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사도 바울이 로마서 1장 16절에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라고 힘주어 선언할 때, 그는 단순히 개인적 소신을 피력하는 것이 아니라, 로마 제국이라는 웅장한 세계의 한가운데 서서도 결코 위축되지 않는 믿음의 담대한 고백을 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서신을 쓸 당시, 로마제국(Roman Empire)은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대단히 찬란한 영화와 막강한 권세를 자랑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이 거대한 세속의 힘 앞에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바울 자신이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히고 매질을 당하는 등 수많은 핍박을 감내해야 했음을 생각해 보면, 그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라고 시작하는 그 선언 한 마디가 얼마나 중요한 의지의 표명이며 신앙적 고백인지를 절감하게 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4장 13절에서,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때로는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같이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이는 그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상황을 예로 들면서, 당대의 크리스천들이 얼마나 사회적 하층민, 밑바닥 인생으로 취급되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고린도는 상업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대단히 중요한 도시였고, 로마 제국 안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하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도시에 정착해 있던 크리스천들은 사회적 권력이나 재력을 거의 가지고 있지 않았고, 따라서 사람들의 조롱과 무시, 때로는 직접적인 박해까지 받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현실 속에서도 “만물의 찌꺼기”가 된 이들이 실상은 보화를 담은 질그릇과 같고(고후 4:7), 하나님의 능력과 구원을 전하는 통로가 될 것임을 역설합니다.
로마 역시 고린도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큰 권세와 화려함을 자랑하던 제국이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흔적은 오늘날에는 이천 년 전의 유적과 부서진 잔해만으로 남아 있지만, 그 잔해를 보아도 과거에 얼마나 찬란하고 위세가 대단했는지 충분히 상상이 됩니다. 군사력과 경제력, 그리고 방대한 영토를 바탕으로 수많은 민족을 지배하고 융합해 온 로마의 한가운데서, 피가 흐르는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외친다는 것은 극도로 부끄럽거나, 세속적 관점에서 보면 어처구니없어 보일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라고 선포함으로써, 아무리 화려하고 강력한 제국이라 할지라도 결국 모든 사람은 복음의 능력으로 구원받아야 함을 강조합니다.
바울이 이토록 담대할 수 있었던 근원은 어디일까요?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났고(행 9장),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이야말로 죄인된 인간을 살리는 유일한 길임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자라고 확신했고, 또한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비록 부끄러움과 치욕스러운 순간이 있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는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고전 1:18)이기 때문입니다.
장재형(목사 역시 이 로마서 1장 16-17절에 담긴 중요한 진리를 강조해 왔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세상의 가치관, 물질적 풍요와 지적 자랑, 혹은 과학기술과 문명의 빛 아래서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는 듯한 태도를 보일 때가 종종 있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이 정말 현대인들에게도 효력이 있는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정말 믿을 만한가?”라는 세상의 질문에, 어떤 이들은 주눅 들고, 심지어 자신이 교회에 다니는 사실조차 숨기고 싶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분명히 가르쳤듯, 로마의 찬란한 문명이나 그 어떤 세속적 영광도 “복음”을 대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 시대와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 시대도 소위 ‘지혜로운 헬라인’과 같이 세련된 지적 비평을 하는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그들은 복음, 특히 십자가와 부활을 “미련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유대인의 관점에서 “나무에 달린 자는 저주받은 자”라는 전통적 사고방식이 있듯, 어떤 문화나 전통에서는 여전히 십자가의 죽음을 이해하기 어려워합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함으로써(고전 1:22-23), 자기 시대의 지배적 가치관과 철학에 구애받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복음이야말로 죄인을 구원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이라고 보았고, 어떠한 조롱과 핍박 속에서도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겠다’는 신앙적 결의를 분명히 표현했습니다.
이렇듯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라는 표현에는 단순한 자존심 이상의 신앙적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바울이 서슬 퍼런 로마와 철학적 자부심이 강한 헬라인들, 그리고 전통에 얽매여 있는 유대인들을 향해 동일하게 외친 이 메시지는 오늘날에도 유효합니다. 현대인도 재물, 학문, 권력, 혹은 문화적 자랑을 앞세우지만, 그 어떤 것도 인간을 근본적으로 구원할 수 없는 한계를 지닙니다.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이 세상이 영적 익사 직전이라면, 우리가 내민 “복음”이라는 동아줄만이 그들을 살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확신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장재형목사 역시 여러 설교와 저술에서, 교회가 이 포스트모던 시대 속에서도 복음을 결코 부끄러워하지 말고 담대히 전해야 함을 누차 강조해 왔습니다.
바울은 왜 이렇게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말을 먼저 꺼냈을까요? 그것은 로마와 같은 대제국 한복판에서도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는 사실을 선포하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의 눈에는 보잘것없는 십자가 사건이지만, 거기에 담긴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인류 전체의 운명을 바꿀 만한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가 봤을 때 로마도, 헬라의 지혜도, 유대인의 전통도 이 복음을 통한 구원 없이는 심판을 면할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랑해야 할 것이요, 결코 감추어 둘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교회 역사상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담대히 외쳤던 인물들은 시대적 상황을 넘어 역사의 전환점을 만들어 내곤 했습니다. 초대교회 순교자들은 복음을 위해 순교하면서도 자랑스럽게 믿음을 지켰고, 종교개혁가들은 중세의 거대한 제도권에 맞서 복음의 진리를 외치며 새로운 시대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현대의 많은 선교사들 역시 어려운 현장 속에서 십자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전하며 수많은 영혼을 주께 돌아오게 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라는 바울의 시작은, 오늘날 우리 각 사람에게도 강력한 도전이 됩니다.
물론 우리도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세상의 학문, 문화, 예술, 기술 등에 관심을 가질 수 있으며, 그것들 가운데 선한 것은 적극적으로 수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인간 구원”에 있어서는 결코 복음을 대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바로 이 구원 문제, 영혼의 생명과 직결된 문제를 로마서 서두에서부터 강조하고 있습니다. 어떤 인간적 방법이나 자랑, 세상의 지혜와 지식으로는 결단코 이룰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 오직 복음에 달려 있다는 점을 도무지 감출 수 없었던 것입니다.
특히나 오늘날은 과학과 의학, 그리고 다양한 형식의 ‘지식’이 풍성한 시대입니다.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급속도로 발전한 현대 문명은 인간에게 전에 없이 편리하고 빠른 생활 양식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내면의 공허함, 죄의식, 그리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물질적으로 풍성해질수록, 또 정신적으로 복잡해질수록 영혼의 근본적 문제는 더욱 도드라지기도 합니다. ‘왜 살아야 하는가’, ‘죽음 이후에는 무엇이 있는가’,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같은 궁극적 물음들은 아무리 의학이 발달해도, 기술이 진보해도, 인간의 죄성과 한계를 제거하지 못하는 한 해결되기 어렵습니다.
이러한 시대의 상황을 볼 때, 바울이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라고 말한 핵심은 더욱 빛을 발합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은 복음을 미련한 것으로 여기거나, 시대착오적이고 학문적이지 못하다고 평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의 눈에는 이 복음이야말로 궁극적 지혜이며, 무너져가는 인류가 붙들고 살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던 것입니다. 장재형목사 또한 여러 차례 설교와 저서에서, 현대의 최첨단 기술이 죄인 된 인간의 구원을 이루거나 영혼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치유해 줄 수 없음을 역설해 왔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복음을 선포하는 일에 주저하거나 부끄러워한다면, 그것은 세상에 가장 절박한 해답을 등지고 숨기는 것과 다름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예로 들며 “너희가 만물의 찌꺼기”라고 했듯, 오늘날 교회가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는 연약해 보이고 별 힘이 없어 보일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현실적 영향력이 적다고 여겨지기도 하고, 각종 비난에 시달릴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현실 속에서도 교회가 결코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근본은 “복음”입니다. 복음을 지키고 살아내며 담대히 전하는 것이 성도의 가장 중요한 사명입니다. 왜냐하면 복음 외에는 구원이 없고, 복음 외에는 인간 실존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만한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를 잊지 않을 때, 교회는 비로소 교회로서의 본질을 드러낼 수 있고, 성도는 세상의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치 있는 진리를 붙들게 됩니다.
바울은 로마서 1장 16절을 “왜냐하면(For)”이라는 접속사로 시작하는데, “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가?”를 설명하는 논리적 근거가 바로 뒤이어 제시됩니다. 즉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는 진술이 그것입니다. 복음이야말로 세상을 바꾸는 힘이고, 죄 가운데 죽어가는 인류를 살리는 길이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바울은 결코 복음을 부끄러워하거나 숨기려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구분 없이, 모든 이에게 임하는 구원의 소식이기에 바울은 온 세상을 향해 이 소식을 전하고자 헌신했습니다. 그리고 이 땅의 크리스천들은 오늘날에도 바울의 이 태도를 본받아 세상이 아무리 찬란해 보여도, “결국은 복음이 아니면 안 된다”는 사실을 되새겨야 합니다.
바울의 이 선언은 이천 년 전에만 국한된 옛 문서가 아닙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우리가 오늘날 읽어도 여전히 생생한 메시지로 다가옵니다. 문화와 학문이 아무리 발전해도 죄의 문제는 인간 스스로 해결할 수 없고, 죽음의 공포는 진화론적 설명이나 의학적 기술만으로는 근본적 해소가 불가능합니다.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과의 단절에서 비롯된 허무와 죄의식으로 인해 방황하며, 그것을 해결해 줄 유일한 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바울과 같은 자세로, 이 세상 한가운데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라고 선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첫 번째 소주제에서 우리가 함께 붙들어야 할 핵심 메시지입니다.
Ⅱ.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구원의 능력
바울은 이어서 로마서 1장 16절 하반절에서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고 선언합니다. 복음이 단지 ‘좋은 이야기’나 ‘감동적인 스토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죄인을 구원하는 능력(Power)이라는 것이죠.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학문이나 철학, 혹은 제도나 정치권력도 하지 못하는 일을 이 복음이 해낸다는 확고한 믿음을 바울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강력하게 강조하는 배경에는, 당시 로마 사회가 지닌 지적·문화적 자부심과 더불어, 여전히 많은 이방 신들을 숭배하는 다신교적 환경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환경을 두려워하거나 기죽지 않았습니다. “로마를 포함해 온 세상이 죄로 인해 멸망의 길을 가고 있지만, 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진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구원(Salvation)은 단순히 “지옥에 안 가고 천국에 간다”는 차원에 그치지 않습니다. 구원은 인간의 전 존재가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새롭게 재창조되는 사건입니다. 죄와 단절, 죽음과 단절, 그리고 사탄의 종노릇으로부터의 해방이 포함되며,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서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이 구원이야말로 인류가 간절히 필요로 하던 것이며, “복음”만이 가져다줄 수 있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특히 바울은 이 구원의 은총이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라고 밝힙니다. 그는 유대인 출신으로서 메시아를 기다려온 역사를 알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대 땅에 오셨으며, 구원의 언약 역시 이스라엘을 통해 계시되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에게 먼저 복음이 전파되는 것은 당연한 순서였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지경은 거기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헬라인, 곧 이방인들에게도 동일하게 구원의 문이 열려 있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복음이 결코 특정 민족이나 문화권에 국한되지 않는 보편적 복음임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미 구약성경에서도 여러 차례 암시되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완전히 열리게 된 새 시대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장재형목사 역시 이 부분을 해석하며, 구원은 모든 인류에게 열려 있는 복음이라는 점을 자주 설파해 왔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죄인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셨고, 복음을 접하는 누구든지 믿음으로 응답하면 구원의 혜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는 문화, 인종, 사회적 지위, 지적 수준을 가리지 않고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초대교회의 성장 과정에서 우리는 실제로 각 지역과 계층을 초월하여 복음이 증거되고, 다양한 이방 지역에도 교회가 세워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런 역사는 복음이 가진 능력이 세속의 장벽들을 뛰어넘는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이 어떠한 방식으로 “능력”을 발휘할까요?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18절에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나,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구원의 능력”은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에게 나타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와 대속의 죽음, 그리고 부활이야말로 죄 아래 있던 인간을 살리는 핵심이요, 능력의 통로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였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추구하였지만, 결국 바울은 그들에게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세상의 기대와는 정반대되는 방식으로 역사에介入(개입)하신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전한 것입니다. 인간의 잣대로 보면, 권력과 기적, 혹은 철학적 지혜와 탁월한 사유가 구원을 가져다줄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자기 비하와 희생으로서의 십자가 사건이 가장 강력한 구원의 길이었습니다. 이는 우리로서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지혜”이며 동시에 “능력”입니다.
바울은 이 구원 사건을 자신의 삶으로 체험했습니다. 그는 본래 열렬한 유대교 전통 수호자였고,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데 앞장섰던 사람이었습니다(행 8-9장).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후, 그는 완전히 다른 인생관과 세계관으로 전환되었고, 심지어 자신이 그토록 박해하던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한 인간의 삶이 180도 바뀌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바울은 “복음의 능력”을 통해 그렇게 변화되었고, 더 나아가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부름받아 세상 곳곳에 교회를 세우는 일에 헌신하게 됩니다. 이렇듯 복음은 단순히 한두 사람의 인생을 바꿀 뿐 아니라, 공동체와 역사 전체를 바꿀 수 있는 원동력이 됩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복음의 능력은 유효합니다. 어느 시대나 인간의 죄성은 변하지 않고, 죽음과 심판의 문제가 우리 앞에 실재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과학기술이 발전하고, 사회문화가 다원화되었다고 해도 인간 내면의 공허와 죄책, 악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문명이 발달할수록 죄의 형태가 교묘해지고 구조적 악이 복잡해지는 면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희생과 부활 사건은, 사람들의 죄를 씻고 관계를 회복시키며, 심지어 공동체와 문화를 새롭게 창조하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표현할 때, 여기에는 영적인 면뿐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을 포괄하는 회복의 이미지가 담겨 있습니다. 인간이 근본적으로 타락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분리되어 있었기 때문에 영혼은 병들고, 그 결과로 도덕적·윤리적 혼란, 사회적 갈등, 죽음에 대한 두려움 등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사람을 새로 태어나게 하고, 자범죄뿐 아니라 원죄의 사슬도 끊어내어 새 삶을 살 수 있게 하며,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게 해 줍니다. 그런 맥락에서 “구원”이 단지 ‘내세적 보장’만을 뜻하지 않고, 이 땅에서의 삶 전체를 변화시키는 능력을 포함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바울은 “이 복음”이 모든 사람에게 자동적으로 효력이 생긴다고 주장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모든 믿는 자에게”라고 전제 조건을 달았습니다. 믿음으로 화답할 때에야 비로소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이 되어 구원을 가져옵니다. 즉, 인간 편에서 요구되는 것은 “믿음”입니다. 우리가 십자가 사건과 부활을 단지 지식으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믿고 받아들일 때, 그리스도의 공로가 나를 위한 대속임을 인정할 때, 비로소 그 구원의 능력이 우리 안에 실제로 적용됩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며, 바울이 말한 복음의 능력의 작동 원리입니다.
장재형목사 역시 여러 설교에서, 믿음이란 “선물을 받는 손과 같은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미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의 길을 준비해 두셨으나, 그것을 나의 삶에 적용하고 내 것으로 삼으려면, 내가 그 선물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행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선물을 주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받지 않거나 의심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겠지요.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열심히 복음을 전해도, 그것을 사람들이 믿음으로 영접하지 않으면 그들에게는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받는 순간, 구원이라는 선물이 내 것이 되어, 나를 새롭게 만들고 영원한 생명을 부여하게 됩니다.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라는 말은, 구원이 특정한 민족적·문화적 장벽을 초월하여 이방인들에게도 동일한 은혜로 주어진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초대교회 시대를 돌아보면, 사마리아인, 로마 군인, 에티오피아 내시, 헬라 철학자 등 다양한 계층과 민족이 복음을 믿고 구원받았습니다(행 8장, 10장, 17장 등).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차별”이 아니라 “보편성”으로 나타납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의 힘이고, 이 힘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바울이 “어리석은 것”처럼 보이는 십자가와 복음을 끝까지 붙들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 “구원의 능력”을 자기도 몸소 체험했고, 타인들에게서도 반복적으로 확인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죄인들이 회개하고 변하여 거룩한 삶을 살게 되며, 원수 같던 이들이 사랑으로 서로 용납하고 교회 공동체를 이루고, 세상적 기준으로는 도무지 화합될 수 없는 다양성이 복음 안에서 하나가 되는 모습을 그는 직접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로마가 거대해 보이고, 헬라 철학이 뛰어나 보이며, 유대 종교가 율법을 자랑한다 해도, 이보다 더 뛰어난 하나님의 능력, 곧 복음을 통해 나타나는 구원 역사를 전하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때로는 교회 현실이 세상으로부터 비난받는 모습을 접할 때 낙심하거나 복음을 부끄러워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살던 시대를 기억해야 합니다. 당시 크리스천들은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큰 박해와 조롱 속에서도 복음을 붙들었습니다. 그리고 역사상 그 어느 시대에도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복음이 퍼져나갔고, 교회가 뿌리내리고 확장되었습니다. 복음은 고난을 뚫고 역사를 바꾸는 능력입니다. 우리 역시 이 믿음을 지킬 때, 세상이 아무리 부정적으로 말해도, 또 과학기술이 발전해도, 인간을 근본적으로 구원하고 치유하는 길이 오직 복음에 있음을 선포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는 바울의 선언이 오늘날에도 힘있게 작동하게 될 것입니다.
Ⅲ. 하나님의 의와 의인의 삶: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제 바울은 로마서 1장 17절에서 더욱 핵심적인 결론을 제시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 구절은 종교개혁의 핵심적 모토가 되었고, 기독교 구원론의 정수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바울은 복음 안에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 of God)”가 나타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의가 죄인 된 인간을 의롭게 만들며, 그 과정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고 강조합니다.
우리가 “의(義)”라고 할 때, 흔히 ‘옳고 그름의 기준’ 정도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의는 훨씬 더 깊은 구원론적 의미를 함축합니다. 인간은 율법 앞에서 모두 죄인임이 드러났고, 율법이 요구하는 완전한 의를 스스로 이룰 수 없어 모두 정죄 아래 놓여 있습니다(롬 3:10 이하).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게 하심으로, 죄인인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는 길을 여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의는 인간의 행위로 도달할 수 없는 차원을 초월해서, 오직 하나님의 구속적 사랑과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전가(Imputation)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 10절에서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다”고 했습니다. 율법이 죄를 깨닫게 해 주기는 하지만, 인간 스스로 죄에서 벗어나는 길을 제시하지는 못합니다. 오히려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죄인의 실존을 더 분명히 보여 줄 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율법을 지킴으로 의로워지려는 시도가 얼마나 무력한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의만이 죄인을 살릴 수 있음을 역설합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는 말의 요지입니다.
장재형목사도 여러 차례의 설교에서, 복음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심으로써 인간에게 선물하신 의”라고 강조했습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다는 로마서 5장 8절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 편에서 전적으로 이루신 이 구속 행위가 얼마나 ‘하나님의 의’로서 완전한지를 설명하곤 합니다. 그리고 이 의가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곧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으로만 수용된다는 것이 신약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구약의 하박국 2장 4절을 인용합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박국 선지자가 바벨론 제국의 침략 위협 속에서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엄중한 묵시를 받았던 것처럼, 이제 바울은 죄와 죽음의 권세가 왕노릇하는 이 세상에서도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진리를 선포합니다. 그것은 바벨론이 망할 운명에 놓여 있던 것처럼, 로마 제국 역시 영원하지 않으며,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전제에서 출발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강성해 보이거나 죄가 관영해 보여도,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의인”은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선언은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크게 깨닫고 외쳤던 구절이기도 합니다. 루터는 중세 교회의 면죄부 판매와 같은 타락한 관행 속에서, 인간이 스스로의 선행이나 공로로 구원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 가르침에 맞서 싸웠습니다. 그는 로마서 1장 17절과 갈라디아서를 읽고 연구하면서,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라는 종교개혁의 기치를 내걸었습니다. 인간의 공로나 제도로는 결코 구원이 이뤄지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신 의를 믿음으로 받을 때 의로워지고, 그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이는 현대 교회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우리 시대에도 어떤 사람들은 “착하게 살면 구원받지 않겠느냐”고 말하고, 어떤 사람들은 “종교적 의식이나 헌금 같은 봉사로 의를 쌓아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의인은 율법이나 인간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간다고 말입니다. 여기서 “살리라”는 말은 단지 물리적 생존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샬롬을 누리며, 최종적으로는 천국의 영광에 이르는 삶을 뜻합니다. 이것이야말로 복음 안에서 “의롭게 된 자”가 누리는 특권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라는 구절도 주목할 만합니다. 이는 믿음의 기초가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달려 있으며, 인간은 그 은혜에 대해 계속해서 “믿음으로” 응답하고 순종해 나가야 함을 시사합니다. 신앙생활은 어떤 한 번의 결정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처음 믿을 때부터 죽을 때까지, 믿음 위에 또 믿음을 더해 가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죄가 우리의 삶에 여전히 도전해 올 때도 있지만, 의롭게 된 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의”를 붙들고 다시 회개하며 믿음으로 전진해 나갑니다.
또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선언은 기독교 윤리의 기초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며, 우리의 자격이나 공로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겸손과 감사, 그리고 사랑의 실천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만약 인간이 스스로 선해지고 의를 이루어 구원받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공로를 자랑하며, 다른 이들을 멸시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복음은 “너희가 아무것도 아닌데, 은혜로 구원받았다”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는 누군가를 정죄하거나 차별하기보다, 오히려 은혜에 감사하며 자기 자신처럼 죄인인 이웃을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장재형목사도 이 대목에서, 교회 안에 때로는 율법적 사고가 침투하여 성도들이 서로의 행위를 평가하고 정죄하는 문제를 지적하곤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의롭게 된 자들인데, 어찌하여 서로를 함부로 정죄하고 율법의 잣대로 남을 재단하느냐”는 반문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을 붙들면, 우리는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님이 행하신 대속’과 ‘그 대속을 믿는 믿음’으로 인해 의로워졌음을 재확인하게 됩니다. 이것이 곧 오늘날 교회와 성도가 지켜야 할 핵심 진리입니다.
결국 바울이 강조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인간의 의로움은 나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해 주어지는 전적인 선물입니다. 그 선물을 내 것으로 받는 과정이 믿음이며, 그렇게 의롭다 함을 얻은 사람들은 계속해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말은, 동시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간다”는 말과 같은 맥락입니다. 구원은 단회적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믿음으로 사는 삶 전체를 통해 지속적으로 확인되고 성장해 나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의”는 또한 하나님 편의 신실하심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로마서 전체 문맥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약속하신 메시아, 곧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 그 약속을 지키셨고, 이방인과 유대인 모두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심으로써 “하나님이 의로우시다”는 사실을 드러내신다고 주장합니다. 즉, “하나님의 의”는 인간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로움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 약속에 충실하신 하나님의 성품, 신실하심을 포괄합니다. 그 신실하신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십자가에서 죄값을 치르신 것이야말로, 우리로서는 헤아리기 어려운 은혜입니다.
우리는 이 은혜 안에서 삽니다. 그리고 오직 믿음으로만 그 은혜에 참여합니다. 바울은 이 로마서 1장 17절을 서론으로 삼아, 뒤이어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심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 그리고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교리를 본격적으로 풀어 나갑니다. 전통적으로 로마서는 기독교 교리의 정수로 불리며, 수많은 신학자와 목회자, 그리고 성도들에게 영적 · 지적 영감을 주었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이 대원칙을 이해하는 것은, 사실상 신앙의 문을 열어 젖히는 열쇠와 같습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이 말씀은 결코 머리로만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는 차원이 아닙니다. 바울이 담대히 로마 제국을 향해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라고 외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바로 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진리”에 대한 철저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가 복음을 통해 경험한 용서와 은혜, 그리고 능력은 추상적인 교리가 아니었습니다.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는 실제적 체험이었고, 그 체험이 로마 제국의 위세를 두려워하지 않도록, 세상 그 무엇도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자각하게 만든 것이었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로마서 1장 16-17절이 가지고 있는 종교개혁적 의미와, 동시에 현대 교회가 회복해야 할 신앙의 본질을 자주 강조합니다. “오직 믿음으로”라는 선언은, 우리가 받은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에 전적으로 의존한다는 데서 나오는 겸손과 감사, 그리고 그분의 사랑에 기꺼이 헌신하는 열매로 이어져야 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의 삶은 세상이 줄 수 없는 자유와 기쁨, 그리고 당당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죄인에서 의인으로 바뀐 사람은 이미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큰 은혜를 체험한 증거가 되며, 그 결과 세상 앞에서 부끄럼 없이 복음을 전하고, 믿음으로 행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게 됩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바벨론이 침략해 온다 해도, 로마 제국이 강력하게 박해한다 해도, 그리고 오늘날 온갖 혼란과 죄가 관영해도,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삽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궁극적 해답입니다. 그리고 이 답은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믿음의 근거가 우리 자신의 결단이나 능력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의”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우리를 의롭게 하고, 그 의로움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살리며, 영원한 생명을 향해 인도합니다. 이것이 바울이 로마서 전체에서 힘주어 가르치려는 복음의 핵심이며, 모든 교회와 성도가 붙들어야 할 가장 중요한 기둥입니다.
결국 로마서 1장 16-17절에 담긴 메시지는 세 가지 핵심 포인트로 요약됩니다. 첫째,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라는 바울의 고백을 통해, 우리도 어떠한 세상적 압박 속에서도 복음이야말로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믿고 담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에, 다른 어떤 것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인간의 죄와 죽음, 영원 문제를 오직 복음이 해결함을 믿고, 교회가 이를 선포하는 일에 최우선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셋째, 복음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가 믿음을 통해 우리에게 전가되므로, 우리가 의롭게 되고 영생에 참여한다는 진리입니다. 그래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하박국 선지자의 예언이 오늘날에도 그대로 실현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로마서 1장 16-17절은 복음의 본질과 능력, 그리고 믿음을 통해 의로워지는 구원론의 핵심을 간략하면서도 강력하게 압축해 놓았습니다. 종교개혁자 루터의 간증처럼, 이 말씀을 깨달은 순간 “마치 천국의 문이 활짝 열리는 것을 보았다”는 고백이 나올 정도로, 영적 깨달음의 불꽃이 반짝이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말씀을 붙들고,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교회와 성도가 될 때, 세상은 비로소 진정한 구원의 길이 어디에 있는지 목도하게 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이 말씀은 단순히 개인 구원의 문제를 넘어, 교회와 역사를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교회는 이 진리를 붙들 때마다 갱신되고 개혁되었습니다. 바울이 로마 제국 속에서, 루터가 중세 타락한 종교 제도 속에서,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세속 문화의 도전 가운데서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붙드는 한 가지, 그것이 바로 복음이며, 십자가와 부활로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장재형목사가 여러 강의와 문헌에서 거듭 상기시키듯, 이 복음 앞에 우리가 설 때 비로소 교회는 생명력을 회복하고, 세상을 향한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꺼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담대히 전하며, 믿음으로 의에 이르고, 그 의를 따라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 나라의 귀한 열매가 이 땅에서 맺히게 될 것입니다.
로마서 1장 16-17절의 풍성한 내용을 다 담아내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핵심은 분명합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 그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를 구원한다는 것, 그리고 그 구원이 믿음으로 인해 우리에게 실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의로워진 자는 결코 율법적 공로나 세상의 자랑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을 힘입어 살아가는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이것이 로마서 1장 16-17절이 주는 궁극적인 메시지이며, 교회가 대대로 붙들어온 진리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날마다 기억합시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리고 그 믿음은 십자가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신뢰하고 감사로 받는 행위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영원한 소망과 생명이 있습니다. 그 어떤 인간의 사상도, 제국의 권력도, 시대의 조류도 대체할 수 없는 이 복음 앞에서,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당히 서는 것이 바로 오늘을 사는 크리스천의 특권이자 사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