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형목사 – 브니엘의 아침

1. 야곱의 시련과 환도뼈의 의미

창세기 32장 22절에서 32절에 나타난 야곱의 이야기는 성도들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왜냐하면 이 본문에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기 위해 겪어야 하는 치열한 씨름과, 그 과정을 통해 비로소 이해하게 되는 ‘시련(trial)과 시험(test)’의 의미가 오롯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 구절을 여러 차례 설교하면서, 야곱의 여정이 단순한 옛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우리 각자가 어떻게 주 앞에 서야 하는지”를 비춰주는 거울임을 강조해 왔다. 야곱이 환도뼈가 위골될 정도로 처절하게 씨름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 결과로 형 에서와의 화해까지 이끌어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결코 쉽지 않은 신앙의 길을 가르쳐준다. 동시에 그것은 우리 각자가 인생에서 맞닥뜨리는 여러 유혹(temptation)과 시험(test), 그리고 시련(trial)을 어떠한 태도로 감당해야 하는지에 대한 묵직한 방향제시이기도 하다.

야곱은 형 에서의 장자권을 사들인 일로 인해 집안의 갈등을 극심하게 만들었다. 어머니 리브가의 강력한 뒷받침으로 복을 빼앗듯이 얻었고, 그로 인해 에서의 분노를 피해서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피했다. 많은 시간이 지난 뒤, 그는 가족과 양떼 등 거대한 재산을 거느린 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려 한다. 그러나 형의 분노가 여전히 풀리지 않았을 것이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오랜 시간 타향살이를 하면서 엄청난 재물과 자녀들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음 한편에 여전히 ‘미움’과 ‘원한’이라는 그림자를 끌어안고 있었다. 야곱이 이날 밤 얍복강 나루턱에서 홀로 남아 씨름하게 된 이유 중에는, 단순히 물리적인 여정의 피곤이나 에서를 만났을 때의 두려움만 있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형에게 진정으로 ‘내 모든 것을 돌려드리고 싶다’는 마음, 그리고 과거의 죄책감을 씻고 싶다는 절박함에서 비롯된 영적 씨름이었다.

장재형(장다윗) 목사는 이 장면을 두고 “성도라면 반드시 거쳐야 할 ‘브니엘의 체험’이 있다”고 설파한다.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원할 때, 혹은 형제와 화해하기를 원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내면 깊은 곳에 숨어 있던 불순물까지 꺼내어 보이게 하시고, 그것을 깨끗이 씻겨내기 위한 마지막 관문과도 같은 ‘씨름’을 허락하신다는 것이다. 바로 이 장면에서 야곱은 하나님의 사자(또는 어떤 사람으로 묘사된 신적 존재)와 날이 새도록 씨름한다. 그 시련의 가장 극적인 장면은 25절에서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의 환도뼈를 치는 순간이다.

당시 고대 사회에서 환도뼈는 생식과 후손, 생명의 잇댐을 상징하는 뼈라고 볼 수 있었다. 또 장수가 칼(도, 刀)을 차던 부위가 바로 이 허벅지 관절이기도 했다. 힘과 생명, 미래와 이어지는 이 ‘환도뼈(허벅지 관절)’가 위골된다는 것은 단순히 물리적인 부상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이는 사람이 마지막까지 붙들고 있던 자기 확신, 육체적·정신적 자존심, 생명력과 같은 중요한 근원이 흔들린다는 뜻이다. 인간의 가장 강한 부분이 ‘부러지고 깨져야’ 비로소 하나님의 얼굴(브니엘, ‘하나님의 얼굴’을 뜻함)을 대면할 수 있다는 이 역설은 우리 신앙의 근본을 건드린다. 우리는 모두 어떤 형태로든 자신의 환도뼈를 붙잡고 살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치심으로써 “너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이 전부가 아니다”라고 깨닫게 하신다.

장재형 목사는 수차례 설교에서 “야곱이 환도뼈를 다쳐 절뚝거리게 되었다는 것은, 그의 지난날이 이제 새롭게 바뀐다는 상징”이라고 해석해 왔다. 스스로 노력해서는 절대 이룰 수 없었던 ‘화해의 길’이 열리기 위해서는, 야곱이 끝까지 싸우되 결국은 자신의 힘이 아님을 인정해야 했다. 이 부분에서 목사님은 “우리가 나약해질 때, 우리가 부서질 때, 하나님의 일이 시작된다”고 자주 강조하신다. 인간적으로는 가장 가슴 아프고 자존심이 상하는 순간일 수 있지만, 그것은 동시에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새 사람이 되는 ‘환골탈태(換骨奪胎)’의 순간이라는 것이다.

“환골탈태”라는 한자는 뼈가 바뀌고(換骨), 태가 바뀐다는(奪胎) 의미를 갖는데, 사실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더 나은 방향으로 완전히 변화됨’을 가리킨다. 야곱의 경우에는 환도뼈가 위골되어 부서지는 아픔을 통해 새로운 이름 ‘이스라엘’을 얻는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역사는 그가 이끄는 새로운 정신, 즉 ‘원수를 사랑하고, 미움을 화해로 돌리고, 축복을 나눠주는 통로가 되는’ 정신 위에 세워진다. 장재형 목사는 이 점을 “새로운 정신이 새로운 백성을 낳는다”고 요약한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야곱은 아주 중요한 관문을 통과해야 했던 셈이다.

결국 새벽녘이 되자 천사는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고 요청한다(창 32:26). 하지만 야곱은 자기를 축복하지 않으면 놓아주지 않겠다고 말한다. 자신의 환도뼈가 어긋났음에도, 절뚝이는 몸으로 매달려 있는 그의 모습은 참으로 기이한 장면이다. 천사가 야곱의 이름을 묻고,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28절)라는 축복을 내린다. 이 과정을 보면서 우리는 왜 하나님이 이렇게 극적인 순간에 야곱을 새로운 존재로 만드시는지 깨닫게 된다. 그는 미움과 복수심에 사로잡혀 있던 에서에게 ‘모든 재물을 돌려주어 화해하려는 자’가 되었고, 이는 궁극적으로 성경이 말하는 ‘원수도 사랑하라’는 정신의 시초가 된다. 이 정신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고스란히 이어지며, 수많은 성도들의 길잡이가 되었다.

장재형 목사는 이 장면에서 특히 “종교적 열심”만으로는 진정한 브니엘의 체험을 할 수 없음을 지적한다. 종교적 의무감이나 관습으로는 우리의 ‘환도뼈’가 깨지는 자리에 설 수 없다. 어떤 상황에서는 우리의 자존심, 또는 ‘내가 이만큼 해왔다’는 종교적 공로가 ‘환도뼈’가 되어 하나님의 역사를 가로막는다. 그러나 진정으로 우리 안에 “내 힘으로는 안 됩니다. 주님이 나를 붙잡아주셔야 합니다. 형과 화해하고 싶습니다”라는 간절함이 생길 때, 비로소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부여하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한 자’로 세우신다.

이 본문의 흐름을 묵상할 때, 음악과 그림의 도움을 받으면 더욱 깊이 들어갈 수 있다. 예를 들어, 이 장면을 상상하며 감상하기에 좋은 음악으로는 잔잔하면서도 점진적으로 고조되는 클래식 현악 곡을 들 수 있다.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1번 프렐류드(Prelude)는 처음에는 고요하게 시작하지만 점차 웅장함을 드러내며, 야곱의 내면 투쟁과 절박한 열망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기에 좋다. 야곱이 스스로 품고 있던 죄책감, 형에게 돌아가 화해하고픈 마음, 그리고 하나님께 축복받기까지 포기하지 않는 치열함이 음악의 흐름과 맞물려 큰 울림을 준다. 그림으로는 렘브란트(Rembrandt)의 “Jacob Wrestling with the Angel”(실제로 존재하는 명화 중 하나) 장면을 참고해볼 수 있다. 어두운 배경 속에서 야곱이 신적 존재와 씨름하는 모습이, 절뚝이고 있는 그의 몸짓과 동시에 기도를 포기하지 않는 두 손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 명화는 빛과 어둠의 대비를 통해, 인간의 나약함과 하나님의 절대성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하나님과 씨름하되 결국은 자기 자신이 깨져서 새 사람이 되어 나오는 자리”가 존재한다. 그것은 결코 쉽거나 가벼운 과정이 아니다. 그러나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야곱의 체험이야말로 성도가 맞이해야 할 진정한 ‘브니엘의 아침’임을 계속해서 강조한다. 우리 안에 미움, 두려움, 아집과 교만이 무너지고, 대신 “불완전한 나를 인정하나 하나님을 끝까지 붙드는 의지”가 자리 잡을 때, 하나님께서는 환도뼈를 다쳐 절뚝이는 우리의 걸음을 이스라엘의 길로 바꾸신다.

2. 야곱의 화해와 시련의 유익 

야곱이 씨름 끝에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받게 되자, 그의 인생은 극적으로 달라진다. 그동안 쌓아온 재물도 많고, 가족도 많았지만, 무엇보다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 가장 큰 변화를 일으킨 것은 ‘화해의 정신’이었다. 에서의 미움을 미움으로 갚지 않고, 오히려 다가가서 손을 내민다. 자신이 얻은 모든 재물과 축복을 ‘형의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 예물로 보내고, 형 에서를 향해“내가 형님의 얼굴을 배운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다(창 33:10)”고 고백한다. 여기서 야곱이 보여주는 태도는, 세상의 일반적인 복수논리나 자기방어기제를 뛰어넘는, 한 단계 고양된 영적인 삶을 보여준다.

장재형 목사는 “야곱이 ‘이것은 내 것이 아니라, 원래 형이 받을 복이었다’고 생각하면서 자기 몫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모습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과 연결된 복음의 정신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고, 오른뺨을 치는 자에게 왼뺨까지 내어주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신약시대의 완성된 복음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뿌리는 야곱의 화해 정신에도 깃들어 있다는 것이다.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어, 새 길을 열고 새 백성의 뿌리가 되었듯이, 우리도 누군가와의 관계에서 화해를 실천할 때, 바로 그 자리가 오늘날의 ‘브니엘’이 될 수 있다.

이러한 화해는 결코 힘이 남아도는 상태에서 “그래, 내가 여유가 있으니 베풀지” 하는 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야곱은 환도뼈가 위골되어 절뚝거리며 형에게 나아간다. 자신의 가장 강한 부분이 깨지고 난 뒤에야 그는 ‘내 힘’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형을 만날 용기를 낸다. 그것이 바로 장재형 목사가 여러 차례 언급하는 “시험(test)과 시련(trial)을 통해 성도가 얻게 되는 유익”이다. 우리가 약해지면, 그 약함 안에서 하나님께 매달리게 되고, 그 결과로 더욱 강한 영적 능력을 경험하게 된다.

신약성경 야고보서 1장 2-3절에는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trials)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기록되어 있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가리켜, “시련이 닥쳤을 때, 우리는 두려워하거나 낙심하기보다는 ‘이것을 통해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변화시키실까?’라고 기대해야 한다”는 메시지로 풀어낸다. 실제로 우리 교회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면, 경제적 어려움이나 사회적인 핍박, 주변의 오해와 비난 등 여러 형태의 시련들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공동체가 낙심하고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도의 자리를 더욱 지키고 말씀을 사모했기에 새로운 돌파구를 찾았다는 것이 장재형 목사의 간증이자, 많은 성도들이 직접 체험한 사실이다.

야곱과 에서의 극적인 화해 장면은 창세기 33장에서 절정을 이룬다. 에서는 뛰어와서 야곱을 끌어안고 함께 운다. 한때 형제를 죽이겠다고 벼르던 에서의 마음이 완전히 녹아내린 것이다. 어떤 심리적·인간적인 분석을 해도 이 화해가 가능해진 것은 ‘야곱의 간절한 의지와 하나님의 역사’ 외에는 설명하기 어렵다. 야곱은 20년간 쌓아온 재산을 형에게 기꺼이 나누어주며, “이는 하나님이 내게 주신 복인데, 형님이 받아주셔야 내 마음이 평안합니다”라고 고백한다. 형의 미움이 ‘받지 못한 복’에 대한 서운함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았기에, 야곱은 그 원인을 해소해줌으로써 상처를 치유하려 한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 장면을 두고 “야곱은 복을 받고도 불안하고, 에서는 복을 빼앗겼다고 여겨 원망하던 그 근본 갈등이 마침내 화해로 종결되는 드라마”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이 화해 드라마는 ‘야곱이 에서에게 예물을 보냈다’는 외적인 사건만으로 완성된 것이 아니다. 이미 앞서 브니엘에서 야곱이 새로운 이름을 받을 만큼 변화된 내면, 그리고 환도뼈를 다쳐 절뚝이면서도 끝까지 형에게 다가가려는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즉 시련으로써 ‘내 안의 교만과 두려움’이 깨어지고, 내가 붙들던 마지막 힘마저 꺾인 뒤에야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넘치는 통로가 된 것이다.

현대사회에서도 비슷한 갈등 상황은 많다. 가족 간의 갈등, 교회 내의 분쟁, 이웃과의 크고 작은 다툼, 국가 간의 전쟁 등. 사람들은 대개 자기가 받은 상처, 빼앗긴 것, 혹은 억울한 마음을 부여잡고 쉽게 화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야곱이 환도뼈가 부서진 상태에서도 형 에서를 찾아갔듯이, 우리에게도 ‘자신의 것이라 여겨온 마지막 자존심’을 내려놓아야 하는 씨름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이 과정을 통해 진정한 화해가 가능해지고, 그 자리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직접 주시는 ‘새 이름’을 받게 된다.

장재형 목사는 말한다. “우리 교회 공동체가 한국에서 시작되었고, 또 여러 나라에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하려면, 반드시 야곱의 시련을 통과한 뒤에 에서와도 화해할 수 있는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 한국 교회가 경제적인 성장과 사회적 영향력을 얻으면서, 때로는 교만해지기도 했고 세상의 잣대를 따르며 서로를 재단하기도 했다. 그렇기에 많은 갈등이 생기고, 서로 미워하거나 질투하는 일이 벌어진다. 하지만 결국 우리는 이 야곱-에서의 드라마를 통해, 하나님 백성이 걸어가야 할 진정한 길을 배운다. 그 길은 “아낌없이 주고, 끝까지 화해를 추구하고, 미움을 사랑으로 바꾸며, 내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는 길이다.

이 화해 장면을 깊이 묵상할 때, 또 다른 예술적 표현으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예컨대 차이콥스키(Tchaikovsky)의 “백조의 호수” 중 일부 서정적인 선율을 들으면, 결코 어울릴 것 같지 않았던 두 존재가 서로에게 다가가 손을 맞잡는 듯한 분위기를 떠올릴 수 있다. 물론 “백조의 호수”는 발레 음악으로 유명하지만, 그중 느리고 애절한 현악 파트의 선율은 “적대감이 녹아내리고, 마음의 문이 열리는” 화해의 순간을 묘사하기에 적절하다고 볼 수 있다. 야곱과 에서가 서로 부둥켜안고 우는 모습을 상상할 때, 배경으로 잔잔히 깔리는 이 서정적인 현악 선율은 마음속에 깊은 평안과 동시에 애틋함을 불러일으킨다.

그림으로는, 19세기 말~20세기 초에 활동한 구스타프 도레(Gustave Doré)의 삽화들 중 야곱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을 볼 수 있다. 비록 도레의 화풍은 약간 극적인 흑백의 판화 형식이지만, 형 에서를 만나기 위해 행렬을 지어 가는 야곱 일행의 모습과, 마침내 에서 앞에 무릎 꿇듯이 절하는 야곱의 장면에서, 야곱의 신체적 절뚝거림과 동시에 그의 내부에 깃든 애절함이 생생하게 전해진다. “내가 죽더라도 형과 화해해야 한다”는 각오가 묻어나는 듯한 그 표정은, 성도들에게 “화해를 위해 내가 내려놓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져준다.

야곱에게 주어진 시련(trial)은 그의 믿음을 테스트(test)하고, 동시에 과거의 잘못된 선택이나 유혹(temptation)으로부터 그를 완전히 돌이켜 새 사람으로 서게 한 하나님의 도구였다. 야곱이 환도뼈가 어긋나도록 씨름을 하지 않았다면, 그는 ‘화해의 사람’으로 거듭나지도 못했을 것이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지도 못했을 것이다. 우리 역시 삶 가운데 다양한 형태의 어려움을 맞닥뜨릴 때, 그것을 오직 부정적으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이 과정을 통해 하나님이 내게 새 이름을 주시려는가?”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를 자문해야 한다.

장재형 목사는 종종 이렇게 묻는다. “당신이 바라는 것은 정말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고, 사람들과 화해하며 살 수 있는 새 이름입니까, 아니면 여전히 ‘내 복, 내 권리, 내 자존심’을 지키는 것입니까?” 이 질문은 성도들에게 상당히 도전적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종종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그 목적이 “더 큰 복을 받기 위함” 혹은 “더 많은 재물을 얻게 됨”에 머무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야곱의 이야기에서 보듯, 진짜 복은 ‘화해의 길’을 열어가고, 미움을 사랑으로 바꾸며, 결국 자기 자신까지도 완전히 깨뜨려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데서 나온다.

오늘날 우리가 속한 교회와 공동체들도 끊임없이 이런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특히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지고, 사회적인 영향력을 얻다 보면, 초창기에 가졌던 간절함이나 절실함이 약해져서 자칫 교만에 빠질 수 있다. 하지만 야곱이 에서와 화해한 뒤에도 평생 환도뼈를 절뚝였다는 사실은, 우리가 평생의 기억으로 간직해야 할 교훈을 준다. 다시 말해, “내가 과거에 이런 시련을 통해 낮아지고 깨어졌었지”라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때의 절박함과 감사, 그리고 하나님을 붙잡았던 믿음을 날마다 되새기지 않으면, 우리는 또다시 자기 확신과 교만의 늪에 빠질 위험이 크다.

장재형 목사는 말씀을 정리할 때 자주 “역사의 교훈을 전승하라”고 권면한다. 야곱의 이야기가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읽히는 것은, 그 후손들이 이 스토리를 대대손손 전해주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살아가며 경험하는 시련과 시험, 그리고 그 가운데서 맛본 하나님의 은혜와 기적은 반드시 기록되고 전해져야 한다. 우리 자녀들이나 다음 세대가 그 기록을 읽으며, 그 이야기들을 통해 삶을 배우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야곱처럼 “하나님과 사람으로 겨루어 이기는” 자가 되는 것만이 아니라, 그 이야기를 통해 후세가 다시금 하나님을 발견하도록 돕는 것이다. 하나님의 복을 받아 부요해졌다면, 이제는 낮아짐을 자랑해야 하고, 가난함 속에 있다면 주 안에서 높아진 것을 기뻐해야 한다(약 1:9-10). 교회에 형제가 많고 재정이 풍족해졌다면, 그 풍족함을 어떻게 이웃과 나누고 세상을 섬길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가난함에 허덕이고 있다면, “이 시련을 통해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더 큰 인내와 영적 능력을 바라보자”는 기쁨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야곱이 고향 땅에 돌아가자마자 에서를 찾아가 화해를 요청한 것처럼, 우리도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한다.

창세기 32장 22-32절에 담긴 야곱의 밤샘 씨름 장면은 신앙의 본질을 꿰뚫는 위대한 통찰을 준다. ‘나의 힘’이라는 환도뼈가 깨져서 절뚝이게 될 때, 오히려 하나님의 역사는 완전해진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두고 “야곱의 환도뼈가 부러짐으로써 비로소 브니엘의 아침이 찾아왔다”고 표현한다. 실제로 브니엘을 지난 야곱은 환하게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며, 더 이상 두려움의 사람이 아니라 희망과 화해의 사람으로 변모한다. 이 영적 원리를 ‘시험과 시련’의 도정에서 체득한 성도들은, 세상에 나가서도 결코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누가 내게 손해를 입힌다 해도, 나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감싸고 화해를 시도하리라’는 각오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태도는 반드시 세상에 감동을 주고, 복음을 확장시키며, 더 많은 사람들에게 새 길을 열어준다.

이 모든 과정을 한 장의 그림으로 요약하자면, 야곱이 절뚝이면서도 담대하게 형 에서에게 달려가는 모습을 상상하면 좋겠다. 그 배경에 서서히 떠오르는 태양이, 깊고 길었던 밤과 씨름을 이겨낸 야곱의 영혼에 빛을 비춘다. 음악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잔잔한 선율로 시작하여 점차 고조되는 클래식 현악기나, 혹은 신앙 고백적인 찬송가—예를 들면 “주께 가까이 날 이끄소서”와 같은 곡—가 은은하게 깔린다고 상상해 보라. 그러면 우리의 마음도 함께 절뚝이며 달려가는 야곱을 따라 울고, 그 새벽의 감격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야곱의 드라마는 한 개인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 그는 이후 열두 아들의 아버지가 되어 이스라엘 민족의 시조로 자리매김한다. ‘화해’라는 새 정신이 뿌리내려 탄생한 민족은, 훗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써 인류 구원의 큰 흐름으로 이어진다. 장재형목사가 누누이 강조하듯, “화목, 사랑, 나눔”은 이스라엘과 교회의 가장 근본적인 정체성이다. 야곱이 환도뼈를 다쳐 쓰러질 뻔했지만 끝내 하나님의 복을 붙든 것처럼, 우리도 넘어질 수도 있지만, 끝내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붙들고 서로를 세워가야 한다. 이러한 삶의 이야기가 오늘을 살아가는 성도들의 입과 기록으로 전해질 때, 다음 세대는 지금보다 더 풍성한 은혜의 이야기를 듣고 믿음으로 자랄 수 있을 것이다.

야곱처럼 우리도 때로는 눈물 흘리며, 고통 속에서 브니엘의 새벽을 맞이한다. 그러나 그 아침은 하나님의 얼굴을 뵌 아침이며, 형제를 용서하고, 내가 받은 복을 나누고, 결국 새 역사를 써내려가는 부활의 아침이다. 우리 모두가 그 빛나는 아침을 향해 힘찬 걸음을 내디딜 수 있길, 그리고 그 길 위에서 “하나님과 사람으로 겨루어 이긴” ‘이스라엘’로 거듭나길 소망한다. 장재형 목사가 걸어왔던 믿음의 여정도, 결코 쉬운 길이 아니었지만, 그 길에서 경험한 수많은 은혜와 기적이 결국 이 본문의 메시지와 같은 맥락에서 증언되어 왔다. 그렇기에 이 야곱의 이야기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위로와 도전을 준다. 우리의 환도뼈가 깨져 절뚝일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그 길을 걸어갈 때, 분명히 하나님의 얼굴을 마주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얼굴을 뵌 사람들의 이야기야말로, 대대손손 전해져 내려가며 교회를 새롭게 할 힘이 되리라 믿는다.

www.davidjang.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