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와 유다, 중생의 갈림길: 장재형 목사

예수님의 공생애가 마지막을 향해 가던 저녁, 요한복음 13장은 가장 숨이 막힐 듯한 긴장 속에서 제자들의 모습을 비춥니다. 한 자리에 둘러앉아 있던 제자들 가운데, 눈에 띄게 대조되는 두 인물이 있었습니다. 누구보다 열정적이고 충성스러웠던 베드로와, 돈궤를 맡아 살림을 챙기던 동시에 은 삼십에 스승을 넘긴 유다입니다. 장재형(장다윗) 목사는 이 장면을 단순한 성격 비교가 아니라, 두 사람을 통해 드러나는 “참된 중생(重生)의 본질”을 보여주는 거울로 읽어냅니다. 그리고 오늘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고백하는 우리가 이 거울 앞에서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직면하도록 초대합니다.

많은 이들이 잊고 지나가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을 배반한 사람이 유다 한 명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죽기까지 따르겠다”고 호언장담하던 베드로 역시 위기의 순간에 세 번이나 스승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둘 다 무너졌고, 둘 다 주님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극명한 갈림길에 서게 되죠. 한 사람은 주님께 돌아왔고, 다른 한 사람은 스스로 돌아올 길을 끊어 버렸습니다. 장재형(올리벳대학교 설립) 목사는 그 차이를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상징, 곧 “목욕한 자”와 “발을 씻는 자”의 비유에서 찾아갑니다.

발을 씻기시는 자리에서 베드로는 난감함과 당황함에 거부부터 합니다. 그는 결코 발을 씻기지 못하게 하겠다고 말하지만, 예수님은 “내가 너를 씻기지 않으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다”는 단호한 말씀으로 그를 멈춰 세우십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극단적으로 반응하며 발뿐 아니라 온몸을 씻어달라고 부탁합니다. 예수님은 그때 중요한 원리를 드러내십니다. “이미 목욕한 자는 발만 씻으면 된다”고 말이죠. 장재형 목사는 이 대목을 ‘중생의 확증’이라는 관점으로 설명합니다. 베드로는 이미 주님의 사랑과 말씀, 은혜로 인해 근본적으로 새 사람이 된 사람, 즉 완전히 “목욕을 마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넘어지고 죄를 범했어도, 다시 주님께로 돌아올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었습니다.

중생은 단순한 감정의 격변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이 온 존재를 관통하는 “철저한 목욕”입니다. 과거의 죄가 씻기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새롭게 세워지는 사건입니다. 로마서 8장이 선언하듯, 그 이후에는 어떤 것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중생을 “내 모습은 그대로인데 천국 입장권만 손에 든 상태”로 오해하지 말라고 강조합니다. 중생은 옛 사람이 십자가에서 죽고, 주님의 생명이 실제로 살아나는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구절을 중생의 중요한 열쇠로 풀이합니다. 물은 죄 씻음과 심판을 동시에 상징하며, 세례는 “죄에 대해 죽고, 의를 향해 살겠다”는 공개적이고도 단호한 선언입니다. 그러나 물이 몸을 씻을 수 있을지라도, 마음 깊은 곳까지 변화시키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역사가 필요합니다. 성령은 진리를 비추시고, 그 진리를 사랑하게 하며,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이 실제로 새 생명으로 우리 안에서 작동하도록 만드시는 분입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거듭나는 일”입니다.

이 대목에서 카라바조의 「그리스도의 체포」가 주는 상징은 의미심장합니다. 어둠 속에서 유다가 입맞춤으로 예수님을 배반하는 한편, 제자들은 혼란 속에서 도망치려 합니다. 빛은 오직 예수님의 얼굴 위에만 머물고, 주변의 인물들은 어둠 속에서 흔들립니다. 이는 베드로와 유다의 마음을 비유적으로 보여줍니다. 두 사람 모두 흔들렸지만, 차이는 “빛 앞에 다시 설 용기”에 있었습니다. 유다는 자신이 세운 기준 안에서 스스로를 정죄했고, 결국 빛을 향해 다시 걸어가지 못했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아니라 자기 판단을 의지한 비극적인 결말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단은 죄를 짓게 유혹한 뒤, 곧바로 정죄의 목소리로 바뀌어 “너는 끝났다”며 절망을 심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하지 못한 사람일수록 이 속삭임에 무너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우리가 지은 죄가 아무리 크라도, 하나님께 돌아오는 길을 막을 수 있는 죄는 없습니다. 때로는 공동체의 도움이나 전문적인 상담이 필요할 수도 있지만, 결론은 하나입니다. 절망이 아닌 회개가 하나님의 길입니다.

반면 베드로는 부족함이 많았지만 주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한 사람이었습니다. 풍랑 속에서 붙들어 주신 손,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던 부활하신 주님의 시선… 그 기억이 있었기에 그는 절망 속에서도 끝내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사랑이 자신을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고, 그 믿음이 그를 다시 주님께로 이끌었습니다. 이것이 “한 번 목욕한 자”의 힘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중생의 본질을 몸소 증언한 사람입니다. 그는 한때 자신의 의로 가득 찬 사람이었지만,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옛 자아가 무너지고,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 안에서 새롭게 뛰기 시작한 것입니다.

중생은 한 번의 목욕과 같습니다. 그 이후의 삶은 발을 씻는 과정입니다. 세상 속을 걸으며 다시 죄의 먼지를 묻히지만, 이미 목욕한 자는 언제든 주님께 나아와 발을 씻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의 “정죄함 없음”의 약속은 바로 그런 사람에게 주어진 선언입니다.

결국 질문은 우리에게 돌아옵니다. 나는 지금 어떤 모습으로 주님을 따르고 있는가? 유다처럼 자기 계산과 자기 의에 사로잡힌 채 스스로를 정죄하는 길을 걷고 있는가? 아니면 베드로처럼 넘어지더라도 다시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는 길을 선택하고 있는가? 장재형 목사는 이 물음 앞에 정직하게 서라고 권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깊은 사랑으로 죄인에게 다가오셨는지 보여줍니다. 죄가 깊을수록 더 깊이 주님께 달려가야 합니다. 스스로 버티지 말고, 공동체와 도움을 요청해야 할 때는 겸손히 요청해야 합니다. 신앙은 혼자 싸우는 일이 아니라 서로의 발을 씻겨 주며 동행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베드로와 유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따라야 할 길과 피해야 할 길을 동시에 보여 줍니다. 우리 안에 있는 유다적 요소가 십자가 앞에서 죽어야 하며, 베드로처럼 회개하며 다시 일어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절망의 역사를 뒤로하고, 회복과 소망의 길을 걷게 됩니다.

이 글은 요한복음 13장을 중심으로, 중생과 회개, 성령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복음의 심장을 다시 돌아보는 묵상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단순한 습관을 넘어서, 실제로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살아나는 변화로 이어지기를 소망합니다. 단번에 목욕한 자로서, 날마다 발을 씻는 자로서, 십자가와 부활 사이의 길을 오늘도 걸어가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레이스앤피스

www.davidja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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