 새 것이 일어난다”고 하셨고, 그것을 스스로 실천하셨습니다. 이제 그 길을 따르는 교회와 신자라면, 마땅히 “주님의 집을 위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시 69:9)는 고백을 공유해야 합니다. 다만 그 ‘주의 집’은 결코 외적 건물이나 제도만을 의미하지 않으며, “너희가 곧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영적 실체로 나타납니다. 이 내면의 성전은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 그리고 성령의 임재로만 세워지며, 이를 통해 차별과 담이 허물어진 공동체가 탄생할 수 있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런 점을 “복음의 혁명성”이라 부릅니다. 옛 틀과 죄성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복음의 새로움을 맛보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반드시 헐고 다시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죄인들에게 베푸신 ‘용서의 도식’이자, 스스로 낮아지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초대하시는 “화평의 길”입니다. 궁극적으로, 이 길이야말로 신앙인 개인과 공동체가 진정한 교회됨을 완성해 가는 과정이자, 성령이 활짝 열어 놓으신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는 좁은 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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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과 부활의 서막 – 장재형(장다윗)목사

1.안나스의 배후와 종교 권력의 타락

장재형(장다윗)목사가 강해한 요한복음 18장 12절에서 21절까지의 장면을 중심으로 묵상한 글인데 본문은 예수님을 잡아 심문하는 종교권력의 어두운 민낯을 극적으로 드러낸다. 이 본문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대목은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라는 표현이다. 이는 단순히 절차적인 문제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당대에 존재했던 거짓된 종교권력의 근본적인 부패를 보여주는 결정적인 단서이다. 당시 유대사회에서는 산헤드린 공의회가 종교재판을 주관했으며, 그 의장은 현직 대제사장이 맡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을 결박해 붙잡은 자들이 가장 먼저 끌고 간 곳이 현직 대제사장 가야바가 아닌, 그의 장인(丈人)인 안나스의 집이었다는 사실은 여러모로 심각한 문제를 시사한다.

안나스는 과거 A.D. 6년부터 15년까지 약 9년 정도 대제사장직을 수행한 바 있었고, 이후 자신의 다섯 아들을 모두 대제사장 자리에 앉혔으며, 결국 사위인 가야바에게까지 그 권력을 세습시킨 악명 높은 인물이다. 본래 유대교의 전통적 제사장직은 종신직이었고, 그만큼 존경받으며 권위 있는 자리였다. 하지만 로마 제국이 유대를 지배하게 된 후, 대제사장직은 돈과 정치적 줄대기에 의해 좌우되는 세속적 권력이 되어버렸다. 로마는 자신들에게 협조적이고 재정적으로 뒷받침이 될 만한 인물을 대제사장으로 세웠고, 안나스는 그러한 구조 속에서 막대한 금전을 로마에 바치며 제사장직을 잡고, 한편 성전 안에서는 장사와 환전으로 부를 축적하며 거대한 종교적 기득권을 형성했다.

당연히 이런 인물에게 예수님의 사역과 말씀은 눈엣가시였다. 예수님은 공생애 내내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이 하나님의 전(殿)을 장사치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질타하시며, 성전을 뒤엎고 정화하셨다. 복음서들 가운데 요한복음 2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비둘기와 양, 소를 파는 자들의 상과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버리며 말씀하신 장면이 등장한다. 그 당시에 ‘성전 안에서 파는 제물만 검열을 무사 통과하도록 하고, 바깥에서 준비해온 제물을 무조건 불합격 처리하여 다시 성전에서 비싼 값에 사도록 하는 구조’가 만연했는데, 그 중심에 바로 이 대제사장 일가의 이해관계가 있었다. 안나스와 그를 추종하는 종교 권력자들은 이를 통해 막대한 재산을 축적했고, 성전세나 환전에 대한 수익 또한 마찬가지의 구조로 거둬들였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이야말로 그들의 기득권을 무너뜨릴 가장 위협적인 존재였다. 안나스는 ‘율법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자신을 포장했지만, 정작 가장 거룩해야 할 성전을 돈과 권력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전락시켰고, 온갖 정치적 뒷거래로 로마와 결탁해 대제사장직을 세습하며 부와 명예를 지켜왔다. 그리하여 예수님이 성전을 청결케 하시고,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리라”고 하신 말씀을 들으며, 안나스는 이 도전자를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고 느꼈을 것이다. 종교적 폭정과 강압, 그리고 거짓된 법 적용을 통해서라도 예수님을 잡아내는 것, 그것이 그의 최우선 과제였다.

그렇다면 왜 산헤드린이 아닌 안나스 개인의 집에서 예수님이 먼저 심문을 당했을까? 유대인의 종교재판은 율법상 밤에 열 수 없었으며, 공정한 재판이 되려면 반드시 성전 뜰이나 공적으로 마련된 장소에서 낮에 이루어져야 했다. 더불어 최소 두 명 이상의 증인이 필요했고, 재판은 공정하게 진행되어야 했다. 그러나 예수님을 잡아온 이들은 어두운 밤에 은밀하게 안나스에게로 끌고 갔다. 현직 대제사장이 아닌 과거 대제사장이 예수님을 심문한다는 것 자체가 불법이었다. 또한 예수님을 사형에 처할 권한은 오직 로마 총독에게 있었으므로(유대인들에게는 사형 집행권이 없었다), 안나스는 일단 종교적 차원의 이단(異端) 정죄를 확정 지어 빌라도에게 넘기기만 하면 되었다. 어떻게든 예수님이 “율법을 거스르고, 성전을 헐고,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하며, 로마 황제 가이사 외에 다른 왕이 되려 한다”는 식으로 프레임을 씌워 형량을 무겁게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가 배반자 유다였다. 그는 예수 공동체 안의 내부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그 비밀스러운 가르침이나 예수님의 발언들을 과장 혹은 왜곡해 안나스 측에 전달했다. 요한복음 13장 30절에서 유다는 주님께서 주신 떡을 받자마자 어둠으로 떠나갔다. 그가 “밤이더라”라는 말씀은 단순한 시간적 배경일 뿐만 아니라, 영적·도덕적 어둠 속으로 그가 들어갔음을 의미한다. 그는 이미 대제사장 측과 은 30냥에 계약하여 예수님을 넘겨줄 계획을 세운 상태였으며, 예수님께서 ‘헐라’고 말씀하신 성전, 또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주장하신 부분(실제로 예수님은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여러 차례 암시하셨다) 등을 안나스에게 제보함으로써 빌미를 만들어주었다.

이처럼 안나스에게는 불법적인 심문을 행할만한 공식 권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 배후에서 사두개파 중심의 성전 경제와 권력을 틀어쥐고 있었기에, 산헤드린 전체의 움직임을 흔들 수 있는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또 대제사장직을 세습시키면서 실제 현직 대제사장인 가야바조차 자신의 ‘얼굴마담’처럼 세워놓고 배후에서 종교정치적 결정을 좌지우지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내내 이러한 거짓되고 부패한 종교 지도자들과 충돌을 피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바리새파, 사두개파, 여러 종파들 사이에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 14:6)이라 증언하시며, 사람들의 마음을 율법의 본질로 돌이키게 하고자 하셨다. 이것이 그들에게는 위협으로 다가왔고, 마침내 악명 높은 안나스가 최후의 결단을 내린 것이다.

여기서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는 바는, 종교와 권력이 결탁하면 얼마나 무서운 형태의 폭력이 나타나는가 하는 점이다. 장재형목사는 복음서의 이 장면을 연구하며, 지도자라고 스스로 자부하는 자들이 하나님을 건성으로 붙들고 사실은 세상의 힘을 빌려 사람을 해치려 할 때, 그 배후에는 어김없이 거짓과 부패가 있음을 지적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과 사랑을 지향하는 것이지만, 안나스와 같은 거짓된 종교 지도자들은 율법을 오히려 죽이는 도구로 만들고, 백성들의 믿음을 수단화해 자신의 권력과 부를 공고히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겉으로는 거룩한 척하지만 속은 독사의 자식과 같은 이들에게 “화 있을진저”라고 거듭 말씀하신 것이다. 이들은 단순히 종교적 지식을 갖고 있었을 뿐, 참된 영적 본질에서 멀어져 있었다.

우리가 살피는 요한복음 18장 19~21절에서 대제사장이 예수님께 “그의 제자들과 교훈에 대하여” 물은 것은, 그가 과연 어떠한 가르침으로 사람들을 꾀고 있기에 이렇게 세력이 형성되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유다는 “비밀스러운 가르침”이 있다고 찔러 넣었을지 모르고, 그것을 바탕으로 대제사장들은 “네가 감히 우리 전통과 율법, 그리고 로마 권력에 도전하는 가르침을 폈느냐?”라고 공격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여 이르셨다. “내가 드러내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의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히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요 18:20). 예수님은 굳이 감출 것이 없었다. 그들은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집요한 음모를 꾸몄으나, 예수님은 진리 자체였기에 자신을 숨길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보라. 저희가 나의 하던 말을 아느니라”(요 18:21)고 하시며, 증인과 증언을 통한 공정한 재판 절차를 도리어 되짚어주신다. 그러나 이미 결론은 나 있었다. 안나스와 그 일당들은 예수님께서 어떤 답을 하든 마음이 닫혀 있었고, 예수님이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신지 여부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그들의 성전 장사와 기득권을 지켜줄 정치·종교적 합의를 유지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모습이 교회 안에서도 나타날 수 있음을 경고한다. 진정한 복음을 외치고, 교회가 먼저 회개해야 한다며 성전을 가꾸려고 하면, 이미 교권주의와 물질주의에 물든 일부 세력은 오히려 그를 이단이라 공격할 수 있다. 교권세력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생각하며, 소위 ‘교회를 지킨다’는 명분하에 정작 하나님의 임재와 말씀을 거부하는 역설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교회 역사를 예로 들며, 종교개혁의 시대 때도 중세 카톨릭 교권이 물질적·정치적 힘과 결탁하여 면죄부를 팔고, 교회 세속화가 심각해졌을 때, 루터가 “오직 성경”을 외치며 진리를 환기시키려 하자 거대한 교권의 벽에 부딪힌 사례를 상기시킨다. 예수님 시대의 안나스 세력이나, 중세 시대의 교권주의자나, 오늘날 여전히 존재하는 거짓된 지도자들이나, 본질은 동일하다.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권력과 이익을 좇고, 성전을 거룩하게 지키기보다는 매매의 장소로 만들며,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는 자들을 오히려 탄압하고 추방하려고 한다.

결국 이러한 배경 속에서 예수님은 종교재판이라는 명목의 불법 심문을 받으시고, 곧 이어 빌라도의 법정으로 이송된다. 여기서부터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지만, 실제로 이 모든 음모의 실질적 시작점은 바로 안나스의 집에서 이루어진‘배후 심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밤의 비밀 거래와 음모가 예수님을 가야바와 빌라도, 그리고 끝내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로 몰아넣었다. 빌라도는 로마 권력의 대표였고, 가야바는 유대교 권력의 대표였으나, 이 양측 권력의 ‘진정한’ 조정자는 안나스였다. 요한복음이 다른 공관복음서(마태, 마가, 누가)와 달리 안나스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지목하고, 예수님을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갔다”고 기술한 것은 이 음모의 시작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독자들에게 분명히 알려주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이 장면은 ‘정치 권력’과 ‘종교 권력’이 야합하면 얼마든지 무고한 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음을 증거한다. 예수님은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으셨으며, 결국 십자가의 길을 기꺼이 가심으로써 모든 인류를 구원하신다. 아이러니하게도 안나스는 자신이 지키려고 했던 성전을 스스로 무너뜨렸다. 그 성전은 돌과 건물, 돈과 권력으로 운영되는 종교 기관이었다. 예수님은“내가 다시 세우리라”는 말씀으로 참된 성전이 ‘주님 자신’이며, 성령으로 하나 되는 공동체임을 선언하셨다. 이 메시지가 안나스와 그 세력에겐 가장 큰 위협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지키고 누려온 기득권 체제 전부가 부정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장재형목사는 오늘날에도 이런 안나스와 같은 거짓 지도자들의 양상이 재현될 수 있음을 거듭 강조한다. 크리스천 공동체가 부흥하면서 조직화되고 제도적 권위가 커질수록, 어느 순간부터 물질적 이득이나 명예, 정치적 영향력을 탐하는 자들이 생겨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겉으로는 교회나 성전을 위한다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스스로를 위한 종교 장사를 벌이게 된다. 이것이 누적되면 예수님 시대의 성전처럼, 결국 거룩이 사라지고 장사치의 소굴이 될 위험이 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어떤 시대에도 회개를 외치고 진리를 선포하는 예언자적 음성을 세우신다. 그때마다 안나스 같은 거짓 권력이 그 목소리를 잠재우고 심지어 죽이려 할 수 있는데, 성도들은 오히려 진리의 음성을 분별해내야 하고, 담대히 복음의 본질을 지켜야 한다고 장재형목사는 역설한다.

결국 요한복음 18장 12~21절에 나타난 “먼저 안나스에게로 데리고 가니”라는 장면은 단순한 에피소드가 아니라, 부패한 종교지도자와 정치 권력이 결탁하여 예수님을 고난의 길로 몰아넣는 역사의 비참한 상징이다. 동시에 이 어두운 그림자를 통해 예수님께서 빛 되심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신다. 악의 최후 발악이 있었기에 주님의 구원사역이 오히려 빛나게 되었다. 우리가 교회를 섬기며 신앙생활할 때, 안나스와 같은 인물이 혹시 우리의 공동체를 오염시키지 않는지 늘 깨어 있어야 할 것이다. 공정한 재판과 율법 준수, 그리고 성전의 본래 목적이 완전히 뒤틀려버린 한 시대를 반면교사 삼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더욱 붙들고, 회개와 거룩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고 장재형목사는 반복해서 설파한다.

Ⅱ. 베드로의 부인과 성령의 능력

이제 시선을 베드로에게로 돌려보자. 예수님께서는 결국 안나스의 집에 먼저 끌려가 불법 심문을 받으신 뒤, 공관복음서가 주로 보여주는 가야바와 산헤드린의 종교재판 과정을 거치신다. 그 와중에 제자들의 모습은 어떠했는가? 예수님께서 체포되자 대부분의 제자들이 뿔뿔이 흩어졌고, 요한복음 18장 15~16절에 따르면,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하나(‘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으로 묘사되는데, 학자들 사이에서는 요한 혹은 유다일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가 예수님을 뒤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갔다고 기록한다. 그나마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과 달리 “주님을 버려둘 수 없다”는 마음이 있었는지, 무장을 한 군인들 앞에서도 칼을 뽑아 들고 저항하려 했으며, 예수님께서 결박당해 끌려가시는 모습을 뒤쫓아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들어간 것이다.

그러나 곧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임을 부인한다. 요한복음 18장 17절에서 문지기 여종이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고 묻자, 베드로는 “나는 아니라”고 답한다. 이후 숯불을 쬐고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도 베드로는 연이어 예수님과 자신은 무관하다고 잡아뗀다. 공관복음서는 그때 닭이 울었다고 전하며, 베드로가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심히 통곡했다고 기록한다(마 26:75, 막 14:72, 눅 22:62). 사랑하는 스승을, 그것도 가장 가까운 제자였던 베드로가 세 번씩이나 부인해버린 이 사건은 기독교 신앙에서 한없이 큰 슬픔과 자책의 이야기로 남아 있다. 그러나 동시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다시 베드로를 찾아가셔서“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 21장)라고 세 번 물으시고 다시금 사도의 사명을 주시는 장면을 통해, 주님의 놀라운 용서와 사랑의 스토리로 완성된다.

왜 베드로는 그토록 담대했던 제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결정적 순간에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하고 말았을까? 이는 거대한 종교 권력과 정치 권력이 합작한 잔혹하고도 단호한 심판의 분위기, 그 앞에서 느끼는 공포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미 안나스의 집뜰에서 군인들과 하속들이 예수님을 결박해 끌고 들어갔고, 그가 곧 무거운 형벌을 받을 것이 자명해 보이는 상황에서, 베드로가“나도 그의 제자다”라고 인정했다가는 자신 또한 체포되어 혹독한 형벌을 받을 수 있다고 직감했을 것이다. 특히 안나스라는 배후 권력이 얼마나 무서운지, 그는 로마의 군병들과도 협력하며 예수님을 잡아온 이들이다. 그런데 베드로가 무슨 힘이 있어 그 대세를 뒤집을 수 있겠는가? 결국 인간적인 두려움이, 그를 한순간에 약한 존재로 만들었다.

여기서 우리는 배반자 유다와 달리, 베드로는 적어도 그 뜰까진 따라왔다는 점에 주목할 수 있다. 그는 끝까지 주님 곁을 지키고 싶었으나, 잔인한 현실 앞에서 믿음을 지키지 못했다. 그리고 그 부인 후에, 베드로는 자복하듯 통곡했다. 거기서 끝이었으면, 베드로는 한 인간의 연약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실패자로 남았겠지만, 주님의 부활 이후 베드로는 다시 회복되어 초대 교회의 기둥으로 선다. 사도행전 2장에서 오순절 성령 강림이 임했을 때, 베드로가 사람들 앞에 서서 담대히 복음을 전하고, 3000명이나 회심하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다. 과거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회개한 베드로가, 성령의 능력을 통해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하는 담대한 사도로 변화된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장면을 통해 성령의 역사가 얼마나 실제적이며 능력 있는지 강조한다. 베드로의 부인은 분명 인간적인 나약함과 두려움의 소산이지만, 그가 한없이 추락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한계를 절감한 순간이 그가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고 진정한 믿음의 용기로 재무장하는 계기가 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목격한 후, 더 이상 물러서지 않고, 설령 종교적 권력이든 정치적 권력이든 어떤 위협이 닥쳐올지라도 복음을 외치게 된다. 그 유명한 말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행 5:29)고 외치며, 박해에 굴복하지 않는 지도자로 거듭난다.

이것은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의 배신과 극명하게 대조된다. 유다는 안나스에게 정보와 기회를 팔아버리고, 결국 “나는 죄 없는 피를 팔았다”는 죄책감에 휩싸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도 회개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유다의 회개는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고, 자기 파멸로 치닫고 말았다. 반면 베드로는 심히 통곡함으로써 어떻게든 다시 주님께 돌아갈 수 있었고, 주님이 그를 찾아와 주도적으로 회복시켜주셨다. 장재형목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사랑의 본질’과 ‘성령의 회복 사역’을 강력히 강조한다. 인간의 불신과 배신이 아무리 심각하더라도, 부활하신 주님의 용서와 성령의 회복 역사는 그를 다시 일으키고도 남는다는 것이다.

또한 베드로의 부인 사건은 교회와 성도들에게 계속해서 깨달음을 준다. 누구나 신앙의 담대함을 말하고 결단을 외칠 수 있으나, 현실의 압박 앞에서 약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베드로처럼 수제자라 불리던 자도 그렇게 될 수 있다면, 오늘을 사는 우리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종교 권력과 정치 권력이 한목소리로 “예수를 따르는 자들을 제거하자”라고 외치면, 그 분위기 속에서 수많은 성도가 위축되고, 어떤 이들은 베드로처럼 “나는 예수를 모른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그 부인 후의 태도다. 베드로처럼 통곡하며 회개한다면, 주님께서는 이를 외면하지 않으신다. “양을 먹이라”고 다시 사명을 주시고, 그를 통해 복음의 큰 역사를 이루신다.

장재형목사는 현대 교회 안에서도 이러한 ‘베드로의 회개와 회복’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교회가 여러 가지 이유로 핍박을 받을 때, 성도들은 때로 세상의 조롱과 적대 앞에서 움츠러들 수 있다. 혹은 자신이 그동안 지켜온 신앙 원칙을 순식간에 포기하고 세상과 타협할 수도 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여전히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신다. 그때 우리가“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연약함으로 넘어졌습니다”라고 고백한다면, 주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우리를 다시 일으키시고, 손에 복음의 깃발을 쥐어주신다. 베드로가 과거의 실패를 딛고 일어나 오순절의 복음 전도자가 된 것처럼, 우리도 회복되어 주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사도행전의 베드로 행적을 보면, 그는 감옥에 갇히고 매질을 당해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 부활의 주를 만난 확신, 그리고 성령의 능력 안에서 살 때, 어떠한 종교적·정치적 협박도 그를 꺾지 못했다.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의 말씀 전하는 것을 그치라고 하느냐,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라는 그의 선언은 신앙의 자유와 담대함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잘 보여준다. 이전에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이다. 이는 장재형목사가 반복해서 설명하는‘성령의 실재성’이다. 성령은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과 부활의 진리를 받아들일 때, 구체적으로 우리 심령 안에 내주하시어 근본적 변화를 일으키는 분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성령의 능력을 누리고 베드로처럼 담대한 증인이 될 수 있을까? 첫째는 진솔한 회개다. 베드로는 스승을 부인한 후 통곡했다. 자신이 얼마나 주님을 사랑했으나 동시에 얼마나 연약했는지를 인정한 것이다. 참회가 없이는 성령이 주시는 진정한 치유와 새출발이 어렵다. 둘째는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이다. 베드로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물음을 세 번 받았다. 그것은 자기 기만이나 교만을 무너뜨리고, 오직 예수의 사랑과 용서로만 살 수 있음을 깨닫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셋째는 말씀과 기도를 통해 성령 충만을 구하는 것이다.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오순절 사건은 제자들이 ‘전혀 기도에 힘썼다’는 배경 속에서 일어났다. 성령의 임재가 있으므로 제자들은 더는 숨어 지내지 않고, 공공연하게 복음을 외칠 수 있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현대 교회에 적용할 때, 우리도 끊임없이 말씀과 기도 안에서 성령을 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오늘날에도 교회나 성도가 세상의 권력 구조나 사회 분위기에 눌려 진리를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교회가 이익 집단이나 정치 세력의 이해관계에 휘말리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르는 사람, 성령에 붙들린 사람이라면, 어렵고 힘든 가운데서도 베드로처럼 일어나 복음을 변증하고 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특히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부르시는 자리로 다시 나아가는 결단”을 중요시한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타협을 요구하고, 거짓 권력은 위협으로 몰아가지만, 성령께서는 “감히 너희가 내 이름을 어떻게 해서든 담대히 전하라”고 도우신다.

결국 예수님께서 안나스의 집에서 불법 심문을 당하시고, 가야바와 빌라도로 이어지는 잔혹한 재판을 거쳐 십자가에 달리시는 극적인 전개 한가운데, 베드로의 부인은 오히려 죄와 은혜의 대조를 선명하게 그려내는 중요한 사건이 된다. 정치와 종교 권력의 결탁이라는 ‘최대 악의 시나리오’ 앞에서도, 주님의 사랑과 성령의 회복은 결코 좌절되지 않는다는 메시지가 요한복음의 전체 맥락 속에 분명히 자리잡고 있다.

장재형목사는 신앙 공동체 안에서 실패하고 낙심한 이들이 있더라도, 결코 끝이 아님을 잊지 말라고 권면한다. 베드로처럼 주님 앞에 진심으로 회개하고 성령의 은혜를 구한다면, 그 어떤 과거의 실수와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큰일을 감당할 수 있게 된다. 교회 안에 혹 “안나스 같은 세력”이 득세하여 진리를 왜곡하고 거짓으로 사람들을 압박하더라도, 베드로와 같이 예수님을 바라보고 성령의 용기를 구하는 성도는 결코 넘어지지 않는다. 교회의 참된 권위는 사람의 지위와 힘에서 오지 않고, 오직 성령의 역사를 통해 예수님의 가르침을 바로 전하는 그 말씀의 능력에서 나온다. 이는 2천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결코 바뀌지 않는 복음의 진리다.

우리는 요한복음 18장 12~21절을 통해, 안나스라는 부패한 종교 권력자가 어떻게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음모를 진행했는지, 그 배후에 있는 악의 기제를 분명히 볼 수 있다. 율법과 성전, 그리고 종교 재판이라는 거룩해 보이는 틀 안에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그리스도를 죽이는 모순이 드러난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제자들, 그중에서도 베드로는 두려움에 휩싸여 주님을 부인한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그는 다시 회복되고, 복음 전도의 핵심 인물이 된다. 이것이 요한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강력한 아이러니이자 소망의 메시지다. 가장 음습하고 어두운 곳에서 거짓 권력이 횡행할 때, 참된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더욱 선명히 드러난다. 그리고 성령은 인간의 연약함을 덮고도 남을 능력으로 우리를 새 사람으로 빚어내신다.

“장재형목사”는 이 본문을 강해하며, 교회사의 수많은 박해와 왜곡 속에서도 복음이 계속 전파되고, 무너진 자들이 다시 일어나 복음을 증거해온 것을 상기시키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 역사를 배움으로써,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역사하시는 성령을 신뢰하고, 예수님의 진리와 사랑을 붙들어야 한다. 과거 안나스와 같은 교권주의자들이, 혹은 세상의 권력자들이 교회를 제압하려 한 사례는 부지기수였지만, 그럴 때마다 주님께서 숨겨 놓으신 사람들, 회개하고 돌아선 ‘베드로들’을 통해 교회는 다시금 살아났다. 따라서 교회와 성도는 어떠한 악한 환경이나 배신, 혹은 자기 실수에도 희망을 놓지 않아야 한다. 주님은 살아 계시고, 성령은 여전히 임재하신다. 밤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까워지듯, 우리는 요한복음 18장에 담긴 검은 그림자 속에서 오히려 빛의 준비가 한창 진행되고 있음을 봐야 한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의 체포부터 심문, 그리고 베드로의 부인과 이어지는 이 일련의 사건들은, 한편으로는 부패한 종교 권력과 정치 권력이 어떻게 합심해 진리를 파괴하려 드는지를 보여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님의 사랑과 성령의 회복 능력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좌절되지 않는다는 궁극적 소식을 전한다. 공포와 배신, 음모와 죄악이 난무하는 밤이었으나, 그 모든 것을 넘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신 주님의 의와 은혜가 최종 승리를 거두었다. 교회 안에 안나스가 잠입하더라도, 제자들이 때로는 베드로처럼 넘어질지라도, 성령으로 함께하시는 하나님은 결코 교회를 포기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는 대로, 이 본문을 통하여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고 공동체를 점검해야 한다. 혹시 우리의 신앙이 기득권과 세속적 욕망에 휘둘리고 있지 않은지, 혹은 극심한 억압 앞에서 주님을 부인하고 세상을 좇고 있지는 않은지, 혹은 자신도 모르게 안나스의 편에 서서 참된 복음을 외치는 이들을 배척하고 있지는 않은지를 살펴야 한다. 동시에, 혹 나 자신의 연약함과 실패가 크더라도, 베드로처럼 회개하고 성령의 능력 안에서 주님께 나아가면, 주님은 새날을 열어주신다는 약속을 기억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요한복음 18장의 심문 장면이 전해주는 교훈이자,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모든 신앙 공동체가 가슴 깊이 새겨야 할 메시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