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형목사, 썩어질 구습의 옷을 벗고, 진리의 새 사람을 입으라


인간의 실존은 필멸성(必滅性)이라는 불가피한 지평 위에 구축된다. 히브리서 기자가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라고 언명했듯이, 모든 개별적 존재는 시간의 불가역적 흐름 속에서 자신의 종착점을 향해 나아가는 유한한 실존이다. 장재형(장다윗)목사는 에베소서 4장 17절의 서두,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라는 사도 바울의 선포를 통해 이 숙명적 현실을 신앙의 법정으로 소환한다. 여기서 ‘증언’이라는 용어는 단순한 윤리적 권고를 넘어, 종말론적 심판대 앞에서 변호하고 증거할 사도의 목회적 책임과 성도들의 삶에 대한 엄중한 기대를 동시에 함축하는 법률적 무게를 지닌다. 우리의 생애가 언젠가 하나님의 공의로운 저울 위에 달릴 것이라는 인식, 즉 신전의식(Coram Deo)은 신앙을 ‘두려움과 떨림’의 실존적 태도로 이끌며, 모든 찰나를 영원의 관점에서 재해석하게 만드는 지혜의 시발점이 된다. 전도서가 토로하는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라는 탄식은 허무주의적 체념이 아니라, 오히려 유한한 삶 속에서 영원한 창조주를 기억해야 할 당위성(전 12:1)을 역설적으로 촉구하는 외침이다. 이 땅에서의 삶이 본향인 하늘나라를 향한 순례의 여정이라는 기독교적 세계관은, 죽음이라는 필연적 종결 앞에서 절망하는 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비하신 영원한 처소를 향한 희망의 서사를 부여한다. “죽은 정승보다 산 개가 낫다”는 세속의 격언이 생물학적 생명의 현존 자체에 절대적 가치를 두는 반면, 성경은 죽음 너머에 펼쳐질 영원한 삶이라는, 인류에게 주어진 가장 근원적이고 기쁜 소식, 즉 복음을 선포한다. 이 영원한 삶의 질과 방향을 규정하는 것이 바로 지금 이곳에서의 삶이며,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무엇을 행하며 살았는가?”라는 질문은 우리 모두가 대면할 궁극적 실존의 물음이다.

이러한 장엄한 신학적 파노라마 위에서, 장재형 목사는 사도 바울이 제시하는 죄와 의의 구체적인 양태를 심층적으로 분석한다. 바울은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엡 4:17b)고 명한다. 여기서 ‘이방인’은 특정 민족 집단을 넘어,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고 그의 생명에서 소외된 모든 인간의 보편적 상태를 지시하는 신학적 범주다. 그들의 핵심적 특징은 ‘마음의 허망함’이다. 장 목사는 이 허망함의 본질을 교부 어거스틴의 통찰을 통해 탁월하게 해부한다. 어거스틴이 그의 기념비적 저서 『고백록』에서 “당신을 위해 우리를 창조하셨기에, 당신 안에서 안식하기까지는 우리 마음에 평안이 없나이다”라고 고백했듯이, 인간 영혼은 그 구조상 하나님을 향한 무한한 갈망, 즉 ‘신적 지향성’을 내재한 존재로 창조되었다. 이 근원적 갈망이 왜곡되거나 소멸되어, 존재의 중심이 되어야 할 하나님이 부재하게 된 영적 진공상태가 바로’허망함’이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성전(고전 3:16)으로 지음 받았으나, 죄로 인해 그 내면의 지성소가 파괴되고 존재의 목적(telos)을 상실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종교적 신념 체계를 수용하는 것을 넘어, 상실했던 본래적 인간성을 회복하고, 시냇물을 갈망하는 사슴처럼(시 42:1) 하나님을 찾는 영혼의 본질로 회귀하는 존재론적 사건이다.

이러한 내면의 허망함은 구체적으로 세 가지 영적 병리 현상으로 발현된다고 바울은 진단한다. 첫째는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엡 4:18a)이다. 죄는 인간의 지성, 즉 ‘누스'(νοῦς)에 심각한 손상을 입혔다. 이는 단순한 지식의 결핍이 아니라, 영적 실재를 분별하고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는 인식 능력 자체의 마비를 의미하는, 이른바 ‘죄의 인식론적 결과'(noetic effects of sin)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마음의 창문이 오염된 상태’로 비유한다. 창문이 더러우면 외부의 풍경을 명확히 볼 수 없듯이, 죄로 혼탁해진 마음은 하나님의 영광과 진리를 직시할 수 없게 만든다. 예수께서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라고 선언하신 것은, 하나님을 인식하는 통로가 바로 정결한 마음임을 역설한다. 이 지성의 어둠을 몰아낼 수 있는 유일한 빛은 세상의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뿐이다. 둘째 현상은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엡4:18b)이다. 이 무지함은 지적 결핍이 아닌, 의지적이고 도덕적인 완고함에서 비롯되는 ‘책임져야 할 무지’이다. 시편 기자가”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시 14:1)라고 지적했듯이, 하나님을 의도적으로 부인하고 그의 존재를 인식하기를 거부하는 태도 자체가 가장 심각한 영적 무지의 증거다. 셋째는 “저희 마음이 굳어짐”(엡 4:18c)이다. 생명은 유연성과 역동성, 온기로 특징지어진다. 반면 죽음은 경직과 냉기, 굳어짐을 동반한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분리된 인간의 영혼은 생명력을 상실하고 화석처럼 굳어지며,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감화에 반응하지 못하는 영적 경화(spiritual sclerosis) 상태에 빠진다. 세상의 영적 분위기가 스산하고 차갑게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이 생명 없는 굳어짐이 팽배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내면의 황폐화는 필연적으로 외부적 삶의 타락으로 귀결된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엡 4:19). 장재형 목사는 이 구절을 통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실존이 죽음에 이른 자의 상태와 유사한 ‘도덕적 불감증’에 빠졌음을 지적한다. ‘감각 없는 자’가 되었다는 것은 죄에 대한 민감성을 완전히 상실하여 양심이 화인 맞은 것과 같은 영적 마비 상태를 의미한다. 더 이상 죄를 죄로 인식하지 못하고, 거룩함에 대한 갈망 없이 자신을 쾌락의 흐름에 내던지는 것이다. 여기서 ‘방탕’은 특히 성적 타락을 지시하며, 이는 로마서 1장에서 바울이 지적한 우상숭배에 뒤이은 인간 타락의 대표적 징후와 정확히 일치한다. 인간에게는 영적 기쁨과 육적 기쁨이 공존한다.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오는 영적 기쁨은 인간 영혼에 최고의 만족과 평안을 부여하지만, 이 기쁨을 상실한 영혼은 그 존재론적 공허를 메우기 위해 필사적으로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게 된다. 그 결과, 무한한 것을 향한 갈망이 유한한 대상에 잘못 투사되어 끝없는 욕심으로 더러운 것을 행하며, 결국 자신을 파멸로 이끄는 방탕의 삶에 스스로를 방임하는 비극에 이른다.

이 절망적인 인간 실존의 분석에 이어, 사도 바울은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엡 4:20)는 강력한 전환을 선언한다. ‘오직’이라는 불사는 앞서 묘사된 이방인의 삶과 그리스도인의 삶 사이에 존재하는 근본적이고 절대적인 단절, 즉 인식론적, 존재론적 파열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인은 허망, 암흑, 무지, 경화, 방탕으로 이어지는 타락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거부하고 새로운 삶의 원리를 체득한 자들이다. 바울은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엡 4:21)라고 말하며, 에베소 교인들의 신앙적 성숙과 진리에 대한 체화를 깊이 신뢰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장재형 목사는 이 대목에서 사역자의 겸손과 성도를 향한 존중의 태도를 발견한다. 바울은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지 않고, 그들이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배우고 가르침 받은 주체임을 인정함으로써 그들을 격려하고 세워준다. 진리는 추상적인 교리 체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 안에 체화되어 있으며, 그리스도인은 그 인격과의 유기적 연합을 통해 진리를 배우고 삶으로 살아내는 자들이다.

이러한 신학적 대전제를 바탕으로, 바울은 마침내 그리스도인의 삶의 핵심 원리를 ‘옷’이라는 탁월한 비유를 통해 제시한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2-24). 이 구절은 기독교 구원론의 핵심인 칭의(Justification)와 성화(Sanctification)의 교리를 존재론적 변혁을 위한 실천적 명령으로 풀어낸다. ‘옛 사람’은 아담 안에서 태어난, 죄의 관성에 지배당하는 우리의 본성적 자아를 의미한다. 이 옛 사람은 ‘유혹의 욕심’을 동력으로 삼으며, 그 귀결은 ‘썩어져 가는’, 즉 부패하고 소멸하는 운명이다. 그리스도인의 첫 번째 과제는 이 옛 사람을 단호하게 ‘벗어버리는’ 것이다. 이는 과거의 죄된 삶의 방식, 특히 장재형 목사가 강조하듯 우리를 가장 끈질기게 속박하는 ‘구습(舊習)’과의 의지적 결별을 의미한다. 우리의 영적 싸움은 본질적으로 이 뿌리 깊은 관성적 죄악과의 투쟁이다.

단순히 옛 옷을 벗는 소극적 행위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반드시 ‘새 사람을 입어야’ 하는 적극적 행위가 뒤따라야 한다. ‘새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로 거듭난, 성령으로 말미암은 새로운 정체성이다. 이 새 사람은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존재, 즉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존재이다. 여기서 ‘입는다’는 행위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삶의 양식을 총체적으로 규정한다. 장재형 목사는 이 의복의 비유를 성경 전체의 거시적 맥락 속에서 풍성하게 조명한다. 창세기에서 함이 벌거벗은 아버지 노아의 수치를 덮어주지 않아 저주받은 이야기, 그리고 요한계시록에서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는다는(계 22:14) 말씀은 동일한 영적 원리를 관통한다. 여기서 옷은 성도의 ‘옳은 행실'(계 19:8) 즉, 성화된 삶을 상징한다.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의라는 완전한 예복을 선물로 받았다(칭의). 이것은 종이 양자가 되는 것과 같은 법적 지위의 변화이다. 그러나 혼인 잔치의 비유에서 예복을 입지 않은 자가 쫓겨나듯, 우리는 이 의의 옷을 받은 것에 안주하지 않고, 삶 속에서 그 옷을 더럽히지 않도록 부단히 세탁하고 관리해야 할 책임이 있다(성화). 이것이 바로 상태의 변화이다.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는 이 역동적 과정의 중심에는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엡 4:23)라는 내적 변혁의 동력이 자리한다. 이 ‘심령의 새로움’은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지속적인 과정이며, 우리의 생각과 가치관, 동기와 욕망의 근원인 ‘정신의 영'(the spirit of your mind)이 성령의 능력으로 끊임없이 갱신되는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한다. 주께서 우리를 의롭다 하셨을 뿐만 아니라(칭의), 진리의 거룩함 속에서 우리를 새로운 사람으로 계속해서 빚어가고 계신다(성화). 따라서 사도 바울의 권면, 그리고 장재형 목사의 설교는 우리를 향한 준엄하면서도 희망에 찬 부르심으로 귀결된다. 우리는 더 이상 허망한 세상의 가치를 따라 썩어질 구습에 매여 사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자신을 정결케 하고 거룩한 백성으로 준비하며, 장차 도래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살아가는 존귀한 ‘새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확립하라는 것이다. 이 땅에서의 삶은 옛 사람의 낡은 옷을 벗고 새 사람의 빛나는 옷을 입는 거룩한 훈련의 장이며,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점점 더 그리스도를 닮은 아름다운 성결의 인간으로 완성되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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