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을 헐라 – 장재형목사

1. ‘성전을 헐라’라는 도전과 십자가의 정신

예수께서 공생애 동안 보여 주신 많은 사역 중 하나는 예루살렘 성전 정화 사건입니다. 요한복음 2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올라가셨고, 성전 뜰 안에서 제물(소, 양, 비둘기)과 관련된 장사를 하는 이들을 쫓아내고 상을 뒤엎으셨습니다. 이것은 당시 종교 권력자들이 지닌 악습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상징적 행동이었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제사를 드리기 위해 소나 양, 혹은 비둘기를 준비해야 했고, 이를 위한 돈 바꾸는 장사치들도 성전 뜰에서 영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가난한 자들에게조차 엄청난 고가에 제물을 팔고, 성전 밖에서 구해 온 제물은 흠을 찾아 들어오지 못하게 만들던 방식은 종교 기득권이 하나님의 성전을 돈과 권력으로 오염시키고 있음을 극명하게 드러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당시 대제사장 가문, 특히 안나스 가문의 문제점이 노골적으로 폭로됩니다. 대제사장직을 세습하고, 로마 제국과 결탁하며 스스로 이익을 챙기던 안나스 가문은 ‘성전 장사’를 이용해 백성의 신앙심을 거래 대상으로 삼았고, 그 수익과 권력을 이용해 종교적·정치적 기반을 더욱 공고히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요2:16)고 선언하셨고, 이때 제자들은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시 69:9)라는 구약의 예언을 떠올리며, 메시아가 불의한 종교 시스템을 그대로 두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체험했습니다.

장재형(장다윗) 목사는 이 장면에서 두 가지 핵심을 강조합니다. 첫째, 예수님의 성전 정화는 단순히 ‘성전 안에서의 장사 행위’만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그 배후에 있는 인간의 죄성, 즉 기득권과 돈과 권력에 대한 탐욕이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간을 더럽힐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사건이라는 점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당시 유대인 신앙 체계의 중심이었고, 그 자체가 신성 불가침의 영역처럼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이뤄지던 부정과 거짓, 사람을 수탈하는 제사 시스템은 결코 하나님의 뜻과 어울릴 수 없었고, 예수님은 아버지의 이름이 욕되게 되는 현장을 결코 방치하지 않으셨습니다.

둘째,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라고 하심으로써, 곧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새로운 성전’이 세워질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말씀을 곧바로 이해하지 못했고, “이 성전은 46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요 2:20)라며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신 ‘성전’은 ‘자신의 몸’을 가리킨 것이었습니다. 즉, 더 이상 눈에 보이는 건물로서의 성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구원과 예배의 중심이자, 부활의 몸을 통해 새로워진 ‘영적 성전’의 기초가 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파격적인 메시지, 즉 예수 그리스도가 스스로를 ‘진정한 성전’으로 선포하셨다는 말은 당시 종교 권력층에게 큰 위협이 되었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예루살렘 성전은 모든 신앙생활과 율법 준수의 상징이었고, 우주의 중심이라 여겨졌습니다. 누가 그 성전을 헐어버린다 하거나, 성전보다 더 큰 권위를 가진 존재가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극단적인 신성 모독으로 간주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안나스, 가야바를 비롯한 대제사장 집단은 이 예수의 선언과 행보를 매우 위험하게 느꼈고, 실제로 예수님이 체포되며 십자가의 길을 걷게 된 데에는 이러한 성전 파괴 선언이 주요한 ‘죄목’으로 작용했습니다.

장재형 (장다윗)목사는 이 지점에서, 우리 내면에도 ‘헐어버려야 할 성전’이 있음을 통찰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중심성을 가지고 있고, 그 자기중심성을 자신만의 ‘성전’처럼 여겨 무너지지 않으려 하며, 그 성전 안에서 자신의 이익과 욕심, 고집, 체면을 지키려 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특별히 십자가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도전은 “네 안에 있는 그 거짓된 성전을 헐라”는 말씀일 수밖에 없습니다. 헐어지지 않는 자기중심성, 자신만의 절대 영역이라 우기는 것들, 이것이 곧 죄의 뿌리이며 모든 분쟁과 불화의 시작점이 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8장을 보면, 예수님이 실제로 체포되시고, 대제사장 안나스에게로 끌려가심으로써, 성전 정화 사건 때부터 시작된 종교 권력층과의 충돌이 극단으로 치닫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물으니”(요 18:19)라는 구절은, 그들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추종자들’을 어떻게든 죄로 몰아넣으려는 저의를 엿보게 합니다. 안나스가 먼저 예수님을 신문한 이유는, 예수님이야말로 성전을 헐라 하고(자신을 진정한 성전이라고 선언한 것과 동등하게 여겨진 말), 자신들의 기득권 체계를 위협하는 가장 큰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대제사장 집단에 의해 ‘공개 재판’이 아닌 밤중의 음모적인 절차를 거쳐 고발당하고 결국 십자가에 내어주신 사건은, 거짓 권력과 타락한 종교가 어떻게 참 진리를 배척하는지 여실히 드러냅니다. 그리고 그 저변에는 자신들의 권력 기반인 ‘눈에 보이는 성전’과 그를 둘러싼 모든 세속적 이권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태도가 있었습니다. 복음서 곳곳에서 예수님이 기존 종교 체제와 맞부딪히는 장면을 보면, 모든 갈등의 핵심은 예수님의 메시지와 기득권 종교 지도자들의 탐욕이 충돌한다는 점입니다.

장재형 목사가 강조하듯, 교회라는 이름, 혹은 어느 개인의 신앙의 울타리 안에서도 동일한 문제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곧 교회가 본연의 영적 역할을 상실하고 세속적 욕망이나 권력을 지향한다면, 예루살렘 성전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든 자들과 다를 바 없게 됩니다. 또, 개개인도 교회를 다니면서 마음 깊숙이 여전히 자신의 작은 성전을 지키기 위해 복음에 저항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전을 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신앙인이라면 누구에게나 강력하게 들려야 하며, 내 안에 세워진 모든 이기적 성전을 해체함으로써 비로소 ‘부활의 성전’이 일어설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바로 이 점에서 십자가의 정신이 두드러집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내가 생명을 버리는 것은 다시 그것을 얻기 위함”이라고 하셨고(요 10:17), 자기 몸을 헐어, 사흘 만에 새로운 삶을 일으키겠다는 약속을 실천해 보이셨습니다. 이는 말뿐이 아니라 실제 십자가의 길을 통해 확증되었습니다. 기독교의 핵심 교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인데, 이것이 곧 예수님의 ‘성전 파괴와 재건’이라는 상징적 행동과 깊이 연결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성전을 헐라”는 말씀이 결코 폭력적 파괴나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오래된 것의 죽음과 새로운 것의 탄생’을 가리키는 복음의 핵심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8장에 등장하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 사건도, 율법과 복음이 충돌하고, 또다시 예수님이 거짓 종교 권력 앞에서 위협받는 장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대로라면 돌로 쳐 죽여야 할 이 여인을 예수님은 결국 용서하시고, “너희 중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고 선언하심으로써, 율법보다 크신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의 법을 선포하셨습니다. 이 역시 기존 종교 체계 입장에서는 파격적인 ‘율법 파괴’처럼 비쳤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체포되신 후, 스데반도 같은 맥락에서 잡혀 돌에 맞아 죽었는데, 스데반에게 씌워진 죄목 중 하나가 곧 “이 사람이 성전을 헐겠다고 했고, 또 모세의 율법을 고치려 한다”고 한 것입니다(행 6:13-14).

결국 ‘성전을 헐라’는 예수님의 메시지는 외형적 제도나 율법에 매어 있는 신앙이 아닌, 영적 실체이신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사귐으로 나아가라는 선언이며, 그 중심에는 자기 부정과 헌신, 그리고 죄인을 향한 무한한 용서가 놓여 있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가리켜, “내 안의 이기적 성전을 무너뜨리고, 그 자리에 주님의 십자가 정신을 세움으로써 진정한 교회와 성령의 역사가 시작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복음서 전체, 특히 요한복음이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핵심 사역, 즉‘화목과 구원’을 향한 길이라고 역설합니다.

다시 요한복음 2장으로 돌아가 보면, 예수님은 이미 부활 이후를 예견하시며 “사흘 만에 이 성전을 세우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도 실제 부활 사건을 체험하고 나서야 이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깨달았습니다(요 2:22).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없이는 부활도 없고, 옛 것을 철저히 헐지 않으면 새 것이 일어날 수 없다는 복음적 진리가, 바로 성전 파괴 선언 속에 압축적으로 담긴 셈입니다. 이는 오늘날 교회와 신자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며, 자신만의 ‘우주의 중심’처럼 여기던 것을 과감히 내려놓으라는 부름이기도 합니다.

장재형 목사가 목회 활동에서 강조하는 바는, 기독교 신앙이 결코 안전지대 안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늘 우리를 도전하고 뒤흔들며 ‘거짓된 종교심’과 싸우도록 이끈다는 것입니다. “성전을 헐라”는 메시지는 그저 교리적 문구가 아니라, 각자가 지닌 고집스런 성벽, 정죄적 시선, 자기영광을 구하는 탐욕 등 모든 것을 내려놓으라는 초청입니다. 이 초청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예수님 시대의 종교 권력자들과 같이 불순한 것에 안주한 채 참된 복음을 배척할 수도 있다는 경고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이 부르심에 순복하여 자신을 낮추고 자기를 부정할 때, 비로소 십자가의 영광과 부활의 영광을 함께 체험할 수 있다고 장재형목사는 거듭 가르칩니다.

종교 권력과의 충돌이 극에 달했던 십자가 사건을 면밀히 살펴보면, 예수님의 오심은 낡은 율법주의와 타락한 구조를 깨뜨리는 혁명적 행위였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성전을 헐라”는 구절은 그 혁명의 중심 사상, 곧 십자가의 희생정신을 통찰하게 하는 열쇠로 작용합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대목에서, 신앙인이 진정 성숙해지려면 바로 이 ‘성전 파괴와 재건’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율법의 문자적 준수나 교회 안에서의 의식, 제도적 틀을 지키는 것으로는 한계가 있으며, 결국 자신의 옛 자아를 완전히 깨뜨리고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참된 ‘영적 성전’이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이러한 십자가의 정신이 없다면 교회는 결국 구약 시대 제사장들과 동일하게 권력과 돈의 매개체로 전락하기 쉽습니다. 성전 정화가 필요했던 예루살렘처럼, 현대 교회도 안팎으로 ‘정화’가 끊임없이 요구됩니다. 이것이 “성전을 헐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가 지금도 되새겨야 하는 이유입니다. 무너뜨릴 것들을 향해 눈을 감고 덮어두는 것은 결코 복음이 요청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와 개인이 신앙고백 속에서 스스로를 성찰하고, 타락하거나 변질된 요소들을 발견하면 아낌없이 내던지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성령이 임재하시는 새로운 교회의 모습, 곧 ‘주님의 몸된 성전’이 가시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결론적으로, 장재형 목사는 “성전을 헐라”라는 본문을 해설하며, 이것이 곧 ‘내가 죽고 주님이 사는 길’이자 ‘오래된 율법적 틀을 넘어서는 복음적 자유’로 가는 시작점임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이 메시지를 온전히 받아들인 사람은 자발적으로 자신을 비우고, 이웃과 교회를 섬기게 됩니다. 십자가 정신이 구체적으로 실천되는 곳에는 어떤 담도, 분쟁도, 차별도 설 자리가 없습니다. 그 거룩한 길이 바로 예수님이 여신 ‘성전 파괴와 재건’의 길이요, 우리 모두가 거쳐야 할 십자가의 길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소주제 2: 화평의 길과 성령의 시대, 그리고 참된 교회의 본질

‘성전을 헐라’는 선언이 단순히 과거 유대교 체제에 대한 물리적 파괴가 아니라,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영적 선포였다는 점은 사도행전의 전개와도 맞물려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후, 제자들은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해 복음이 얼마나 확장성과 보편성을 가지는지 체험하게 됩니다. 특히 사도행전 2장을 보면, 120명의 제자가 모인 곳에 성령이 임함으로써 모두가 하나님을 찬양하며 각 나라 말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은혜로운 사건을 통해 과거처럼 특정 계층이나 제도권 지도자들만이 하나님의 임재를 맛보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성령을 받는 시대가 열렸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같은 성령의 역사에서 ‘성전을 허무신 예수님의 의도’를 더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고 봅니다. 과거에는 예루살렘 성전이 신앙생활의 절대적 중심이었으나, 이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직접 우리의 ‘거룩한 예배의 대상’이 되시고, 그를 통해 임하는 성령이 새 시대의 예배 처소가 된 것입니다. 더 나아가, 사도들은 “너희가 성전인 것”이라고 선언함으로써(고전 3:16, 6:19 등), 이제 공동체 안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며, 그리스도인 개개인이 ‘살아 있는 성전’이자 동시에 ‘연합된 몸’임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성전’이 세워지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옛 성전’이 허물어져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당시, 성전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다는 보도(마 27:51)는 상징적으로, 더 이상 구약의 제도적 성전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매개가 아님을 보여줍니다. 이제 누구나 그리스도를 통해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더 이상 대제사장이나 특정 의식에 구속되지 않는 자유가 선포되었습니다. 이것은 구원 역사의 획기적인 변화였고, 동시에 옛 종교 권력 체제에겐 치명적인 타격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성전을 헐라”는 예수님의 발언이 단지 건물을 없애자거나, 과격한 반체제 운동을 일으키자는 의미가 아니라, ‘성령의 시대’가 도래하는 전환점을 미리 알리는 선언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셨다”(엡 2:14)라고 요약합니다. 이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이 사라지고,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하나가 된다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 뜰에서도 이방인들이 들어올 수 있는 지역을 제한적으로만 허용했는데, 그 벽을 넘으면 사형에 처할 수도 있을 정도로 엄격한 분리 정책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는 그러한 차별의 담이 무너지고, ‘새 사람’(엡2:15)으로 지음을 받아 모두가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습니다(엡 2:19).

장재형 목사는 이 에베소서의 가르침을 교회 공동체에 직접 적용하며, “참된 교회는 차별이 존재할 수 없는 곳”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단순히 조직 차원에서 평등을 표방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로 인해 ‘나의 옛 자아가 완전히 무너지고, 오직 예수 안에 새롭게 태어났음’을 실제 삶으로 증명하는 공동체라는 뜻입니다. 교회 안에 여전히 차별이나 담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아직 헐려야 할 ‘옛 성전’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성전을 헐라”는 말씀은 개인과 공동체가 자신 안에 존재하는 배타적 경계, 미움, 불의한 특권 등을 발견하고, 십자가 앞에서 철저히 회개하며 그 담을 허무는 삶으로 초대합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복음은 세리, 창녀, 이방인, 여인, 소외된 자들을 품어 주셨고, 그들을 오히려 하늘나라에서 높여 세우셨다는 점을 곳곳에서 보여 줍니다(막 2:15-17 등). 이것은 옛 율법적 사고에 물들어 있던 유대인에게 혁명적인 메시지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소와 양, 비둘기 파는 장사치들은 ‘유월절 제물 준비’라는 제도적 필요를 악용해 가난한 자들까지 착취했지만, 예수님은 세리를 비롯해 죄인 취급받는 이들을 식탁 교제에 초대하셨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이러한 예수님의 선교 방식과 정신을 이어받아, 모든 사람을 예배 공동체로 불러 모으는 ‘열린 성전’이 되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교회는 역사를 거쳐 오며 때로 성직 계급과 권력이 결탁해서, 초대교회 정신과 멀어진 모습도 보였습니다. 종교개혁 시기에도 마르틴 루터나 츠빙글리, 칼뱅 등이 소위 ‘타락한 성전을 허물고 복음의 순수성을 회복하자’고 외치며 새로운 흐름을 만든 것은, 예수님의 “성전을 헐라”는 말씀을 시대적으로 재해석한 사건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장재형 목사 역시 현대 교회가 위기에 처했을 때, 이 말씀을 다시금 소환해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고, 성령의 인도하심 아래서 옛 구조를 허무는 개혁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특히 교회가 세상의 ‘화평’과 ‘화해’를 이루는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먼저 내부적으로 하나 됨을 이뤄야 하고, 그리스도의 핏값으로 산 공동체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육체를 ‘성전’으로 칭하시며 그 성전을 헐고 사흘 만에 일으키시겠다고 하셨는데, 이는 곧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완성되는 구속 사건을 예표합니다. 이 구속 사건의 결과로 나타난 가장 특징적인 현상 중 하나가 바로 “성령 강림으로 모든 이들이 하나님 앞에 동등하게 서게 됐다”는 사실입니다. 남종이나 여종이나, 늙은이나 젊은이나,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행 2:17-18), 차별이 철폐된 성령의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교회가 이러한 성령의 시대 정신을 이어받아 ‘성전 파괴와 재건’의 메시지를 자기 자신에게도 적용하지 않는다면, 곧 스스로를 돌아보고 회개하지 않는다면, 과거 안나스와 가야바의 길을 뒤따를 위험이 있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교회가 십자가의 복음을 제일선에 두지 않고, 교권 다툼이나 재정 문제로 인해 서로를 헐뜯는다면, 이미 거짓된 성전에 잡혀 있는 것”이라 직설적으로 말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성령의 능력이 나타날 수 없고,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비난만 받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성전을 헐라”는 말씀은 단지 2,000년 전 유대교 체제에 대한 선언이 아니라, 지금 우리 교회가 현실 속에서 부딪히는 모든 불의·교만·분열을 내려놓으라는 시급한 명령이기도 합니다.

한편, 장재형 목사는 개인의 내면에 대해서도 같은 논리를 적용합니다. ‘성전을 헐라’는 것은 공동체적 차원의 교회 개혁에만 국한되지 않고, 각 신자가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욥기에 “하나님을 대면한 자는 스스로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한다”(욥 42:6)는 대목이 나오듯,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성과 한계를 온전히 인정해야만 주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간은 ‘자기만의 성전’을 지키려 하고, 그 안에서 안정감을 찾고자 하는 본성을 지닙니다. 장재형목사는 그 성전을 허무는 것이 곧 ‘온전한 회개와 성령의 내주’를 위한 필수 과정이라 하며, 이를 십자가의 삶, 곧 ‘자기 부정과 자발적 희생’이라는 키워드로 연결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갈 2:20)는 바울의 고백은 ‘성전을 허무는 것’을 아주 극단적으로 표현한 신앙 고백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바리새인으로서 율법의 의를 따라 흠 없이 살던 자였지만(빌 3:4-6),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는 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예수와 함께 죽어 새로운 피조물로 살겠다고 선언합니다(빌 3:7-8). 이것이 곧 예수님이 주신 “성전을 헐라”는 복음의 실천이며, 부활 신앙의 실제적 적용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참된 교회란 이러한 바울의 자세를 본받아, 과거에 자랑하거나 의존하던 것을 모두 주님 앞에 내려놓고, 오직 주님의 생명으로 일어서는 곳입니다.

현대 사회는 분열과 갈등, 배제와 폭력이 만연하지만, 동시에 ‘함께 잘 사는’ 길을 고민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이 이 땅에 제시하는 해답은 “원수까지 사랑하고, 서로 발을 씻어 주며, 필요하면 내 것을 내려놓아서 이웃을 살려라”라는 급진적 사랑과 희생입니다. 그 근본은 십자가 정신이며, “성전을 헐라”는 비움과 자기를 내려놓는 태도가 필수적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런 점에서 기독교 신앙의 독특성을 강조합니다. 세상의 이념, 철학도 나름의 이상을 설파하지만, ‘성전을 스스로 허무시는 하나님’이라는 복음만큼 급진적인 메시지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고, 그분이 죽으심으로 새 생명이 열렸다는 사건 자체가 믿을 수 없을 만큼 파격적이기에, 이것을 진심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삶의 방식이 근본적으로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그는 가르칩니다.

교회 안의 예배도 마찬가지로, ‘성전을 허무는 정신’이 담기지 않으면 결국 형식적이고 추상적 의식에 그치고 맙니다. 예배는 주님 앞에 자신을 내려놓고, 서로가 서로를 섬기며, 죄인까지도 환대하는 자리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성령은 공동체 안에 역사하시고, 교회의 지체들은 “너희 몸이 성령이 거하시는 전인 줄 알지 못하느냐”(고전 6:19)는 말씀을 체험하게 됩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영적 원리를 한국 교회, 더 나아가 전 세계 기독교 공동체가 다시 한번 붙들어야 한다고 촉구합니다. 왜냐하면 시대가 빠르게 변하더라도, 복음이 지닌 “낮아짐과 헐어짐의 능력”은 결코 바뀌지 않고, 오히려 점점 더 절실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문화권에서 복음이 전파될 때 나타나는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전을 허무는 행위, 즉 자기가 세워 놓은 최고의 권위나 전통을 포기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순절의 성령 강림 이후로, 복음은 언어·문화·인종·신분의 벽을 넘어 전파되었습니다. 세계 각지에서 신앙을 갖게 된 사람들은 각자의 ‘작은 성전’을 무너뜨리고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는 길을 경험해 왔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더 이상 ‘누가 유대인이고, 누가 이방인인가’를 묻지 않으며, 함께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는 표징을 간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의 “성전을 헐라”라는 선언이 결국 인류 보편적 구원의 길로 이어지는 핵심 이유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목회 현장에서, 그리고 다양한 선교적 활동을 통해 “교회가 곧 예수님의 성전”임을 가르치면서, 그 교회가 세속적 권력이나 물질적 유혹에 빠지면 안 된다는 점을 거듭 강조해 왔습니다. 예수님 당대의 예루살렘 성전이 성전세와 희생 제물을 매개로 백성을 착취하던 것처럼, 현대 교회도 교회 재정을 마치 사적 이익처럼 운용하거나, 교권을 이용해 신도들을 지배하려는 모습을 보일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그리고 그런 상황이 반복될수록 “성전을 헐라”는 예수님의 음성은 더욱 절실히 들려야 합니다. 그 음성에 순종하여 교회가 회개와 자정을 실천할 때, 비로소 세상은 교회를 향한 신뢰를 회복하고, 복음의 참된 빛이 드러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성전을 헐라”는 말씀을 단지 과거사로만 치부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이 주신 이 도전적 선언은 2,000년 교회사의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개혁과 부흥을 촉발해 온 근본 원리였습니다. 아울러 개인적으로도, 신앙이 깊어질수록 우리는 더 철저히 자신을 내려놓아야만 하며, ‘내가 지키고 싶은 욕망의 성전’을 주님의 손에 맡겨 허물어뜨리도록 내어드려야 합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참된 자유와 기쁨, 그리고 공동체의 연합이 열매 맺는 것을 볼 수 있게 됩니다.

결국, 요한복음 18장에서 예수님이 체포되시고, 그 종교재판 과정에서 “네가 어떤 죄를 지었는지 밝히라”는 식으로 압박받았던 상황은, 예수님의 메시지가 얼마나 종교 권력자들에게 위협적이었는지 단적으로 보여 주는 예입니다. 그 핵심은 단순한 교리 논쟁이 아니었습니다. “성전을 헐라”는 말씀은 곧 대제사장과 같은 기득권에게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자신들의 기반을 뒤흔드는 혁신적 가르침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굴하지 않았고, 십자가에서 실제로 몸을 찢기심으로써 그 말씀을 완수하셨습니다. 그리고 사흘 뒤에 부활하심으로,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새 성전의 시대’를 열어젖히셨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같은 복음의 결론부가 “우리 역시 성전을 허물어야만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을 누릴 수 있다”는 교훈을 절대 잊지 말라는 초대라고 해석합니다. 자기를 부정하고, 옛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을 때만이, 부활의 기쁨이 실제로 내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 내에서의 분란, 가정과 사회 안에서의 불화도 사실 근본을 들여다보면, “자신의 성전”을 포기하지 못하기에 발생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화평의 길”(엡 2:14)로 초대하시며, 당신의 몸으로 모든 담을 허물어 주셨습니다. “성전을 헐라”는 도전 뒤에는 곧 “내가 다시 세우리라”는 약속이 따라오고, 그 약속은 결코 우리를 파멸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풍성한 생명으로 이끄는 하나님의 구원 경륜입니다.

예수님께 돌로 치려 했던 이들이, 또 예루살렘 성전을 절대적이라 믿었던 이들이 결국 그 찬란한 부활의 의미를 처음에는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성령 강림 이후, 제자들은 담대히 이 소식을 전파했고, 스데반조차 같은 이유로 죽임을 당했으나, 그 피가 오히려 복음 전파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성전을 헐라”는 복음적 도전은 때로 우리를 박해받게 만들 수 있고, 세상이나 기득권 종교층으로부터 공격을 당할 수도 있지만, 그 길 끝에는 승리의 부활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교회가 이 사실을 잊지 않는다면, 어떠한 도전과 비난에도 불구하고 참 교회의 본질을 지켜 갈 수 있습니다.

정리하자면, ‘성전을 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사랑과 화평, 구원과 희생이 만나는 십자가 신앙의 정수입니다. 그분은 “내가 버리면, 내가 헐리면, 새 것이 일어난다”고 하셨고, 그것을 스스로 실천하셨습니다. 이제 그 길을 따르는 교회와 신자라면, 마땅히 “주님의 집을 위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시 69:9)는 고백을 공유해야 합니다. 다만 그 ‘주의 집’은 결코 외적 건물이나 제도만을 의미하지 않으며, “너희가 곧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영적 실체로 나타납니다. 이 내면의 성전은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 그리고 성령의 임재로만 세워지며, 이를 통해 차별과 담이 허물어진 공동체가 탄생할 수 있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런 점을 “복음의 혁명성”이라 부릅니다. 옛 틀과 죄성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복음의 새로움을 맛보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반드시 헐고 다시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죄인들에게 베푸신 ‘용서의 도식’이자, 스스로 낮아지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초대하시는 “화평의 길”입니다. 궁극적으로, 이 길이야말로 신앙인 개인과 공동체가 진정한 교회됨을 완성해 가는 과정이자, 성령이 활짝 열어 놓으신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는 좁은 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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