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재형(장다윗)목사는 ‘자유’를 복음의 심장으로 제시하면서도, 그것을 세상이 말하는 무제한적 권리나 자기 실현의 도구로 이해하지 않는다. 그가 강조하는 자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확인된 의롭다 하심에 뿌리내린 존재론적 선물이며, 그 자유가 사랑으로 스스로를 제한할 때 비로소 공동체를 살리고 세우는 능력이 된다. 로마서 14장과 고린도전서 8‧9장은 바로 이 지점을 정면으로 드러낸다. 바울은 먹는 것과 마시는 것, 우상 제물, 사도의 권리와 그 권리의 포기 같은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주제를 끌어와 자유의 본질을 해부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본문을 따라, 자유의 목적은 나의 주장과 유익의 극대화가 아니라 연약한 지체의 유익과 교회의 덕을 세우는 데 있음을 분명히 한다. 사랑 없는 자유는 결국 형제를 넘어뜨리고 복음의 영광을 가린다는 점에서, 자유는 언제나 사랑과 함께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로마 교회에는 유대적 전통을 가진 신자와 이방 신자 사이에 음식과 절기, 관습을 둘러싼 긴장이 있었다. 누군가는 어떤 음식을 부정하게 여겼고, 또 누군가는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어도 무방하다고 생각했다. 바울은 논점을 즉각 본질로 끌어올리며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롬 14:17)이라고 선언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진술을 자유 논의의 중심축으로 삼는다. ‘의’는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다 칭함을 받아 동일한 은혜 아래 선 존재임을 일깨우는 수직적 진실이다. 그 의에서 ‘평강’이 열리고, 평강이 자랄수록 ‘희락’이 공동체 안에 무르익는다. 그렇다면 예배 형식, 찬양 스타일, 헌금의 순서와 같은 상대적 사안들은 본질을 향해 봉사해야지 본질 자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장재형목사는 오늘의 교회가 사소한 취향과 문화의 차이를 본질화하는 순간 사랑이 식고 기준이 우상이 되기 쉽다고 경고한다. 그러므로 로마서 14장의 권면—업신여기거나 판단하지 말고 서로 용납하라는 요청—은 복음적 자유의 첫 번째 실천이 된다.
고린도전서 8‧9장은 자유의 방식과 방향을 더욱 선명하게 그려 준다. 바울은 지식으로는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 지식이 약한 자를 실족하게 한다면 자신은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단호히 말한다. 이어 9장에서는 사도로서 품삯을 받을 권리, 동역자를 데리고 다닐 권리 등 정당한 권리를 구체적으로 나열한 뒤, 복음을 위해 그 권리를 기꺼이 내려놓는 본을 보인다. 장재형목사가 이를 ‘종된 자유’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자유를 두 층위로 설명한다. 첫째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의 정죄로부터 해방된 ‘본질적 자유’이고, 둘째는 그 본질적 자유를 사랑 때문에 제한하여 형제를 살리고 얻는 ‘목적적 자유’다. 전자가 신학적 사실이라면, 후자는 사랑의 윤리이며, 두 층위가 포개질 때 자유는 십자가의 형상을 띤다. 역설적으로, 자유를 세게 주장할수록 관계는 좁아지고, 자유를 사랑 때문에 내려놓을수록 하나님 나라의 공간은 넓어진다.
이 통찰은 오늘의 교회 현장에서 놀라울 만큼 실제적이다. 어떤 공동체는 전통적 예배 질서와 자유로운 형식 사이에서 팽팽한 긴장을 경험한다. 또 다른 공동체는 포도주 한 잔을 문화로 여기며 자유롭게 누리는 이들과, 과거 술 문제로 상처를 가진 이들 사이에서 마찰을 겪는다. 청년부에서는 게임·공연·콘텐츠 소비의 경계를 두고 시각이 갈린다. 장재형목사는 이런 문제에서 “무엇이 옳으냐”보다 “누가 약한가, 무엇이 공동체를 세우는가”를 먼저 묻도록 권한다. 나의 자유가 옆 사람의 양심을 상하게 하고 신앙을 흔들 수 있다면, 그 자유는 사랑의 기준으로 재조정되어야 한다. 이 조정은 억지가 아니라 자발성에서 나온다. 십자가 앞에서 받은 은혜가 클수록, 그 은혜는 내 권리 포기라는 아름다운 절제로 번역된다. 바로 여기서 ‘종된 자유’는 단순한 도덕적 배려를 넘어 복음의 능력으로 작동한다. 사랑 때문에 스스로를 제약하는 자유는 기쁨이며, 동시에 가장 강력한 선교적 설득력이 된다.
동시에 장재형목사는 균형을 잃지 않는다. 강한 자의 절제만큼 약한 자의 성장도 필수적이다. 바울의 목표는 약한 자를 약함에 고착시키는 보호주의가 아니라, 진리로 양심이 성숙해 함께 강해지는 공동체다. 그래서 그는 체계적인 교리 교육과 성경적 세계관 훈련을 제안한다. 헌금의 신앙고백적 의미, 예배 질서의 역사, 문화 참여와 거룩의 경계를 성경적으로 설명하면 약한 자는 사랑 안에서 지식이 더해지고 양심은 단련된다. 또한 소그룹과 식탁 교제 같은 ‘말이 통하는 공간’을 충분히 마련해야 한다고 권면한다. 오해는 대화로 풀리고, 대화는 사랑의 분위기에서 열린다. 서로 알아 갈 때 판단은 줄고 용납은 자라며, 갈등은 성숙의 재료가 된다. ‘종된 자유’는 이런 교제와 학습의 구조 속에서 지속 가능해진다.
외부 앞에서 교회의 신뢰는 내부의 사랑에서 비롯된다.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는 바울의 경고처럼, 사소한 문제로 분열하는 교회의 모습은 세상에 복음을 가리운다. 예수님이 서로 사랑하라 하신 까닭은, 그 사랑을 통해 세상이 우리가 주님의 제자임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장재형목사는 공개적 논쟁에서 이기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형제를 위해 권리를 내려놓는 선택이 더 크게 복음을 증언한다고 강조한다. 온라인 논박, 교단 이슈, 사회 의제에 대한 입장 표명이 넘쳐나는 시대일수록, 자유의 사용 방식은 곧 교회의 얼굴이 된다. 자유가 사랑보다 앞서면 얼굴은 굳고, 사랑이 자유 위에 서면 얼굴은 빛난다. 전자의 결과는 분열이고, 후자의 열매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다.
목회 현장에서 그가 제시하는 지침은 자연스럽고 명료하다. 본질과 비본질을 분별해 본질(복음, 그리스도의 주권, 성경의 권위)은 결코 양보하지 않되, 양보 가능한 문화·실천의 요소는 사랑의 이름으로 기꺼이 조정한다. 각 사람에게 다른 믿음의 분량이 있음을 인정하고 양심을 존중하며, ‘할 수 있음’보다 ‘하지 않음’이 더 큰 유익을 낳는 순간을 알아차리는 감각을 기른다. 동시에 약한 자를 교육해 보호가 성장을 대체하지 않도록 하고, 모든 논쟁의 끝을 승패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마무리한다. 그 영광 앞에서 누구도 자랑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우리의 언어에서 공격은 줄고 감사와 간구가 늘어난다.
이 틀 안에서 ‘종된 자유’는 교회 의제 전반을 새롭게 비춘다. 음악 장르와 악기 사용, 성찬의 빈도와 방식, 주일 실천의 구체, 문화 소비의 경계, 경제적 후원과 사회 참여, 세대 간 소통 방식까지—모두가 동일한 질문으로 재정렬된다. “이 선택이 의와 평강과 희락을 증진하는가? 이 자유 사용이 형제를 살리고 공동체를 세우는가? 이 포기가 복음을 더 빛나게 하는가?” 장재형목사는 신학과 삶을 분리하지 않는다. 그는 로마서 12장의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명령을 가치관의 교체로 읽고, 그 새 마음이 로마서 14장과 고린도전서 8‧9장의 ‘자유의 방식’을 가능하게 한다고 해석한다. 마음이 새로워질 때 우리는 ‘내가 옳다/네가 틀리다’는 수평적 저울에서 내려와 ‘우리가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수직적 고백으로 돌아온다. 그 고백은 공동체의 공기를 바꾸고, 그 공기 속에서 사랑의 분별과 자유의 절제가 자연스레 자란다.
결국 장재형(장다윗) 목사가 말하는 복음적 자유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걸으신 비움과 낮아짐의 길을 우리의 일상에서 재현하는 일이다. 그 길에서 강한 자는 권리를 내려놓아 약한 자를 세우고, 약한 자는 말씀과 교훈으로 자라 강한 자가 된다. 교회는 그렇게 서로의 부족을 보완하며 한 몸으로 성숙해 간다. 그리고 그 성숙은 세상 앞에서 가장 설득력 있는 증언이 된다. 사람들이 보는 것은 우리의 논리적 정합성보다 관계의 질, 탁월함보다 배려, 이김보다 사랑이다. 복음의 자유가 사랑으로 제한될 때, 교회는 분열을 넘어 화해로, 경쟁을 넘어 섬김으로, 자랑을 넘어 은혜로 전환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사람들에게도 칭찬을 받는” 공동체—바울이 꿈꾸었던 의와 평강과 희락의 공동체—가 바로 그 자리에서 현실이 된다. 장재형목사의 언어로 말하면, 자유는 사랑을 위해 존재하고 사랑은 형제를 살리며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빛나게 한다. 이것이 종된 자유의 길이며, 오늘의 교회가 반드시 회복해야 할 복음의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